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종손 배재진(裵在溱) 씨유서 깊은 400년 터전 수몰로 잃어­… 새 보금자리 가꿔 실향의 아픔 달래진귀한 유품 노린 도둑들 극성… 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

종손 배재진 씨
임연재(臨淵齋) 종가는 흥해 배씨 득관조(得貫祖)인 고려 말 훈신 배전(裵詮, 興海君)의 셋째아들인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의 종택이기도 하다. 백죽당으로부터는 21대 6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고가다. 백죽당은 그 호와 이름에서 시사하는 바, 올곧은 선비였다. 그는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뒤에 안동 지방으로 낙향했고, 증손 대에는 영주 풍기로, 현손 대에는 경북 봉화로 터전을 옮겼으며, 5대손 대에 이르러 다시 백죽당이 터전을 잡았던 안동 금계로 환향했다가 400년 터전인 안동시 예안면 도목(道木里)에 새 터를 잡아 정거했다.

도목리 신기(新基)는 임연재의 부친인 참판공 천석(天錫)과 임연재 그리고 임연재의 아들인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 삼대를 거치면서 비로소 탄탄하게 기반이 닦였다.

특히 임연재 종가가 있었던 도목(道木)은 임연재 금역당 두 분이 퇴계와 서애의 문하에 각각 들었고, 또 문과에 급제한 뒤 사환과 임란에 공을 세움으로 인해 흥해 배씨의 현조가 된 유서 깊은 400년 터전이었다.

그런데 국가 정책으로 인해 400년 문조강산(文藻江山, 人文으로 명성이 높았던 지역)이 하루아침에 ‘수국(水國)’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때 이향(離鄕)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실향민’이라 칭하며, ‘이북에 고향을 둔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갈 수 있지만 자신들은 그보다도 못하다’고 한탄해 마지않는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종택이 1973년 9월 13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안동시 송천동 1017번지로 터를 잡아 이전될 수 있었다는 정도다.

후손들은 종가 이전을 계기로 형편을 불계하고 성금을 모아 진입로를 개설하고 담을 축조함과 아울러 4천여 평의 토지도 구입했다. 당초 종가는 광복 후 혼란기에 도목의 종가를 비워둔 채 봉화 선재(先齋)로 우거 중에 있었다. 그래서 새 터전이 마련되자 1980년 3월 27일 현 위치로 환안(還安)했다.

이 집 이야기는 600년을 이어 인구에 흥미롭게 회자되고 있다. 백죽당은 지조 높은 선비면서도 덕망을 갖춘 교육자였다. 자제들을 교육함에 있어서 그 교과 과정이 엄중하면서도 대하는 태도는 너그러웠다.

어느 날 2, 3, 4째 아들을 죽림사(竹林寺)라는 절에 글공부하라고 보냈다. 얼마간 아무 기별이 없자 백죽당은 궁금한 나머지 절을 찾았다. 이 때 세 자제들은 여가를 보아 기생까지 불러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얼른 기생을 이불에 감싸 방구석에 밀쳐두고 부친을 맞았다. 이 때 백죽당은 아무 말씀을 하지 않고 잠시 앉았다가 시 한 수를 벽에 남기고 자리를 떴다.

‘일배일배부일배(一裵一裵復一裵)/삼배회처춘풍회(三裵會處春風廻)/명시죽림비단죽(名是竹林非但竹)/죽림심처도화개(竹林深處桃花開)’ 첫 구절은 세 아들을 마치 ‘한잔 먹고 또 한잔 먹세(一杯一杯復一杯)’에서 따온 느낌이다. 두 번째는 세 사람의 배씨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에 춘풍, 즉 술기운이 만연하다는 말이다.

선비들이 있는 곳이라면 ‘서권기(書卷氣)’ 즉 책들이 가득하며, 그래서 문자향(文字香)이 있어야 했다. 더구나 세 아들은 기생까지 불러들여 술판까지 벌이고 있었다.

매우 실망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셋째와 넷째 구절은 이 시의 압권이라 할만하다. 공부하고 있는 절 이름이 죽림사다.

종가 전경

대나무(竹)의 이미지는 곧다. 그래서 선비가 즐겨 이와 벗했다. 부친인 자신 역시 이 대나무에서 따 아호를 백죽당이라 했다.

마지막 구절의 ‘대나무 숲 깊은 곳에 복숭아꽃이 피었네(竹林深處桃花開)’는 갑작스럽게 수습해 방구석으로 밀쳐둔 기생을 풍자한 것이다. 이 일화를 보면서 교육이란 강함과 유함을 조화롭게 써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일 이 세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그래서 이로부터 안동 지방에서는 ‘배문남무(裵文南武, 배씨들은 문과, 남씨들은 무과가 많이 났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임연재 14대 종손 배재진(裵在溱, 1933년생) 씨는 봉화중, 영남고를 졸업한 뒤 영림서와 엽연초조합에서 직장생활을 한 뒤 1989년에 퇴직했다. 배재진 씨는 외동이었으나 백부의 뒤를 이어 종손이 되었다.

임연재 종가는 손세가 좋지 못하다. 임연재는, 퇴계 문하에서 함께 공부했고 또 유달리 처사적인 삶의 지향이 있었던 송암 권호문과 교분이 두터웠다.

지금도 송암 종가인 관물당(觀物堂)에 가면 ‘송암(松巖)에서의 수창(酬唱)’이라는 제목 아래 학봉 김성일, 대소헌 조종도, 유일재 김언기, 임연재 배삼익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시를 적은 현판을 볼 수 있다. 지금부터 450여 년 전인 1551년 7월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송암과 임연재 두 집은 모두 퇴계 문도 집 가운데서도 손세가 번성하지 않다. 종손은 경북 선산의 밀양 박씨 송당(松堂) 박영(朴英) 후손 가에 출입해 1남 1녀를 두었다. 차종손은 배찬일(裵贊鎰, 1970년생) 씨로 대구대를 졸업한 뒤 현재 한국감정원 직원으로 안동에서 근무하고 있다.

종가를 방문한 날은 마침 임연재 불천위 제사를 하루 앞둔 때였다.

집 안과 밖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사당 안은 제초작업을 막 끝낸 뒤라 풀냄새가 향기로웠다. 이 모든 작업을 차종손이 했다 한다.

임연재 종가는 많은 유물 유품들이 남아 있었다.

그 중에도 사신을 갔다가 중국 황제에게 받은 옥적(옥피리), 앵무배(술잔), 상아홀이 기적과 같이 보존되었다. 뿐만 아니라 상여, 사인교, 일산, 벼루, 등(燈), 거문고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거문고는 임연재의 아들인 금역당(琴易堂)이 즐겨 사용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집 역시 수차에 걸친 도난의 아픔을 겪었다. 그래서 근자에는 남은 유물 일체를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해 보관 중에 있다. 그럼에도 문간에는 자동경비시스템을 설치해 둘 정도로 도둑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

“저희 집에는 이제 아무 유품도 보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해둔 정보가 책자 등으로 유출되어 그것을 보고,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이 있겠지, 하고는 우리 집을 기웃거리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가정에서 쓰는 집기류까지 손을 대고 있어요. 말이 아닙니다.”

필자는 이 집 유품 중 ‘임연재(臨淵齋)’라고 세로로 쓴 퇴계 선생의 친필 족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글씨는 물론 선생이 제자에게 재호(齋號)를 써서 내린 것이다. 이 족자는 남아 있는 선생의 필적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래서 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기획된 서예특별전(예술의전당)에까지 초청을 받아 출품된 바도 있다.

많은 친필 가운데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1531-1598)에게 준 친필시가 눈길을 끌었다. 설월당은 퇴계 문하 가운데 이름 높은 이로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 중의 한 분이다. 술을 마시고 취해 설월당 김부륜이 서쪽으로 가는 것을 전송한 시다. “백발로 가을에 전별하노라니(白髮三秋別)/등불아래 십년 공부한 사이라네(靑燈十載情)/서로 부여잡고 한참을 술 취했거니(留連攀一醉)/비바람 치는 지금 밤 얼마나 깊었나?(風雨夜何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한 힘찬 필치와, 동문(同門) 지기(知己)를 떠나 보내기 싫은 작자의 마음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종가에서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마루에 꺼내준 큰 병풍 한 틀을 보았다. 반가(班家)에서 제병(祭屛)으로 쓰는 백병(白屛)이다. 제사를 지낼 때는 주로 글씨병풍을 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무런 글씨나 그림이 없는 흰 병풍을 쓰기도 한다. 이는 모두 조상을 받드는 경건함에서 나온 것이다.

● 배삼익 1534년(중종29)-1588년(선조21)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
탁월한 대 중국 외교가… 풍기 군수땐 사학운동 매진

임연재 친필 시고, 설월당 전송시

임연재는 어떤 인물일까? 필자는 그 해답으로, 신도비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신도비명은 일생을 정리한 글 가운데서도 높은 품격을 갖춘 아주 객관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나 신도비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망인(亡人)이 행직이나 증직이거나 간에 일정한 품계를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자격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본인이나 후손의 뜻과 성의가 있어야 한다. 퇴계 이황이나 청음 김상헌의 경우는 본인이 유명(遺命)으로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신도비문도 없다.

신도비문은 당대의 인품과 학식,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대제학과 같은 그에 걸맞은 벼슬을 지낸 이가 맞는 게 관례다.

신도비를 누가 지었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임연재의 신도비명을 읽었다. 임연재의 신도비명은 동문 후배인 서애 류성룡이 1596년(선조29)에 지었다.

당시 서애는 영의정이면서 풍원부원군이라는 신하로서의 최고의 지위에 있었다. 이 비문은 임연재의 아들인 금역당 배용길이 청했는데, 그는 서애의 제자라는 관계에 있었다.

서애는 이 글을 통해 그의 일생을 ‘아쉬움’의 관점에서 평했다.

서애는 임연재가 타고난 바탕에다 참된 학문을 했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경륜에 미치지 못한 성취와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린 것에 아쉬움 표했다. 서애는, “그는 내 벗이다.

평소 교분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에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으니 내가 신도비명을 짓지 않고 누가 짓겠는가?”라고 팔을 걷어붙였다. 8년 연장자인 임연재는 서애의 표현대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한성(漢城) 감시(監試)를 보았는데 그 해 가을에 임연재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두각을 나타내 동료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고금의 일을 논함에 막힘이 없었고 나는 그의 처소로 가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시험을 치던 전날 밤 나는 그의 처소에 가서 잠을 잤는데 거리에는 인적이 끊기고 달이 대낮같이 밝았으며 종루(鐘漏) 소리가 밤새 들렸다. 닭이 홰를 치자 그가 박차듯 나를 일으켜 나란히 말을 타고 시험장으로 들었다.

뜰 가운데 큰 홰나무 아래서 나무를 우러러보니 불빛 속에 녹색 나뭇잎 빛이 겹겹이 우거져 아름답게 빛났다.”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 다음 문장이 임연재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제시(題詩)가 나오자 그는 그다지 생각하지도 않고 날이 저물기 전에 두 편 모두를 완성하고도 왕성하게 힘이 남아 있었다.

나는, 시는 완성했으나 쓰지는 못하자 그가 내 대신 썼는데, 개봉(開封, 채점을 함)을 함에 나는 다행히 합격했지만 그는 뜻을 펴지 못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감에 내가 다시 술을 가지고 가서 전송하면서 요행과 불행이라는 말로 작별하였다(予復佩酒相送 作幸不幸語以別).”

이 때 서울에서 친 시험은 예비시험 성격이었다. 이는, 서애가 1564년에 사마시(생원, 진사 양과)를,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한데 비해, 임연재는 1558년에 생원이 되었고, 1564년에 문과에 급제했기 때문이다.

곧, 임연재는 서애보다 8년 연장으로, 서애가 초시에 합격했던 해에 문과에 급제했다. 임연재의 신도비명에서 솔직하게 소시 적 일화를 소개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임연재는 여러 벼슬을 거쳐 부친상을 난 뒤 누차 사양하다 외직인 풍기군수 직을 맡았다.

임연재에게 풍기는 소수서원이 있음으로 남다른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선대 군수였던 신재 주세붕과 퇴계 이황이 벌였던 사학운동(私學運動)의 맥을 잇고자 했다.

그 중심에 백운동서원 즉 소수서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임연재가 풍기군수로 재임한 것은 만 5년(60개월)간이었다. 이는 퍽 이례적인 것이었다. 조선왕조에는 지방 수령의 임기가 6기법(六期法)이라 해 60개월이었으나, 임기를 채우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었다.

경주부윤(慶州府尹, 종2품직)을 역임한 295명 가운데 60개월 임기를 채운 이는 단 2명에 불과하다는 연구도 있다. 그리고 병을 빌미로 중앙직을 사양하다 외직인 양양부사직을 맡아 만 3년간 재임한다. 임연재는 42세부터 50세까지 만8년을 목민관으로 재직하는데, 이는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방 수령으로 나가 임기를 채우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방으로 나가 너무 오래 머물면 중앙 정치 무대에서 망각 되어 출세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럼에도 임연재를 이를 즐겁게 택했다.

필자는 임연재의 삶에 있어서의 하이라이트는 중국 사행이었다고 본다. 중국 진사사(陳謝使)의 정사(正使)로 차출된 것이다.

임연재의 사행은 전해의 사신들이 거듭된 임무수행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잘못에 따른 외교적 마찰을 무마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된 지 두어 달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지만, 그 직을 사임하고 명을 따랐다.

호조참판 직을 받아 1587년 6개월에 걸친 사행 길을 떠났다. 이 사행을 통해 임연재는 개국 이래의 중요 외교현안이었던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까지 바로잡아 오는 성과를 거둔다. 사신에게 명나라 황제는 선조에게 곤룡금의(袞龍錦衣)와 각종 비단을, 정사에게는 옥적(玉笛)과 앵무배(鸚鵡杯), 상아홀(象牙笏)을 하사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에 조정은 매우 기뻐하며 국왕은 친히 모화관(慕華館)까지 나와 “사신의 임무를 완수한 충성(忠誠)이 아니면 어찌 이를 얻으리오.”라 하며 사행을 맞아 치하한 뒤 내구마(內廐馬) 한 필을 상으로 내렸다. 한편 종계변무를 기해 광국공신(光國功臣)을 책봉했다

. 이 때 1등에 윤근수, 황정욱, 유홍 3인, 2등에 홍성민, 이후백, 윤두수, 한응인, 윤섬, 윤형, 홍순언(譯官) 7인, 3등에 김주, 이양원, 황림, 윤탁연, 정철, 이산해, 기대승, 류성룡, 최황 9인을 각각 봉했다.

여기에 임연재가 들지 못한 것은 의문이다. 임연재는 사행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데리고 간 하인이 중국에 바칠 보환(寶環)을 훔치는 일을 범했고, 이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 문제로 임연재는 도의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황해도 관찰사로 나아가 분골쇄신하던 2개월 만의 일이었다.

좋지 못했던 건강과 과중한 감사로서의 업무, 감당하기 어려웠을 도의적 책임에 따른 심적 압박 등으로 6개월 만에 겨우 사직을 허락받고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해주 청단역(靑丹驛)에서 55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사후 임연재는 생전의 직위를 모두 인정받지 못하는 삭직을 당했을 뿐 아니라 종계변무의 공신 반열에조차 들지 못했다. 이 점을 애석하게 여긴 윤근수(광국공신 1등)는 공신으로 녹훈하기를 청하는 계청(啓請)을 올렸으나 이 또한 묵살되었다.

후일 아들인 금역당의 신원소가 받아들여져 관작은 회복되었으나 공신에 드는 문제는, 당시의 자료가 집안에 남아 있지 않다는 실로 어이없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반듯한 삶을 살았던 임연재에게는 하등의 아쉬울 것이 없겠으나 후손과 후학들에 있어서는 크나큰 유감으로 남았다.

임연재가 사후 삭직과 공훈에 들지 않은 점이 일체 서애가 쓴 신도비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서애의 임연재에 대한 평가다. 그렇지만 후손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노서 윤선거가 스승인 청음 김상헌의 어록을 기술한 데서, “배삼익은 서애의 동접우(同接友)이다. 그를 장사지낼 때 서애가 그의 명문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용길(龍吉)이 류씨(柳氏)의 글을 쓰지 않고 이산해(李山海)에게 청함에 사람들이 모두 이 점에 대해 웃었다.”고 했다.

종가에서 보장하고 있는 조천별장(朝天別章) 건곤(乾坤) 두 첩(帖)이 있다.

이 시첩은 그가 명나라 사신을 갈 때 조정에 있던 선후배와 벗들이 직접 써준 축하 시문이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원본을 영인한 것을 통해 이 첩을 보면, 당시 임연재의 위상과 아울러 인품과 역량, 그리고 막중한 외교적 임무를 잘 살필 수 있다.

졸옹 홍성민(이조판서), 파곡 이성중(호조판서), 사양 심충겸(병조판서), 호봉 송언신(이조판서), 동원 김귀영(좌의정), 남악 윤승길(좌찬찬), 일휴당 금응협(익찬), 서간 이제민(좌참찬), 송당 황윤길(참판), 죽곡 이장영(부사), 매촌 이유(현감), 이정호(목사), 송암 권호문, 아계 이산해(영의정), 송당 유홍(좌의정), 신암 이준민, 송간 황응규(돈녕부사), 청암 권동보(군수), 서경 유근(좌찬성), 모당 홍이상(부제학), 준봉 고종후(현령), 노저 이양원(영의정), 간재 이덕홍(현감), 이교, 식암 황섬(대사헌) 등 여러 선현들의 필치도 아울러 감상할 수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발간된 한국문집총간에 임연재의 문집이 누락된 것은 또 다른 아쉬움이다. 6권 3책 목판본으로 정재 류치명의 서문이 붙어 있다. 1990년에는 문집 습유(拾遺)와 부록을 더해 영인본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다음은 의성 김씨(義城 金氏) 운천 김용(雲?金涌)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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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