따뜻한 차(茶) 한 잔이 절절히 생각나는 비 내리는 쌀쌀한 오후. 그렇게 그리운 차 한 잔 마실 여유 없이 모 기업 임원과의 인터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울 종각에 있는 빌딩으로 달려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날은 차를 들이켜야 제대로 인터뷰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음료수를 준비해오겠다며 나갔던 임원 비서의 쟁반에는 따뜻한 차 대신 차가운 오렌지주스 잔이 놓여 있었다. 그때 필자의 심정은 실망이라기보다 절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적절할 것 같다.

차는 커피와 쌍벽을 이루는 현대인의 대표적인 기호식품이다. 그러나 커피보다 카페인 함량이 낮고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피보다 차를 더 자주, 또 부담 없이 애용하는 편이다.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혼자일 때나 함께일 때나 벗이 돼 주는 차. 현대인에게 차는 단순한 음용의 차원을 넘어 사교의 기능과 휴식 및 행복의 수단이 됐다.

세계적으로 생산되는 차의 70% 이상은 홍차이며, 오늘날 세계인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차 중 하나다. 차, 그 중에서도 홍차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영국이다.

영국인들의 차 사랑은 유별나서 전쟁 중에도 티타임(tea time)을 가질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 걸프 전쟁 때 영국군은 탱크 위에서 격식을 차려 차를 끓여 마셨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하루에 3번 이상 차를 마신다. 아침에 마시는 블랙퍼스트 티(breakfast tea), 오후 4시 경에 마시는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그리고 저녁식사 직전인 오후5시에 마시는 하이 티(high tea)가 있다.

특히 애프터눈 티타임인 오후 4시가 되면 일반 가정은 물론 세계인들이 몰려드는 공항이나 환자들이 있는 병원에서도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스콘이나 케이크와 함께 차를 마신다.

이처럼 영국에서 차(홍차)는 국민음료를 넘어 중요한 문화로 자리잡았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인들의 지극한 차 사랑은 과거 제국주의가 낳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1773년 영국은 미국 식민지 상인에 의한 차 밀무역을 금지시키고 동인도회사에게 독점권을 부여하는 관세법을 제정해, 미국으로 가는 차에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평소 식민지 자치에 대한 지나친 간섭에 불만을 갖고 있던 차에 이 같은 관세법이 제정되자 보스턴 시민들은 격분해 차 불매운동을 벌이고, 차 상자를 바다에 집어던졌다. 이것이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며, 이를 계기로 신대륙에서 독립전쟁의 기운이 싹트게 됐다.

이후 미국에서는 차 대신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영국에서는 커피 대신 차를 마시는 것이 일종의 애국적인 행위가 됐다. 한편, 차가 영국의 일반인들에게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로 통치했던 인도의 역할이 컸다.

인도는 세계 최대의 홍차 생산국으로, 오늘날도 영국에서 마시는 차의 원료도 주로 인도산이다.

영국은 차를 세계적으로 대중화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영국의 유명 홍차 브랜드의 하나인 립톤(Lipton)은 창업주인 토머스 립톤의 이름을 따 만든 브랜드다. 립톤은 전 세계에 홍차를 보급해 지금까지도 ‘홍차 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차의 생산 공정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고 판매 유통구조를 혁신해 차의 가격을 인하하는 한편, 양철 용기에 담아 팔던 차를 티백 포장으로 바꿔 차를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음료로 만들었다.

인류가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5,000년에 이른다고 한다. 물론 다도(茶道) 문화가 영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차 한 잔이 무척 당기는 날이면 유독 영국이 떠오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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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르드몽드 기자 ericwinte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