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도 식물과 함께 하는 삶 살 것"1년 중 3분의 1은 전국의 산 오르내리며 연구·채집, 대인 스트레스 적은 것이 장점

울타리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서울 홍릉수목원이 있는 국립산림과학원으로 들어서는 길.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풍경이 싹 바뀐다.

아름드리 거목들과 키 작은 관목들, 이름 모를 풀들이 거대한 종대, 횡대를 이루며 양쪽에 도열해 손님을 맞는다. 라일락 향기도 길목에서 발길을 사로잡는다. 대도시 마천루 사이에서 실종된 늦봄의 풍경이 그곳에 숨어 있었다. 이곳이 일터라면 매일 출근하는 게 소풍 같지 않을까? 홍릉수목원 연구원 최명섭(54) 박사를 만났다.

“좋아하는 대상이 식물인데, 그 좋아하는 대상을 항상 마음껏 보고, 때로 아프면 치료도 해 주는, 이처럼 좋은 일이란 없지요.”

수목원 관리와 조사 연구작업

최 박사는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태과 소속의 연구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인 홍릉수목원을 보살피고 있는 그는 광릉수목원을 탄생시킨 주역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1981년 농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83년에 임용돼, 2003년 ‘마가목의 생태, 분류’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25년째 올곧게 수목원을 지켜오고 있다.

85년 역사를 지닌 홍릉수목원은 현재 국외종까지 합쳐 나무 1,200여 종, 풀 810여 종 등, 총 2,000여 종의 식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토지 면적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식물들이다. 최 박사가 속한 산림생태과에만 15명의 연구원이 근무하며 각자의 전공분야대로 평생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최 박사의 전공은 ‘식물분류’다. 나무와 풀 하나하나마다 그것의 이름이 뭔지, 어떤 곳에서 자라고, 모양은 어떠하며, 용도는 무엇인지, 각종 나무와 풀들의 생태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기본적인 업무는 수목원이 보유한 수목들이 모두 건강하게 대를 이어가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각 종류별로 충분히 개체를 수집하고, 돌보는 것이다. 수목원 관리와 조사, 연구작업을 병행해야 한다.

“우리나라 전체로는 나무는 약 1,100종, 풀은 3,500종쯤 됩니다. 여기에 외국에서 도입한 종류들까지, 저희 연구원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풀 종류가 특히 까다로운데, 똑같은 풀이라도 아주 어릴 때랑 어느 정도 자랐을 때, 꽃이 필 때의 모양이 각각 다 달라서 외우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학교에서 이미 배우고 들어온 경우라도 현장에서 보면 막막해지기 십상이지요. 신참 시절 산에 오를 때 배낭에 식물도감을 넣고 다니면서 낯선 풀이나 나무를 볼 때마다 꺼내보곤 했어요.”

연구원 최고의 꿈이자 희망사항은 새로운 종류의 식물을 발견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이미 알려진 식물의 새로운 자생지를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해당 학계에서는 사실상 보기 드문 행운이다.

최 박사는 일찍부터 그런 성취감을 맛봤다. 경력 4년차에 접어들던 86년 7월 ‘바늘까치밥나무’의 새로운 자생지를 발견해 주목을 받았던 것. 함경북도 고산지대에 있는 것으로만 알려졌던 이 나무를 강원도 발왕산 계곡에서 찾아냈다. 이 사실은 한국수목도감에도 수록되어 있다.

연구원들은 수시로 출장을 간다. 많을 때는 1년 중 3분의 1을 밖에서 보낸다. 행선지는 모두 산. 전국 방방곡곡의 산을 오르내리며 필요한 식물 표본들을 채집한다. 경력별로 다양하게 구성원을 이루는데 3, 4명의 연구원들이 조별로 움직인다. 한 번 출장에 3박 4일 또는 4박 5일이 보통이다.

준비물은 간단한 옷가지와 갈아입을 속옷, 흙을 팔 때 쓸 수집괭이, 채집한 식물을 담을 비닐봉투 따위다. 일반 배낭과는 다른, 훨씬 크고 내부 공간도 넉넉한 별도의 수집용 배낭을 1, 2개씩 메고 산에 오른다. 같은 산에 가더라도 등산객들이 잘 다니지 않는 코스만 일부러 골라 다닌다. 산행객이 많은 산길에는 식물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라면 1시간 만에 끝낼 등산코스도 이들에겐 3시간 이상 걸린다.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샅샅이 사방을 훑어가며 나무와 풀들을 조사한다. 마치 지뢰수색대처럼 온 신경이 긴장된다.

원하던 어린 나무나 풀 포기가 발견되면 괭이로 조심조심 주변의 흙을 파고 뿌리를 캐내 흙을 털어낸 뒤 비닐봉지에 담는다. 한 번 출장 때마다 채집하는 식물은 40종 정도. 행여 수목원까지 돌아오는 동안 죽지나 않을까, 이동 중에도 마르지않도록 흡습지에 넣거나 한여름엔 바람을 쐬주고 물도 보충해가며 애지중지 돌본다.

식사는 배낭에 챙겨간 주먹밥으로 산속에서 대충 때운다. 하산길에도 혹시 놓친 식물이 있을지 몰라 선뜻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아침 일찍 산에 오르면 해가 진 뒤 캄캄해져서야 내려올 때도 많다.

점봉산에서 산삼 발견하는 행운도

강원도 양양군의 점봉산은 최 박사가 12번 넘게 오르내린 산이다. 식물이 다양하고 보존상태가 좋은 데다 계절마다 꽃 색깔과 분위기가 달라 수시로 연구원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곳이다. 현재 사단법인 ‘산삼학회’의 운영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92년 그곳에서 작업을 하던 도중 직접 산삼을 발견한 일도 있다.

“심메마니들이 산삼을 캘 때도 산삼의 생태를 알면 그만큼 발견하기가 쉽습니다. 산삼은 서향이나 건조한 땅을 싫어한다든지 하는 속성이 있거든요. 제가 발견한 산삼이요? 그 자리에 그냥 씹어먹었습니다(웃음).”

여름 산행은 정말 고되다. 산에 올랐다 하면 금세 온몸이 땀범벅으로 변한다. 굴삭기 작업이 흔치 않았던 80년대 광릉수목원 조성 작업 때에는 홍릉수목원에 있던 나무들을 뿌리째 캐어 이식하는 과정에서, 직접 흙덩어리 나무뿌리를 옮기다 놓쳐 발톱이 빠진 일도 있다.

89년 점봉산에서 치른 고생은 아직도 생생하다. 국내에 변변한 등산화나 등산장비도 없던 때라, 신고 있던 신발 뒤축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내내 다리를 절면서 산을 돌아다녀야 했다.

“바위에서만 자라는 식물이 따로 있기 때문에 산에 있는 바위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식물 수집을 하다가 헛디뎌서 넘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산에 가면 별별 장애물을 다 만납니다. 조사 도중에 비를 만나기도 하고, 진드기 같은 것이 툭 떨어져 살을 파고 들기도 합니다. 저도 언젠가 출장에서 돌아온 지 1주일쯤 지났는데 자꾸 몸이 가려워서 긁다보니 산에서 붙어 온 진드기가 살을 파고들어가 있더라고요.”

현재 최 박사네 가족이 십여 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에 입주한 초창기엔, 매일 등산화를 신고 후줄근한 점퍼차림에 배낭을 메고 다니는 그를 보고 이웃사람들이 다들 막노동 인부로 착각하기도 했단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첫 수목원인 광릉수목원 조성에 함께 했던 기억은 지금도 그를 뿌듯하게 한다.

노심초사, 밤도 새워가며 애정을 쏟았던 국가사업이다. 도감에서만 보았던 바늘까치밥나무를 직접 발견했을 때의 묘한 흥분감도 그는 잊을 수가 없다. 당시 나무를 발견한 것이 아침 시각. 그때부터 하루종일 마음이 설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조원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오후 내내 자축했다.

계절적으로 대부분의 현장조사는 여름에 집중되는 편이다.

식물의 생장도 가장 활발하고, 수목 종류도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수확철인 가을에는 연구원들도 서서히 현장조사를 마무리하며 그간의 연구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는 것으로 한 해를 추수한다. 나무와 풀들이 잠자는 겨울에는 이듬해 계획을 세우며 연구원들의 일과도 상대적으로 잠잠해진다.

봄에는 새해를 맞는 조경 사업이나 외부 자문까지 보태어진다. 연구원들이 참석해야 할 학회만도 1년에 10회 이상이다. 이외에도 최 박사는 청와대와 국무총리 공관 등 국내 주요 기관들의 ‘수목 주치의’로도 10년 넘게 활동 중이다.

그의 일상을 알아보기 위해 나눈 대화 일부를 옮겨본다.

“휴일은 제대로 지켜지는 편인가요?”

“휴일에 쉬도록 돼 있지만 예전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사실상 거의 못 쉬었는데, 요즘은 주 5일제 덕분에 꼬박꼬박 쉬고 있습니다.”

“휴일에는 주로 뭘 하시는데요?”

“아내랑 등산 갑니다. 카메라 들고.”

“카메라로 뭘 찍으시려고요?”

“어차피 가는 김에 자료 사진 찍으려고요.”

“그럼 또 일하러 가신 거쟎아요?”

“전에 누가 묻길래 그런 대답을 한 적이 있어요, 다시 태어나도 저는 이 일을 다시 하고 싶다고요.”

“한 번이면 충분할 텐데, 또 왜요?”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자기 만족·사회 기여로 의미있는 직업

홍릉수목원 연구원은 공무원 규정에 따른 대우를 받는다. 비슷한 경력의 일반기업 샐러리맨들에 비하면 연봉 수준은 낮은 편이다. 학력은 최소한 석사 학위 이상이다.

실제 대부분 박사들로 구성된 고학력 직종임에도 불구하고, 10년차 연구원의 연봉이 3,500만원 남짓이다. 경제적인 보상보다는 전문성에서의 자기 만족과 사회 기여의 의미가 깊은, 꽃보다 아름다운 직업이다.

“식물을 보면 볼수록 놀랍다는 생각을 합니다. 식물이 살아가는 방식은 인간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신비하거든요. 담쟁이는 원래 한 번에 잎이 하나씩 나오는 식물인데 그늘 쪽에 가면 이파리가 한 번에 서너 개씩 나옵니다.

햇빛량이 모자라니까 제 스스로 광합성을 할 면적을 늘리는 거죠. 어떤 나무는 한여름 뙤약볕에 제 종아리가 탈까봐 스스로 (밑둥치 쪽으로) 자신의 가지를 늘어뜨리는 나무도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지만 여기에서는 알게 되는 것들이지요.”

대인 스트레스가 적고, 동료와 선후배 간에 서로 융화가 잘된다는 것도 장점이다. “식물 좋아하는 사람치고 모난 사람이 없다”고 최 박사는 말한다. 수목원 연구원 직의 또 다른 장점은 정년 퇴임 후에도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살려 활동할 수 있는 길이 많다는 것이다. 전공분야 관련업계 취업, 수목원 관리, 조경원과 같은 농장의 관리인으로서 노장의 경륜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

참고로 일반인들이 주의해야 할 사항 한 가지. 식물원 직원이나 개인 등이 임의로 야생 식물을 채취하는 것은 불법이다. 자연의 식물 채집은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전문가들에게만 허락된 일이다. 홍릉수목원은 매주 일요일마다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 국립 산림과학원 연구원이 되려면

전공별로 결원이 생길 때만 특채가 실시된다. 나이 40세 이내, 최소 석사학위 소지자 이상이라야 지원이 가능하다. 부서의 성격에 따라 산림자원학과나 농생물과, 농경제학과, 화학과, 조경학과 등 산림과 관련된 전공출신자들만 해당된다. 각 전공별 채용 인원은 적은 편이나, 거의 매년 채용공고가 난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글, 사진 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