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대 종손 장성진(張晟鎭) 씨사업 실패·병마에도 보종 힘써… 유허비 제막 등 숙원사업 결실수년간 종가 단장에 전력… 안동 전통음식 명성도 높아

조선 중기 경북 안동 서후면 춘파(春坡)라는 곳에 퇴계 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대학자 한분이 살았다.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를 생각할 때마다 선비의 삶을 생각하곤 한다.

보통 ‘선비’라고하면 ‘가난하며 욕심이 없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선비가 대단한 집착을 보이는 대상이 있으니, 이는 다름 아닌 ‘학문과 수양’이다.

경당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극단적인 모습을 보인다. 즉 벼슬에 대한 욕심은 추호도 없었지만 학문에 대한 집착은 남들이 따를 수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경당은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에게 골고루 배웠다. 이를 통해 그는 퇴계 학통의 최고 사승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급문록에 등재된 제자만도 221명이나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대표적 제자라 할 수 있는 수암 류진(서애 류성룡의 아들), 학사 김응조, 석계 이시명(사위), 존재 이휘일(외손자) 등 기라성 같은 인물의 면면을 보아도 경당의 학문적 성취와 학자로서의 위상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아무리 과거 시험의 의외성이 있다 해도 생원이나 진사 그리고 문과에 응시해 합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벼슬에 대한 추호의 욕심도 없었기 때문에 실력을 갖추었으면서도 그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퇴계 문하에는 일종의 ‘강호가도(江湖歌道)’라는 흐름이 있었다. 자연과 벗하며 인간 본연의 문제를 풀기 위해 부단한 자기 수양으로 평생을 산 학자군이었다.

종택 전경

그 대표적인 이가 후조당 김부필, 송암 권호문과 매암 이숙량이다. 이들을 특별히 ‘퇴계 문하의 삼처사(三處士)’라 한다. 후조당과 송암, 매암은 문과에 응시했으면 급제가 어렵지 않았을 정도의 학문이나 문장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벼슬길을 굳게 거부한 채 학문과 자기 수양의 길에 정진했다.

이들보다 후배로 태어난 경당은 진작 학봉 김성일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선비의 길을 주목하고 실천했다. 경당은 선배들처럼 문과에 나아가지 않았음은 물론, 생원이나 진사까지 거부한 채 선비의 길에 일로매진했다.

경당은 부득이한 이유로 과거 시험에 응시한 적이 있었지만, 답안을 작성한 뒤 이름을 쓰지 않고 시험장을 나선 사실이 있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평생 이력은 유림의 인정을 받아 사후에 유림의 제사를 모실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이를 국가와 사회에 지대한 공이 있어 나라에서 내린 국불천위(國不遷位)와 구별해 유림불천위(儒林)不遷位)라 한다.

당당한 국불천위조차 사당도 없애고 제사조차 모시지 않은 사례가 비일비재한 현실에서, 지금까지 유림 불천위 제사를 정성을 다해 모시고 있는 경당 종가가 주목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를 이 집 가문의 휘장이기도 한 ‘경(敬)’이라고 보았다.

종손 장성진 씨

경당 선생은 학문과 수양에 참 욕심이 많은 분이란 느낌이다. ‘경(敬)’이란 글자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비롯해 퇴계 등 대학자들이 평생 공부의 방법으로 썼던 일종의 상징이다.

전고(典故)를 살펴보면, 이 글자를 사용해 자신의 호를 삼은 이로, 중국의 경우 조선 선조5년에 사신으로 온 중국인 한세능(韓世能)이 있고, 우리의 경우는 조선 후기 상촌 신흠이 초년에 사용한 바 있다. 상촌은 경당보다 2년 후배다.

필자는 ‘경’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주자가 지은 경재잠(敬齋箴)이라는 잠언(箴言)을 생각해보았다. 이 글은 너무나 유명하다. 퇴계 선생은 평생 이 말씀을 애독했고 실천했다. 지금도 당시 친필로 남아 있다.

그리고 후대의 많은 학자들도 이 잠언을 휘호해 자신의 경계로 삼거나 후학의 사표로 남겼다. 경재잠은 본래 주자(朱子)가 장경부(張敬夫)라는 선배 학자의 주일잠(主一箴)을 읽고 그가 빠뜨린 뜻을 엮어 지은 것으로, 주자 자신이 집 벽에다 써서 놓고 스스로 경계로 삼은 것이다.

“의관(衣冠)을 바로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며 차분히 하며 마치 상제(上帝)를 모시 듯 하라”로 시작하는 이 말씀을 퇴계는 자신의 역저(力著) 성학십도(聖學十圖)에도 올려 두고 있다.

이처럼 유가(儒家)의 주요 실천덕목의 하나인 경(敬)을 자신의 호로까지 택해 쓴 것은 경당의 학문적인 지향과 의지가 그만큼 강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경당 종가를 찾으면서 지난 일들이 불현듯 생각났다. 현 종손의 선친인 장석기(張碩基, 1910년 생) 씨를 뵌 적이 있는데, 풍채가 장대하고 말씀이 별로 없으셨던 분이었다. 몇 번 승안할 때마다 경당 선생의 문집과 일기에 대한 국역 문제를 걱정했다. 십수를 누릴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던 이 어른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버렸다.

그리고 종부 안동 권씨의 음식 솜씨다. 종부의 친정은 영양 청기의 산택재(山澤齋) 권태시(權泰時) 선생의 종가다. 종부는 종가에서 태어나 종가로 시집왔으니 평생을 종가에서 산 사람이다.

이는 숙명이다. 더욱이 종부는 부덕과 음식 솜씨까지 갖췄다. 그래서 종가 음식을 논할 때는 경당 종가 음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이 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요리서를 찬술한 정부인 안동 장씨의 친정이기 때문에 우리 음식 문화의 본류 중의 한 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종부의 칼국수 솜씨 일품

종부의 음식 중에 안동 칼국수를 수차 먹어본 일이 있다. 종부의 칼국수를 드시던 농암 선생의 종손인 고 용헌(庸軒) 이용구(李龍九) 선생님이 “이게 참말로 예전에 먹던 우리 안동 칼국술세.

초지장 같이 얇지 않은가”라는 말씀을 남기시기도 했다. 이처럼 집집마다 해먹었을 칼국수 중에 유독 경당 종부의 솜씨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음식을 만드는 기술 뿐 아니라 정성과 전통이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당의 11대 종손 장성진(張晟鎭, 1938년생) 씨를 처음 만난 지는 어언 이십년이 넘는다. 물론 당시는 종손이 아니었고 또 어느 때는 몹쓸 병이 들어 생명에 위협을 받았을 때도 있었다.

필자는 솔직히 근근히 계승되어온 경당 종가의 앞날을 걱정했다. 넉넉하지 않은 종가의 살림살이 때문에 병마를 이겨내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손은 주위의 우려를 말끔히 씻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시 종손을 만났을 때는 다른 사람인 듯 의욕적으로 문중과 종사를 이끌고 있었다.

제월대 암각서

그 첫 번째 사업이 선대로부터 경영하고자 했으나 결말을 보지 못했던 경당 선생 문집 국역이다. 그 다음이 경당 선생 유허비 건립이었는데, 이들 사업은 경당선생기념사업회가 중심이 되어 모두 결실을 맺었다.

지난 2007년 4월 15일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광풍정(光風亭)에서 거행된 유허비제막식에는 경향각처의 후손은 물론 내외귀빈 750여명이 운집한 성대한 모임이었다.

안동 장씨는 그 유래가 고려 태사로 소급되지만 안동 권씨와 김씨에 비해 현저하게 자손 수가 적다. 경당 후손들 역시 그러하다. 성인에 해당하는 관(冠)이 300집 정도인데, 경당의 사위 집(재령 이씨)에는 관이 1000여 호(戶)에 이른다 한다.

그래서 문중 일을 할 때면 ‘인부족(人不足) 재부족(財不足)’의 답답한 현실에 직면한다. 하지만 이번 대사에 의외로 1억 원이 넘는 모금이 이루어져 원만하게 일을 끝낼 수 있었다.

7순에 이른 종손의 삶을 엿보았다.

안동농고를 졸업한 뒤 단국대학 수학과에 진학해 3년을 마친 뒤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대구시청 공무원으로 사회의 첫발 을 내딛은 종손은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다.

선친의 환향(還鄕)하라는 명을 받들면서 9년에 공직생활을 접었고, 선친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문중 일에 보겠다는 생각으로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다.

첫째 어려움이 경제 문제였다. 예나 지금이나 농업 생산력은 신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농사에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인의 소개로 사업을 시작했다.

마침 정부에서 시작한 임하댐 건설과 발맞추어 사업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토목, 납품, 건설, 포장 등 닥치는 대로 일을 맡아 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나 본래 사업에 조예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또 사회도 너무 몰라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 유가의 옛 모습 살린 완벽한 조경

종손은 만날수록 남달라 보이는 분이다.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一新)’이라는 문자도 생각나게 했다. 이는 이전에 사업 실패와 병마로 고생하시던 모습이 떠올라서일 수 있다.

종손의 달라진 모습은 가학(家學)에서 얻은 힘과 내재한 유전인자가 이제야 드러나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례로 건강이 놀랍게 개선되었다는 것이다. 종손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수년 동안 종가 단장에 진력했다.

종손은 조경(造景)에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있다. 수억 원을 들여도 못할 종가 조경 일체를 종손의 아이디어와 땀과 부단한 인내로 완성했다. 무명 두루마기를 입은 종손 사진을 찍은 종가 후원은 일류 정원사의 솜씨로도 이루기 어려운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조경’이라 할 수 있다. 집 뒷산의 자연 노송과 어우러진 잔디며 괴석들 그리고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나무들은 ‘유가(儒家) 원림(園林)의 한 전형’이다.

이 집에는 안동시장을 비롯해 맛과 격을 아는 경향각처의 ‘귀객(貴客)’들이 품격 있는 안동 유가의 전통음식을 맛보기 위해 심심치 않게 찾고 있다.

근자에는 부산에서 전통음식을 연구하는 중년 부인 한분이 자신의 두 제자와 함께 경당 선생 불천위 제사에 참사해 일체의 제수를 장만하는 과정을 실습 하고 갔다 한다. 유래 있는 전통 의례와 음식에 대한 사회교육의 현장으로 경당 종가가 봉사하는 셈이다.

종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장의 사진을 흥미롭게 보았다. 과일을 층층으로 괸 것인데, 특히 땅콩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익숙히 본 솜씨지만 그 격이 월등하다.

땅콩은 이렇게 만들기가 더욱 어려워서 예전에 제수를 장만할 때면 가장 솜씨가 좋은 이가 온갖 정성을 다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구 솜씨인지 궁금했다.

“이거, 모두 제가 괸 것입니다. 대각선으로 설계해서 15도 각도를 유지하며 위로 올라갈수록 넓게 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글자를 새겨 넣으며 괴기도 하는데, 좀 더 어렵지요. 요즈음에는 기술도 정성도 없이 그저 시장에서 사서 쓰기도 하는데 걱정입니다. 저는 다른 문중에서 청하면 가서 일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이제 안동에서조차 이렇게 만질 사람이 많지 않아요.”

‘신기(神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큰상에 올라갈 제수를 만지는데 하루 이상이 걸린다니 거기에 기울였을 정성이 또 얼마였을까? ‘제사는 정성이다.’라는 옛말이 생각났다.

●장흥효 1564년(명종19)-1633년(인조11) 본관은 안동. 자는 행원(行原), 호는 경당(敬堂)
퇴계 학문 계승… 講學통해 50년간 후진 양성에 총력

경당 장흥효 선생은 생원이나 진사시험에 조차 합격하지 않은 그야말로 처사적(處士的)인 삶을 살았던 분이다. 그런데 경당은 단순히 처사 또는 선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뚜렷한 학문적 족적을 남겼다.

퇴계의 학문적 정통을 이는 이가 퇴계 이후 5백 년 동안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 석계 이시명,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 대산 이상정, 손재 남한조, 정재 류치명, 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지는 9인에 그칠 정도다. 그 가운데 경당이 있다.

경당의 경우 도학 계통 선상에서 그의 사위와 외손자가 들어 있다. 그리고 위로는 학봉 김성일을 통해 퇴계 선생에게 연결되어 있는 영남 주리론(主理論)의 수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다.

그의 학문은 어떤 것이었을까? 경당이 남긴 대표적인 학문적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일원소장도(一元消長圖)다. ‘129,600년간의 변화무궁한 자취를 드러낸 지극한 이론’이라는 이 글은 여헌 장현광과 목재 홍여하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입을 모아 누구나 이룰 수 없는 경지를 개척한 업적으로 높이 평가했다 한다.

이 이론은 그 자신이 평생을 한강 정구 선생 등 당대의 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만든 도첩(圖帖) 형태로 완성한 것으로, 그 바탕이 주역에 두어져 있다. 문집에 실려 있는 일원소장도를 보면 타원형에 빽빽하게 그려진 주역의 괘(卦)와 글씨들로 현기증이 생길 정도다.

필자는 조리 있게 이 업적을 설명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면 달리 그의 학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의 문집을 읽으면서 필자는 그가 20대 이후 50년간을 하루같이 학문에 열중했으며 특히 동료나 제자들과의 함께 모여 토론하는 강회(講會)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12세 때 학봉 문하에 올랐다. 경당의 학문 습득과정을 대별하면, 학봉을 ?아 퇴계에 거슬러 올랐고, 서애에게 나아가 바로잡았으며, 한강 정구에게 질의해 다듬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관한 것과 일상적인 문제에 있다고 본다. 그 중심적인 글자가 ‘경(敬)’이다.

그의 일기 중에 보면, “남을 예로써 대하였음에도 반응이 없으면 자기의 공경하는 태도가 성실했는지를 반성하라.”는 것이 보인다. 끊임없이 공경하는 태도를 지키려 한 공부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경당은 공경을 통해 진리의 길로 들어서고자 마음먹었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매우 큰 포부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끝내 사람답지 못하게 살다가 죽어서야 되겠는가?(生此宇宙間 終不可爲人而死耶)” 이러한 어록이 시사하는 바는, 그가 평생을 사람답게 살고자 노력했으며 후진 역시 그렇게 만들고자 애썼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벼슬을 뜬 구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의 학문 수양 과정에 주자대전이 주목된다. 그의 연보를 보면 38세에 주자대전을 끝까지 읽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주자대전은 1543년(중종38)에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이래 선조, 영조 등 수차에 걸친 속간이 이루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방대한 서책 간행은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루어졌으며 영조 대에는 주자대전을 호남에서, 그리고 주자어류(朱子語類)라는 책은 영남에서 각각 분담해 간행하게 했다는 점이다. 당시 경당이 완독했다는 주자대전은 간행된 지 20년 안팎의 최신 성리학 이론서였던 셈이다.

이를 38세 때 독파했다는 점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퇴계와 학봉 이후 영남 성리학 연구는 그 폭과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겠다. 경당의 후진들에게 대한 강학(講學)은 그의 정자인 광풍정(光風亭)과 봉림정사(鳳林精舍) 그리고 경광서당(鏡光書堂)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후일 경당은 학자로서의 성취와 후진을 양성한 공으로 지역 출신 선배인 백죽당 배상지와 용재 이종준과 함께 서원으로 승격한 경광서원에 배향되었다.

경당은 57세(1620) 때에 퇴계 선생이 배향된 안동의 여강서원(廬江書院)에다 학봉과 서애를 배향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다해 도학(道學)의 기틀을 정립함과 아울러 학은(學恩)에 보답했다.

퇴계를 모신 서원에 선현을 배향하는 일은 배우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의전이었다. 후일 여강서원에 대산 이상정 선생을 추향(追享)하는 문제로 영남 유림의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생겼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학봉과 서애 두 분으로 원만하게 정한 것이 간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경당의 생애를 보면서 그 이력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임진왜란 때의 처세 문제다. 임란이 발발했을 때 경당은 29세였고 경북 봉화 재산(才山) 지역으로 피난했고, 그 이듬해에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어서 스승인 학봉이 진주성 중에서 세상을 버린다. 의병진을 규합했던 학봉을 따라 나서지 못한 데는 양친의 병환 등의 절박한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애석한 일은 퇴계 문하의 대표적인 학자요 정치가였던 한강 정구 등이 유일(遺逸,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지방에 있는 유능한 인재)로 추천해 참봉 직을 내렸으나 은명(恩命)을 받기 전에 세상을 버렸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경당은 한평생 미관말직(微官末職)일망정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완전한 학자요 처사적인 삶을 완성할 수 있었다.

경당에게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安東 張氏)로 추앙되는 여성상(女性像)의 표상인 따님이 있었다. 당시 무남독녀였던 정부인은 부친의 명으로 재령 이씨 석계 이시명의 아내가 되어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은 뒤 말미를 얻어 친정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친정을 ㎸?부친의 재혼을 주선했고, 마침내 안동 권씨 부인을 모셔서 슬하에 3남 1녀를 두게 했다.

정부인 장씨는 친정과 시집 모두에 더할 수 없는 부덕(婦德)으로 두 집 모두를 반듯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후대에 길이 부덕(婦德)의 향기(香氣)를 선사한 인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정부인은 경당의 따님이기 이전에 또 한사람의 훌륭한 제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음은 은진 송씨(恩津 宋氏)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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