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씨 1,300도의 정열로 유리에 혼을 담는다녹인 유리 입으로 불고 틀에다 붓고… 작품 만들기는 고난의 과정서른에 유리로 전공 바꾼 늦깍이… 영국왕립미술학교 졸업 신화

박성원 교수의 작품 '술 취한 잔'
유리 작가 박성원(43) 교수의 작업실은 내밀하다. 문 닫힌 작업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노라면 제 얼굴에 제 코를 박는다. 창문을 거울로 만들어놨다. 은근히 ‘관계자 외 기웃 금지’ 표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예종) 조형예술과 박 교수는 학교 안에서도 심하게 튀는 작가다.

작업실 안에 들어가면 더 입이 벌어진다. 간이 갤러리, 카페, 사무실, 회의실, 음악실이 한 방에 오밀조밀 꾸며져 있다. 한 켠 천장 아래로는 길고 구불구불한 막대형 유리 조형물이 집단으로 하강 중이다. 벽면으로는 양(羊) 머리 유리조각상 등 작가의 재미있는 수작(秀作)들이 줄을 맞춰 앉았다.

박 교수의 작품은 국내외를 통틀어 기발하고도 현대적인 감각과 색감으로 인기와 고가를 누리는 것들이다. 이미 학창시절부터 감상객들을 사로잡았던 그의 명쾌한 발상을 보라.

“대학원 졸업 전 때 ‘술 취한 잔’을 출품했어요. 잔 모양이 기우뚱기우뚱하죠. 사람들의 반응이 컸던 원리는 사실 아주 간단해요. 영국은 바람이 심했어요. 그래서, 바람이 불어서 잔이 휘었다고, ‘휜 잔’을 만들었을 뿐이예요. ”

그는 매일 죽치다시피 학교 내 작업실에 산다. 카페보다 더 카페같은 이런 교수실은 예종안에서도 거의 유일하다. 제자들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제 집처럼 찾아와 쉬거나 놀거나 토론을 나누다 가곤 한다.

작업은 유리가루를 녹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원재료는 규석이 전체의 70% 이상 함유된 유리가루 등이다. 이를 녹이자면 엄청난 열과 이에 따른 전기,가스비 등 적지 않은 연료비가 든다. 유리가루에 소다 등을 섞으면 녹는 온도를 좀 더 낮출 수 있다. 대신, 소다를 섞을수록 유리는 녹색을 띤다.

소다가 섞이면 섭씨 1,300도쯤에서 녹는다. 납을 섞으면 1,200도까지 녹는 온도를 낮출 수 있다. 원하는 색을 표현하자면 색이 든 유리가루를 이용하면 된다.

쇠 파이프를 사용해 뜨거운 유리를 뜬다. 녹은 유리를 입으로 불어 모양을 만들면 블로잉, 틀에다 부어 주물처럼 만들어 빚어내면 캐스팅 작업이 된다. 원하는 대로 작품 모양을 잡는다.

예를 들어 찻잔은 10분, 동물머리 모양 같은 것은 1시간, 대체로 최대 1시간 정도면 모양 만들기가 끝난다. 물론 숙달된 솜씨와 감각이 있을 경우다. 유리 작업은 최소한 2명 이상, 특히 파이프 작업 때는 기본 4명은 있어야 한다.

만들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 식힐 때다.

모양을 만든 뒤에도 유리의 온도가 몸체에 골고루 퍼지게 한 뒤에야 비로소 서냉을 시작할 수 있다. 모양 잡힌 유리를 섭씨 수백도의 가마에 넣고 서서히 식힌다. 식히는 데 걸리는 시간도 천차만별이다. 주먹만한 렌즈 하나만 해도 식히는데 최소 한달이 소요된다.

급히 식으면 유리가 스트레스를 받아 색이 바뀐다. 과거에는 톱밥 또는 겨에다 파묻어 자연적으로 열을 식히기도 했다. 소다를 섞은 유리는 섭씨 540도에서부터 식힌다. 크리스탈은 서냉점(서서히 식히는 온도)이 470도. 온도 단 1도를 떨어뜨리는 데 무려 6시간이 걸린다.

복잡한 입체 작품을 만들자면 과정도 곱절 피곤해진다. 간단한 소품이 아닌 복합적인 작업이 필요한 입체작품 경우 드로잉과 캐드 등 컴퓨터그래픽 작업까지 동원된다.

미리 작품의 각 부분 사이즈, 접합 각도 등을 치밀히 계산하고 맞춰본다. 드로잉, 합판 실험 등으로 의도하는 작품의 제작 가능 여부가 완전히 확인된 뒤에야 실제 유리작업에 들어간다. 처음부터 유리로 시도할 경우 실패 때 입게 되는 금전적 손해와 타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를 보면 통일신라 시대 전까지 유리가 발견되다가 한동안 맥이 끊긴 후, 조선말기에 다시 유리문화가 들어옵니다. 현대에 와서 국내 유리 예술계가 발전한 건 1960년대 말 컴퓨터가 등장해 온도 조절 시스템이 데이터화 되면서부터죠. ”

박 교수는 원래 다른 학과를 전공하다가 다들 취업에 나서는 26살에 갑자기 미술공부를 하겠다고 길을 바꿨다. ‘늙은 입시생’으로 미술학원 한 구석에 앉아 선 긋기 등 기초연습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8개월만에 장학금까지 받으며 국민대 금속공예과에 입학, 제 풀에 지쳐 그만둘 줄 알았던 부모님과 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을 졸라 잠시 미술학원에 다닌 적이 있어요. 그러다 나이 들어서 갑자기 다시 미술공부를 하겠다고 하자 허락을 하시긴 했지만 정말 ‘사고를 칠 줄’은 모르셨던 거죠(웃음). ”

박 교수의 변덕은 한번 더 일어난다. 1990년 일본의 여름학교에 갔다가 유리 작품을 본 뒤 그는 거의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유리라는 재료가 가진 특성과 색상, 독특한 내부적 공간감이 마음에 꽂혔다. 투명 공간 안의 또다른 내부 공간, 그리고 화려한 색감이 강렬했다. 당시 미 문화원에 가면 유리 작업은 공대 분야로 자료가 분류돼 있던 때였다.

“ ‘어, 이게 뭐지? 이거 진짜 재미있다!’ 그 생각뿐이었어요. ‘이것 봐라, 이 재료 웃기네’ 하는 것이 지금도 제가 유리 작업을 계속하게 만드는 이유예요. ”

4학년이 되던 해 유학을 결심했다. 일본어판 책에서 영국 왕립미술학교(Royal College of Art)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다. 세계적인 명문이었다. 무작정 금속 공예 시절 작품 사진 몇장을 챙겨 들고 영국으로 향했다. 당시만 해도 외국 유학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나이 서른에 금속에서 또 유리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하자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셨어요. 사실 저도 속으론 겁이 많이 났죠. 실제로 고생도 심했어요. 작품 소재도 다르고, 언어도, 환경도 다르니, 결국 부모님 몰래 도중에 대학(West Surrey College of Art and Design)에 편입해 학부과정부터 다시 밟았어요. ”

1994년, 동양의 ‘선(禪)’을 주제로 한 논문을 내고 졸업을 맞았다. 대학원으로 영국 왕립미술학교를 택했다. 콧대높기로 유명한 학교, 주변에서 다들 ‘쉽지 않을 것, 진학해도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며 겁을 줬다.

입학 신청 후인 어느 날 그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밀린 학비 독촉 편지인 줄 알고 열었더니 왕립미술학교 총장의 입학허가 겸 친필 축하 편지가 들어있었다.

입학 후가 더 문제였다. 흔치 않은 동양인 학생으로 뽑혀 주목을 받으며 들어섰지만, 막상 실전의 블로잉 작업에 투입됐을 때 솜씨가 서툰 그를 보자 교수며 학과 친구들이 공공연히 무시하기 시작했다.

“오기가 나서 다른 공방을 찾아가 무보수로 바닥 청소를 해 주며 블로잉 등을 배웠어요. 그렇게 1년쯤 하고 나자 동료들을 따라잡게 되더군요. 지금도 똑같은 생각이지만,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을 하면 남과의 경쟁은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래서 뭘? 저게 뭐 대단하단 말야?’하는 생각 같은 것들이죠. ”

그가 다닌 대학원 졸업전시회는 타 학교에서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찾아 올 만큼 유명하고 권위있는 행사다. 전시작품도 엄청나게 팔린다. 그 역시 작품을 출품하며 자존심때문에라도 일부러 외국인 친구들보다 더 높은 액수를 불렀다. 실제로 자신의 작품들이 팔리는 것을 보았다. 그간의 유학비 전액과 맞먹는 거액이었다. 1996년 그는 졸업장을 받았다.

한국에 예종이 설립된 지 약 1년 안팎인 1997년, 그에게 한국으로부터 연락이 날아들었다. 조형예술과를 설립하기 위한 기반 작업과 강의를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6개월만에 모든 기자재 준비와 설치 등 작업환경을 빈틈없이 완성, 국내 처음으로 예종을 통해 블로잉 시설을 도입하고 선보인 주인공이기도 하다.

작품엔 그의 인생관도 함께 따라다닌다. 2003년부터 그의 작품에 거울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형상이 아닌 인간의 ‘이미지’라는 존재에 온통 생각이 빠져 있었다.

최근에는 대상이 꽃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그의 작품에도 곳곳에 유리 꽃이 피고 번지기 시작했다. 만들기로치면 꽃만큼 까다롭고 골치 아픈 것이 없다.

“민들레 작품만 해도 그 많은 이파리들을 하나하나 붙여 한송이 전체를 완성하자면 미리 각 이파리마다 일일이 사이즈를 계산하고 접합부분을 맞춰보는 등 거의 공학에 가까운 일이 됩니다. 사전 모델링도 여러 번 거쳐서 정확히 일치한 뒤에야 본 작업에 들어가죠. ”

현재 서울의 한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대형 유리 크리스마스 트리는 박 교수의 힘들고도 흐뭇한 흔적 중 하나로 남아있다. 지난해에 만든 유리 12지신상도 포항의 한 개인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독특한 작품이다.

1996년 이태리의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유리 전시회>를 비롯해 그는 영국, 일본, 대만 등지에서 다수의 전시회를 가졌다. 가장 최근에 참여한 국내 전시회로는 <2007 KIAF-Korea 국제 아트페어>가 있다.

개인전으로는 1997년 영국에서 가진 에서부터 2005년 등이 있다. 지금도 그는 유리의 정체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해 보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다. 책임감이나 학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 본인의 재미에 못 견뎌 만들어내는 것들이다.

“워낙 구상과 준비, 제작 기간이 많이 들어 개인전은 자주 하기가 힘들어요. 비용도 많이 들고요. 이번 작품을 판 돈으로 다음 전시회 비용을 대는 식이라 맨날 마이너스 통장에서 못 벗어나요. ”

취재날, 박 교수는 깍듯이 ‘정장’을 갖춰 입고 나왔다. '평범한 흰 셔츠에 청바지' 차림인 본인 기준에서는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예복’ 수준이다.

동안(童顔)인 그는 평소 허름한 작업복 차림 때문에 초면의 방문객들로부터 잘해봐야 조교, 어떨 땐 학생으로도 곧잘 오해를 받는다. 그러니 혹시 그를 처음 찾게 될 일이 있거든 ‘아는 길도 꼭 물어’ 가시기를.

게다가 그는 특유의 분명한 성격 때문에 갤러리 세계에서는 ‘(성깔) 못 된 작가’로 소문나 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작업장 밖에선 친구같고, 작업 중엔 무섭디 무서운 스승’으로 통한다. 불같이 뜨겁기도, 차갑기도, 그러면서도 굳이 속을 감추지 않는 유리의 속성까지 그대로 닮아버렸다.

이 이야기를 독자가 접할 즈음이면 그의 새 작품들이 관람객들을 만나고 있을 것이다.

서울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향기전(Shall We Smell?)>에 그의 신작 5점이 나가 있다. 계단 모양 그대로 흘러내린 향수병 등 유리작가 박성원의 기발하고 모던한 발상을 녹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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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작가가 되려면

홍익대, 남서울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유리공예 관련 학과가 있는 학교의 전문교육을 받는다. 예종 미술원의 경우, 입학시 면접과 실기시험을 거친다. 실기는 평면 및 입체 미술 테스트 모두 치르게 되며, 수능 대신 자체 시험이 실시된다. 졸업 후 진로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있다. 작가로서의 입지, 수입 등이 개인 실력에 따라 좌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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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기자 pinpl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