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대 종손 이방수(李芳洙) 씨家學 전통계승과 保宗에 노력… 영남 불천위 종손과 교류도 활발대산이 건립한 사당 '대산강당'과 정자 등 유적 복원 위해 동분서주

종손 이방수 씨
경북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望湖里)에는 한산 이씨 일족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대개 지역과 씨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이들 씨족은 본관이 한산임에도 영남 지방에서는 ‘소호리(蘇湖里) 이씨’라고 부를 정도로 오히려 안동에 익숙하다.

행정명이 망호리(望湖里) 임에도 소호리가 입에 익었다.

한산 이씨가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은 광해군 때의 일이라 한다. 서애 류성룡의 사위인 이문영(李文英)은 목은 이색의 맏아들 후손으로 찰방 벼슬을 하다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가 외숙인 수암(修巖) 류진(柳袗, 서애 류성룡의 셋째아들)을 사사했는데, 광해군 때 대북(大北) 정권의 전횡에 염증을 느껴 회인현감 직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옮겼다.

수은의 아들 효제(孝濟)는 운천(雲川) 김용(金涌, 학봉 김성일의 조카)의 손서요, 증손자인 태화(泰和)는 밀암 이재(갈암 이현일의 셋째아들)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아들인 대산 이상정과 소산 이광정 형제는 문명(文名)이 높았다. 특히 대산 이상정은 퇴계 이황을 시작으로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의 적전(嫡傳)을 계승한 대학자로 이름났다. 대산을 지칭할 때 ‘소퇴계(小退溪)’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퇴계의 학문을 깊이 연구함은 물론 정주학(程朱學)의 계통을 이어받아 선생과 흡사한 경지에 도달한 이라고 유림 사회서 인정한 것이다. 이는 영남 지방에서 가장 영예로운 지칭이다.

대산을 알기 위해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선생이 남긴 저술이다. 일단 방대한 저술에 압도당한다. 선생의 일차 저작물이라 할 수 있는 문집이 27책 분량. 거개가 두세 책 정도 남긴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놀라운 성취다. 52권 27책에 모두 2,157판에 달하는 양이다.

대산종택

대산 선생은 소호리와 지금의 고산서원 일대를 무대로 거대한 학단(學團)을 꾸렸다. ‘예학(禮學) 연구단지’인 셈이다.

대산 선생의 지도와 중간 교수 요원들이라 할 수 있는 ‘호문삼로(湖門三老, 대산 문하의 대표적 세 학자)’ 또는 ‘호문삼종(湖門三宗, 대산 문하의 마루 宗자가 들어가는 세 사람의 대표적 학자)’ 학자들이 학단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었다.

대산 선생이 남긴 편저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기휘편(理氣彙編)>, <제양록(制養錄)>,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 <약중편(約中編)>, <병명발휘(屛銘發揮)>,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가 그 대표적인데, 모두 수준 높은 성리학의 연구물들이다. 그리고 대산 선생의 지도 하에 이들 문도들은 성리학 관련 저작물은 물론 예학과 관련된 연구물을 다수 발표했다. 철저하게 성리학과 예설(禮說)에 중심을 두고 있다.

대산 문하의 대표적 학자인 후산 이종수, 동암 류장원, 천사 김종덕, 입재 정종로의 저술과 삶을 살펴보면 스승과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제자들이 스승과 다른 점은 문과에 급제하지 않았다는 정도일 뿐이다. 이들은 모두 대산 문하에서 수십 년을 한결같게 진리 탐구와 예학 연구에 몰두했다.

대표적 저작물이 영남 예법의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변통고(常變通攷)>다. <상변통고>는 30권 16책이나 되는 방대한 저작물로 동암 류장원이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체제에 준해서 상례(常禮)와 변례(變禮)에 관한 제설(諸說)을 참조해 편찬했다.

서책 230여 종과 100여 명의 제가(諸家)의 인명이 인용되고 있다.

책의 말미엔 1830년에 쓴 이병원의 후서와 편저자의 종증손인 정재 류치명의 발문이 있다. 이병원은 대산 이상정의 손자다. 이들은 대부분 편저 또는 단편적인 글로 예설에 관해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상변통고>는 대산 문하 학자들의 공동 연구서며 그간 논의해온 예설의 중간 보고서로 판단된다.

현재 이 책의 일괄 번역작업이 진행 중이다. 전통 예법이 무너진 요즘, 번역 보급에 착수했다는 점에서 만시지탄이지만 그래도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필자는 대산 선생의 9대 종손 이방수(李芳洙, 1950년생) 씨를, 예학이라는 가학(家學)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이라고 오래 전부터 알았다. 처음 만날 때 깍듯하게 예를 표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여러 번 만나다 보면 한결같음을 체감하게 된다. 그래서 편안해진다. 예모(禮貌)가 있기 때문이다.

기라성 같은 학자들과 이들이 참조한 전문 서책들로 넘쳐났을 ‘예학 연구단지’의 현재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우리 집과 고산서원에는 서책들이며 고문서들로 넘쳐났었겠죠. 그런데 전란과 격동기를 맞아 대부분 이리저리 흩어지고 말았어요. 목판과 서책, 문서 등 약 4,000여 점은 항구 보존을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해두었습니다.”

대산 선생은 필법에도 일가를 이룬 이다. 병풍서를 썼으며 또 서화 감식력도 대단해 인연에 따라 이들 작품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글도 여러 편 남겼다.

필자가 애지중지하는 한 권의 책자가 있다. 1807년(순조7)판 청나라 달력인 시헌력(時憲曆) 이면지에 필사한 대산 선생 급문록(제자 명단) 초안(나중에 3책 목판본으로 간행됨)이다.

이현정(李顯靖, 대산의 종제)을 필두로 이종수(后山), 권병(約齋), 류장원(東巖), 김종덕(川沙)에 이어 서창재(徐昌載, 梧山) 등 많은 인물들이 올라 있다. 서창재 휘자 하단에는 대산 선생이 행장을 지어준 사실이 특기되어 있었고, 말미에는 ‘순흥(順興) 사천인(沙川人)’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가 필자의 종선조이기 때문에 더욱 대산 선생이 가깝게 느껴진다.

종손은 잠시 종가를 떠나 현재 대구에 우거하고 있다. 항상 헌신과 봉사를 생각하는 종손은 보종(保宗)을 위해 전통에 대한 학습과 대방가 후예들과의 세교(世交)가 보다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십여 년 전부터는 ‘보인회(輔仁會, 15인으로 구성된 영남 주요 종손 또는 차종손 모임)’라는 모임에 즐겨 참여하고 있다. 이것이 종손의 ‘실지(實地) 공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문의 전통 계승이다.

현재 종가 본채를 중수 공사하고 있으며 사당과 담장 공사가 이어질 계획이다. 말 끝에 종손은 대산강당(大山講堂, 대산이 27세 때 문중에서 건립한 서당, 69세에 중건)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선대의 정자들에 대한 복원을 희망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고산칠곡도후

그리고 대산 선생의 학문의 중심지요 후학들의 학문 연구 본산이었던 고산서원(高山書院)의 훼철된 문루 복원의 당위성도 인식하고 있다. 이 사업은 국가와 사회적 책무인지도 모른다. 고산서원은 대산에게 있어 중국 주자의 여산(廬山)과 무이(武夷)와도 같은 의미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 이상정 1711년(숙종37)-1781년(정조5)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시호는 문경(文敬)
程朱學 계통 이어받는 '소퇴계'… 유림의 宗匠으로 추앙받아

대산 이상정 선생은 안동의 한산 이씨들의 현조(顯祖)다. 이는 이중환의 택리지 발문에서 다산 정약용도 인정한 바 있다.

다산은 “그들은 풍속은 가문마다 각각 한 조상을 추대하여 한 터전을 점유하고서 일가들이 모여 살아 흩어지지 않는데, 이 때문에 조상의 업적을 공고하게 유지하여 기반이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라고 전제한 뒤 그 구체적인 예로서 퇴계 선생을 위시해 “한산 이씨는 대산 이상정을 추대하여 소호를 점유하였고(…)”라고 적시했다. 다산이 영남 전역에서 14개의 실례를 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대산과 소호리다.

당시의 정론은 대산의 학문이 ‘연원이 있고 실천적 학문 태도로 한 지역의 표준이 되었다(學有淵源 工踐實地 爲一方之表準)’라는 데 두어졌다.

이처럼 ‘실지’에 기반한 학문 태도와 사림들의 드높은 평판이 있었음에도 급제 이후 45년 동안 3품 직에 그쳤던 점은 불합리하다 하겠다. 실제로 선생이 관직에 있었던 기간은 6, 7년에 불과하다.

이는 바로 그가 영남 남인의 종장이었던 갈암 이현일의 외증손이라는 계통상의 배경 때문에 파당적 편견으로 불이익을 지속적으로 받았음을 의미한다. 순조로운 승진의 길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같은 시대적인 한계를 자각한 대산 자신이 향리로 물러나 퇴계 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학문에 침잠하고 후진 양성에 주력한 점도 관직 기간이 짧은 이유다. 벼슬에서 물러나기 위한 10차례의 사직소가 이러한 당시의 정황과 의지를 잘 설명해준다.

대산은 퇴계학의 정통을 계승한 대학자다. 그는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해 국왕의 눈에까지 들었다. 그런 영민한 학자에게도 아픔이 있었다. 6세에 모친상을 당한 것.

대산의 학문은 외조부인 밀암 이재의 문하에서 시작되고 성숙되었다. 당시 밀암은 고향을 떠나 안동 임하면 금소리 지역에서 초당(草堂)을 짓고 학도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19세 무렵에 대산은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의 아들인 구사당(九思堂) 김락행(金樂行)과 <근사록>을 읽었고, 안동 청성산으로 가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의 후손으로 당시를 대표한 학자인 포헌(逋軒) 권덕수(權德秀)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밀암으로부터의 학문 수수(授受)는 20세 때 밀암의 상으로 끝났다.

그가 얼마나 외조부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는지는 ‘외조부의 가르침을 적은 글의 발문(外訓跋)’에서 여실히 드러나 있다. “내가 열네댓 살 때 외조부이신 밀암 선생께서 금수(錦水, 현재의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서 수업을 하고 계셨다.

선생은 나를 불초하다고 나무라지 않고 순순하게 고인의 학문 방향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하루는 내가 조용히 가르침을 청했더니 손수 ‘수양하고 공부할 요점’을 글씨로 써서 평생 외우도록 하셨다”고 적었다.

대산은 이를 잊고 있다가 24년이 지난 38세 때 이를 꺼내서 배접을 한 뒤 책자로 만들고 발문을 쓴 일이 있다. “우연히 이 글씨를 옛날 넣어둔 책 상자에서 꺼내보니 아직 먹 색깔이 예전처럼 여전하였고 그 모습이 어제 본 듯하였다.

가만히 손가락을 꼽아보니 벌써 24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무런 학문의 진보도 없어 저승에 계시는 외조부를 위로할 바 없었다. 그저 죄송할 뿐이어서 몸 둘 바를 몰랐다”고 자책한 뒤 “항상 이 가르침을 자신을 살피는 도구로 쓸 것이다”고 마무리짓고 있다.

그는 벼슬살이를 내켜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정을 부름에도 머뭇거리다 조정으로부터 견책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문과에 급제한 뒤 7년 만에 정9품 직인 승문원 정자가 되는데, 그간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퇴계가 편찬한 주자서절요에 준해 퇴계 선생이 남긴 편지 가운데 요긴한 것을 추려 정리한 책)> 등 주요한 저작을 남겼다. 이미 이 시기를 전후로 해 그의 주된 관심은 벼슬이 아니라 산림처사로 학문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영조34년(1758, 48세)에 정6품 직인 사간원 정언 직에 제수하라는 특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그는 갈암 이현일의 외증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당파론자들에 의해 취소 처분을 당했다. 이를 계기로 더욱 벼슬길로 나아가는 마음을 접었다.

그의 학문 여정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계기는 57세 때(영조43) 고산정사(高山精舍)를 지은 것이다. 지금도 풍광이 빼어난 고산서원(高山書院) 앞쪽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서 있는 고산정사를 만날 수 있다.

그 앞으로는 붉은 석벽이 병풍처럼 처져있고, 그 사이로 ‘미천(眉川)’이란 시냇물이 흘러간다. 그는 이 풍광을 고산잡영(高山雜詠)으로 노래했는데, 이는 역시 퇴계 선생이 남긴 도산서원 주변의 풍광을 노래한 계산잡영(溪山雜詠)과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모두 흡사하다.

대산은 70세(정조4)에 이르러 정3품 당상관인 예조참의가 되었고 세상을 떠난 해인 3월에는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그해 6월 ‘9조소’를 올린 뒤 12월 9일 세상을 하직했다.

퇴계가 ‘무진6조소’를 올린 것과 내용 면에서 닮았고, 퇴계에 비해 대산이 1년 더 수를 했다. 두 분의 유묵(遺墨)을 보면 필법 면에서도 흡사하다고 느낄 것이다.

세상을 떠나면서 올린 9조소을 읽으면 대산의 평생 학문이 이 한 편의 글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간절한 글을 올려 읽히고자 했던 왕은 정조였다. 입지(立志), 이치를 밝히는 일(明理), 거경(居敬), 하늘을 본받기(體天), 간언을 받아들이기(納諫), 학교를 일으키기(興學), 사람 부리기(用人), 백성 사랑하기(愛民), 검소하기(尙儉) 9조소의 항목이다. 대산은 이 9개 항목이 모두 덕을 연마하고 본심을 기르는 요점이고 정치를 잘하는 근본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정조는 “좌우명으로 바꾸어놓고 보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정조는 이 한 편의 상소문을 접하고 대산의 식견을 통견하고 크게 등용할 의사를 가졌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이러한 국왕의 허여가 있었음에도 사후에 선생을 기념하는 의전마저 이전의 당파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정 신료들의 방해와 무관심으로 지지부진함을 면하지 못했다. 이는 선현에 대한 불경이며 모독이었다.

사후 35년이 흐른 순조16년에 이르러 이조참판 직에 증직되었고, 또 이후 67년 뒤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또 그 28년 뒤에야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호를 받은 해는 순조4년(1910)의 일로 조선 왕조가 그 종막을 고할 때였다. 극적이라면 극적이다.

대산에게 평생 낙인으로 남았던 외증조부인 갈암의 신원과 증직 역시 대산의 경우와 다르지 않을 정도로 기구하기 이를 데 없다. 당파로 인한 최대의 피해자들이었다.

그렇지만 두 분 모두 정치적 핍박과는 별개로 퇴계의 적전을 계승한 대학자로서 영남 지방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남았다.

대산 종손을 만나러 대구로 가서 생각하지 못했던 중요한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자료 소장자가 대산 문하의 대표적 제자였던 천사 김종덕 선생의 후손이어서 더욱 의미 있었다.

대산의 손자인 이병운(李秉運)과 이병원(李秉遠) 형제가 각각 쓴 친필 고산칠곡도(高山七曲圖) 발문이었다.

그 내용에 의하면 고산정사는 구재(苟齋) 김종경(金宗敬, 문과, 천사 김종덕의 아우)이 공사를 맡았는데,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의 종손자인 김양손(金養巽, 1788-1864)이 그림으로 그리고 이병원에게 글을 받고서 다시 자신에게 발문을 써달라고 온 사실이 적혀 있다. 고산칠곡도는 ‘유가의 보물’이다.

대산 선생은 퇴계처럼 주자를 매우 존경해 평생을 배우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주자가 거처했던 무이산 지역을 그림으로 그려 한 본을 족자로 만들어 벽에 걸고 항상 흠모해 마지않았다.

당시의 정황은 직접 쓴 ‘무이구곡도발(武夷九曲圖跋, 권45)’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고사를 본떠 급문 제자 후손들이 평소 대산 선생이 후진을 양성했던 고산정사 일대의 7곳 풍광을 그림으로 그려서 잊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대산 문집 영인본 앞부분에 흑백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대산이나 천사 양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이 세상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스럽다.

대산집을 보면 선생이 시에 주력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갖는다. 권1-3이 시인데 모두 350제이다. 이는 퇴계 선생이 2,000여 수의 시를 남긴 것과 비교하면 그리 많은 양은 이님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시의 특징은 시 자체가 사물을 운자를 맞추어 그저 노래하기만 한 것?아니라는 데 있다. 시를 수양의 한 부분으로 본 것이다. 학문의 즐거움이나 이욕(利慾)에 물들지 않으려는 다짐, 헛된 이름을 얻지 않으려는 노력이 시편 곳곳에서 드러나 있다.

선배정녕계근명(先輩丁寧戒近名)

공부전향실중생(工夫全向實中生)

선배들은 간절하게 이름을 즐겨 말라 가르쳤으니

공부는 오로지 실지에서 해야 하느니.

그의 시를 읽다 보면 간혹 철학서나 윤리 교과서를 보는 착각에 빠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집의 압권은 편지다. 편지 대부분이 일상 안부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문인들과의 학문 탐토(探討)의 주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권5-38까지 620여 편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러한 경향은 잡저 부분(33편)에서도 두드러지는데 대부분이 성리학의 이론에 대해 견해를 밝힌 것들이다. 그 외의 산문 가운데 서문이나 발문 비문, 묘갈이나 행장을 보더라도 대산이 ‘유림의 종장(宗匠)’이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다음호에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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