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종손 이형중(李衡重) 씨명문가 후예다운 고매한 인품… 평생 동안 봉사활동 적극 나서집안의 진귀한 고문서 등 국학진원에 기탁하기도

조선 후기 영남 출신 관인이요 학자인 대계 이주정 선생의 7대 종손 이형중(李衡重, 1939년생) 씨를 만났다.

“제가 종손이 아닙니다. 우리 집은 큰집이지 종가는 아니죠. 제가 팔회당 선조로부터 따지면 10대고, 대계 선조로부터는 7대 주손(冑孫)입니다.” 의아했으나 즉시 의사를 파악했다. 이것이 영남 안동의 예법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안동 지방은 불천위 종가가 아니면 아무리 여러 대를 내려왔다 해도 자신을 ‘종손’이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맏이로 내려왔다는 의미로 ‘큰집 주손’이라고 부른다.

불천위는 국가에서 인정한 국불천위와 지역 유림사회에서 추대한 유림불천위가 있다. 국불천위가 반드시 우위를 점하는 것만은 아니나 일반적으로는 국불천위가 우위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당파적인 시각으로 불천위가 안 되는 예도 있었다. 불천위 선정에 객관성이 결여된 셈이다. 그래서 지역 유림들이 불천위로 모신 대상이 국불천위 보다 존경을 받은 사례도 있다.

필자는 팔회당 이시항이나 대계 이주정은 유림불천위로 모신다 해도 부족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천위로 모셔지지 못했다. 그래서 는 종손이란 호칭에 강하게 손사래를 쳤던 것이다.

대계종택 종가

그럼에도 필자가 팔회당과 주인의 의사와 반해서 종가로 소개하는 것은 이 집이 고성 이씨 중에도 문한가(文翰家)로 손꼽혔다는 지명도와 현재의 일반 관례를 고려해서다. 안동의 고성 이씨는 입향 이래 귀래정과 임청각 그리고 탑동파 정도를 종가라고 불렀다.

안동을 대표하는 대표적 문한가(文翰家)인 고성 이씨 중에서도 저명한 집이 ‘팔회당(八悔堂)’이다. 안동의 고성 이씨는 크게 귀래정파와 임청각 종파(宗派)로 나누어지는데, 팔회당 집은 임청각에서 분파한 탑동파에 속하고, 파조인 이복원(李復元)의 5대손이 팔회당 이시항이며, 8대손이 대계 이주정이다.

영남 지방에서 팔회당 집을 왜 명문가로 꼽는지 생각해 보았다. 안동 임청각 지하의 족보를 살펴보면, 입향 이래로 조선시대에 안동 지방의 문과 급제자 총수는 366명인데, 그 가운데 고성 이씨가 9명이다.

임청각 이명의 셋째아들인 이반이 중종9년(1514)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 분의 숙부인 이굉(안동 歸來亭派) 역시 문과에 급제한 분이다. 임청각 종파에는 숙종10년(1684)에 청옹(淸翁) 이후영(李後榮)이 문과에 급제했으며 그 이후로는 배출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탑동파 지하인 팔회당 집에서는 팔회당 이시항이 경종 원년(1721)에 문과에 급제했고, 그의 증손자인 이주정이 정조19년(1795)에 잇달아 문과에 급제해 가문의 성예(聲譽)를 드높였다.

대계 이주정은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역임한 관인(官人)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선비의 절조를 잃지 않은 학자로 높이 평가를 받은 이다.

종손 는 온화한 성품에다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이형중 씨

안동에서 태어나 안동사범 병설중학교(5회)를 거쳐 안동사범(9회)을 졸업한 뒤 안동동부, 안동풍북, 안동송천초등학교 등지에서 6년간 교편을 잡았다. 종손은 향학열과 대처에 나가 보다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서 군을 마친 뒤 상경했고, 서울 관악컨트리클럽에 입사해 경리과장에 이른다.

한편 명지대학교에 진학해 1971년 만학으로 졸업하기도 했다.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던 중 새형님(안동지방에서는 자형을 이렇게 부름, 내앞 의성 김씨 큰 종가 종손의 계씨)의 제의로 1974년부터 인쇄사업(주식회사 동감 폼)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나 회사 설립 초창기의 호황은 이내 불황으로 이어져 종손이 사장으로 경영한 1980년부터 어려울 때가 더 많았다 한다.

필자는 종손을 만나면서 종손이 사업가의 수완을 갖춘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종손은 법이 없어도 살 정도로 선한 성품을 가졌고, 그래서 남에게 모진 표현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는다.

언행에 영남 선비 후예다운 기품이 묻어난다. 그렇기에 거의 사업을 통해 경제적인 덕을 보지 못했다는 말씀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손은 현재 서울 강남에서 본인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고, 또 2남 1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 성가시켰다.

그 원동력이 어디에서 왔을까? 필자는 조상의 음덕과 안주인의 부덕(婦德)에서 해답을 찾는다. 종부인 풍산 김씨(김경자, 1942년생, 오미동 출신) 씨 역시 안동사범학교 출신이다.

종부를 대하면서 한결같이 부드럽고 부군에 대한 다함없는 애정과 위하는 마음이 말과 행동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필자는 선대의 음덕과 안주인의 덕이 이 집의 복을 불러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손이 손수 편집했다는 ‘나의 애창곡(전7권)’이라는 노래책이 탁자에 놓여 있었다. 종손은 학창시절 아코디언, 피아노, 기타 연주에 솜씨가 탁월했다. 그래서 동학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았다.

졸업 후에까지 동문들을 대상으로 애창곡을 선정해 연주법을 가르치는 봉사도 즐겨 했다. 또한 종손은 운동에도 조예가 있어 안동시 배구 대표선수로 도민체전에 여러 해 동안 참가하기도 했다. 그림과 바둑에도 조예가 깊다.

종손은 남을 돕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젊은 시절은 JC운동에 헌신했고, 지금도 부인과 함께 영가라이언스클럽에서 라이언으로서 봉사 정신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종손은 타고난 독서인이다. 탁자 위에는 최인호 씨가 쓴 ‘유림(儒林)’이 놓여 있었다. 근자에 종손은 신문이나 TV에 소개된 신간을 메모해 두었다가 구입해 본다고 했다.

자신이 읽은 뒤에는 반드시 아들을 불러 일독을 권한 뒤 다시 그 책을 꼭 돌려받는다고 한다. 현명한 자식 훈육이며 깊이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피아노 위에 놓여 있는 앵무새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가서 보니 놀랍게도 맏손자(李源鎭, 1999년생)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린 그림이었다. 어린아이 솜씨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재능에 놀랐다.

그림에 조예가 있었다는 조부의 유전인자가 손자에게 내려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백했던 고성 이씨 팔회당 집의 전통도 이렇게 그 맥을 이어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근자에 종손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종가에 대대로 내려오던 수백 장의 목판, 고문서 202점, 고서 147종 390책 등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이는 이들 유물 유품들이 자신의 가문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될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이라는 인식을 가졌기에 가능한 결정이라고 본다. 불원간 간행될 국역 대계집 역시 종손이 계획해 실천하고 있는 주요한 조상 현양 사업 중의 하나다.

차종손인 이재경(李在京, 1970년생) 씨는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교에 유학해 석사학위와 아울러 회계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MBA 과정도 마친 차종손은 현재 삼성SDS과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맏며느리 최은주(崔銀珠) 씨 역시 함께 미국 유학을 마쳤고, 현재 국내 대기업의 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주정 1750년(영조26)-1818년(순조18)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한백(翰伯), 처음 이름은 종락(宗洛) 자는 경첨(景詹), 호는 대계(大溪)
채제공도 반한 인간미… 영남 주리론의 정맥 이어

대계가 3살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빈소에 나가 통곡함에, 보는 이들이 모두 애처로워했다 한다. 효성을 타고난 그는 계모인 김씨 부인을 정성껏 섬겼다. 자라서는 남병(南屛) 정박(鄭璞)에게 나아가 집지했는데, 그는 대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선생이었다.

대계는 1776년(영조52)에 대산 이상정에게 나아갔다. 부친의 권유 때문이었다. 대산의 문하에 나아감으로 인해 그가 영남 주리론(主理論)의 정맥(正脈)을 잇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사용하던 경서통

대산 문하의 ‘만득제자(晩得弟子)’로서 스승에게 직접 지도를 받은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문하의 고제들과 활발한 학문적 교유를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점은 큰 행운이었다.

그 이듬해 가을, 28세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나아가게 된다

. 이 무렵의 학문적 성취 정도를 가늠할 자료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정조의 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5권에 보면 경사(經史)를 강의하는 자리에 참여해 그 의문점에 대해 분명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는 점으로 보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대산 이상정 문하에 들어가

대계는 을묘년(정조19, 1795) 9월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등제(登第)했다. 봉미(封彌)를 열어 방방(放榜)하던 날에 임금이 채제공(蔡濟恭)에게, “이주정(李周禎)의 세덕(世德)이 어떤가?” 하였다. 이에 번암은,

“고 상신(故相臣) 이원(李原)의 후예(後裔)인데, 그의 증조 신(臣) 시항(時沆)이 무신년(戊申年)의 변란을 당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근왕(勤王)하였으므로 영묘(英廟)께서 가상(嘉尙)하게 여겨서 장차 크게 등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정조19년에 국왕과 정승 사이에서 이루어진 문답이 지금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 글은 대적할 사람이 적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글 보다 더 낫습니다.”

번암 채제공의 답변은 너무나 극적(劇的)이었다.

번암은 대계의 인간미에 보다 높은 점수를 주었다. 당시 조정은 학문이 없고 부패한 인사들이 당파에 치우치기도 했으며, 성균관 유생들의 풍조는 바르지 못해 심지어는 부랑(浮浪)하기까지 한 정도였다. 국왕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이에 그 대안으로 학문에 깊은 이와 선비정신을 지닌 신진 사류를 등용하고 싶었다. 이 때 영남 명문가 출신 인물인 대계가 뒤늦게나마 문과로 출신(出身)한 것이다.

30년 차이가 나는 대계와 번암과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인다. 이는 현재 종택에 보관되고 있는 대계 선생 벼루(花草硯, 芭蕉가 조각되어 있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 벼루는 표면에 번암의 아들인 채홍원이 선물로 준 것으로 명문(銘文)이 되어 있다. 정승의 아들이면서 남인 시파(時派)의 핵심 인물이기도 한 채홍원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물증인 셈이다.

문집

채홍원은 대계보다 3년 먼저 문과에 급제했는데 다산 정약용과 함께 정조가 매우 총애했던 인물이다.

채홍원이 주목되는 것은, 그가 정조의 왕명을 받들어 영남인물고(嶺南人物攷)라는 책을 편찬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영남 인물 450명의 사적을 뽑아 정리한 이 책은, 당초 17책 분량이던 것을 이토오 히로부미가 대출해간 7책이 분실되어 오늘에는 10권 10책 분량만 남아 있다.

시파는 이후 수구세력으로 평가되는 벽파에 의해 탄압을 받았고 천주교를 받아들인 세력으로 몰려 붕괴되고 말았다.

대계의 경우 천주교 유입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영남 남인으로 문과에 급제해 출신했고 번암 채제공의 후견과 그의 아들인 채홍원과의 교유를 한 정황으로 볼 때 남인 시파 지향의 정치적인 관점을 가졌다고 본다.

성균관에 유학할 당시 대계는 홀로 방에 앉아 가만히 책을 읽으며 한 번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에 취향이 다른 이들은 모두 그를 고지식하다고 비웃기까지 했다.

이러한 모습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해 사습(士習)이 무너진 상황에서 퇴계 선생이 성균관에 유학했을 때의 장면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 때 퇴계 선생의 진면목을 알아본 이가 후배인 하서 김인후였다면, 대계를 알아본 이는 번암 채제공이었던 셈이다. 번암은 새로 급제한 대계를 국왕에게 곧바로 이처럼 극적으로 소개했다.

임금은 인재를 얻은 사실에 기뻐 ‘십일과(十日課)’란 시험을 재차 보이고자 했으나 대계는 사은(謝恩)한 즉시 선조(先祖)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두는 대계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영남 남인 인사의 정권 핵심부로의 진입을 막으려는 이해 집단에서 장치한 작용 때문이었다.

옥에서 즉시 과제로 명받은 임금의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특별히 용서를 받고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스승인 남병 선생이 서울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표를 낸 뒤 호상(護喪)을 하고 돌아왔다.

상여꾼과 상사(喪事)에 드는 제반 비용을 손수 마련하는 등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영남 선비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이미 서울의 벼슬아치들에게는 특별한 일이었다. 이러한 참모습을 아는 번암 채제공은 “영남 풍속의 후중(厚重)함은 따를 수가 없구나.”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정조의 국상을 당해 가주서(假注書)로 입직하였는데 일을 잘 처리했다는 것으로 주상으로부터 특별히 내구마(內廐馬)와 후추 등을 상으로 받았다. 순조4년에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가 예조좌랑으로 전보되었고 이어서 결성현감으로 나갔다.

이 고을은 힘 있는 사람들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이름나 있었다. 대계는 명분과 의리로 강론하고 장중하고 위엄 있게 대해 치적을 이루었다.

순조13년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3년 뒤 다시 그 직을 맡았는데 이 때 수백언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 글을 읽어보면 그 내용이 스승인 대산 이상정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의 글이 성현의 학문에 유래했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른 데서 나왔기 때문이다.

순조16년(1816) 겨울, 개성 고을의 소윤(少尹, 經歷) 직을 맡았다. 칠순이 가까운 노령에 향리에서 은둔하며 학문에 뜻을 가진 그가 이 직을 맡은 것은 이곳에 있는 선대의 산소가 황폐해졌고 살던 향리에 아무런 표지가 없는 점을 평소 아쉽게 여겼기 때문이다.

부임 이후 선조인 행촌 이암의 위토를 무단으로 점유한 사실을 관에 알려 바로잡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대계는 애민정신에 입각해 성심껏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에 백성들은 “우리임이 어찌 이렇게도 늦게 오셨단 말인가? 대한(大寒)이 지난 뒤에 양춘(陽春)을 맞았구나!”라고 기뻐해 마지않았다.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만들어 기념하고자 했고, 거사대(去思臺)를 만들어 그 은공을 기린 것으로 당시의 치적(治績)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서울로 오가던 시절에 생겼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구룡암(九龍巖) 동유록(同遊錄)이라는 계첩과 구룡암유지비(九龍巖遺址碑)로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다.

구룡암은 정조19년(1795) 3월 영남의 선비 아홉 사람이 성균관에서 유학하다 귀향하는 길에 장호원읍 이황3리 문드래 고개에 있던 구룡암에 올라 청운의 꿈을 안고 장래를 맹약한 유서 깊은 자리다.

대과 3인, 소과 6인의 성취로 이어졌다. 그 뒤 도로 개설로 바위는 땅 속에 묻히고 1972년 그 자리를 짐작하여 비를 세웠다. 다시 24년 뒤 4차선 도로 확장공사로 1992년 8월 자리를 옮겨 세웠고, 1995년 후손들은 힘을 모아 연혁비를 건립했다.

그 아홉 사람들의 후손들이 안동과 영주, 예천 등지에서 명문가로 세거(世居)함과 아울러 오늘날까지도 그 선대의 정신을 계승해 2백 10년 이상 계를 유지하고 있다.

■ 시장상인들 사흘간 철시하며 죽음 애도

당시의 아홉 사람은, 이주정(고성, 문과)을 위시해 이귀성(진성, 사마시), 류회문(전주, 사마시), 정약수(금성, 문과), 권위(안동, 사마시), 전일흠(옥천, 사미시), 박시원(반남, 문과), 권보(안동, 사마시), 이가순(진성, 사마시)이다.

순조18년(1818) 우연히 병을 얻어 그 해 4월 22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고을 사람들이 통곡해 마지않았고 시장 상인들은 사흘 동안 철시하며 조상했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그 글은 대적할 사람이 적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글 보다 더 낫습니다.’는 평을 받았던 사람. 대계의 삶을 추적하면서 그런 인품을 닮고 싶었다.

다음은 은진 송씨(恩津 宋氏)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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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용 박약회 감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