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대 종손 최진돈(崔晉惇) 씨팔공산 장녀부락 '옻골' 지킴이… 14대 이어온 선비정신 면면히문중에서 지은 유물 전시관엔 방대하고 소박한 유물 가득

조선 영조 때의 학자 백불암 최흥원 선생은 호의 글자를 한 번만 보면 누구나 잊어버리지 않는다. ‘불(弗)’자 때문이다.

농(弄)으로 이 글자를 ‘달러 불’이라 한다. 그런데 그 앞에 일백 백자가 있으니 ‘영락없이 백 달러 할아버지’가 된다. 왜 자신의 호를 이렇게 지었을까? 호를 지을 당시에는 미국이란 나라조차 없었으니 당연히 백 달러 화폐도 없었다.

백불암의 호를 풀이하면 분위기는 이내 엄숙해진다. 송대(宋代)의 대 철학자 주자(朱子)의 어록에서 나온 말이다.

백불암은 환갑 년(영조41, 1765)에 새로 지은 호다. ‘백부지(百不知) 백불능(百弗能)’ ‘모든 것을 하나도 알지 못하고, 또 아무 것도 실천하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 조선 후기 학문과 그 실천에 누구보다 헌신했던 올곧은 학자의 정도를 넘은 겸사(謙辭)가 강하게 담겨 있다. 백불암의 82년 평생은, 공맹정주(孔孟程朱)를 본받아 인격도야에 일생을 바쳤기 때문에 ‘실천궁행(實踐躬行)’이라는 어구가 합당하다. 그는 선비의 전형(典型)을 우리에게 남겼다.

오랜 비가 그친 초가을의 쾌청한 어느 날 백불암 종가를 찾았다. 신설된 대구시 지하철 해안역(解顔驛)에서 3킬로미터를 들어가면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屯山洞)의 자연부락인 ‘옻골(漆溪)’이 나온다.

유물 전시관 내부 전시물

14대를 면면히 이어온 경주 최씨의 세거지인 옻골은 그 입구부터 속세와 떨어져 신선이 산다는 ‘동천(洞天)’을 연상하게 했다.

우선 도심의 번화가에서 몇 백m만 벗어나면서부터 시야에 드는 팔공산 내룡(來龍)이 시야를 상쾌하게 했고 이어서 마을 초입에 서원 옛터 주변의 계곡물과 낙락장송 군락들은 반가의 격조를 더해주는 경물들이다.

‘명미(明媚)한 풍광(風光)’ 가운데 압권은 역시 진산(鎭山) 주봉 위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듯 거대한 거북 바위인 ‘대암(臺巖)’이다. 마을에서는 이 바위를 ‘생구암(生龜巖)’이라 부른다 했다.

옻골 경주 최씨의 세계(世系)를 보았다. 상계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시조다.

그 뒤 여말 선초에 이르러 광정공(匡靖公) 단(鄲)을 1세로 모시는데, 이 분은 조선 개국공신이다. 3세가 대구 입향조며, 8세인 계(誡)는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방의 의병장으로 공을 세워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그 둘째아들 최동집(1586-1661)이라는 분이 호를 대암(臺巖)이라 했는데, 바로 옻골 입향조다. 이 분이 백불암의 5대조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를 지냈고, 절의를 지켜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추앙받았으며, 문집 4권 2책을 남겼다. ‘처사(處士)’의 전통은 백불암에게 이어졌다.

백불암은 본래 호를 수구암(數咎庵, 자신의 허물을 손꼽는 집이라는 의미)이라 했고, 뒤에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장(師長)으로 세칭 ‘칠계(漆溪) 선생(先生)’으로 기림을 받았다. 백불암 이후 종손의 선친에 이르기까지 8대는 학문 연원이나 아호가 없는 분이 없다.

그 면면을 보면, 백불암의 아들인 동계(東溪) 최주진(崔周鎭)이 대산 이상정의 문인이며, 증손자 지헌(止軒) 최효술(崔孝述)은 대산의 고제(高弟)인 입재 정종로의 외손이며 문인이다. 5대손 칠호(漆滸) 시교(時敎)는 일제 때 국채보상운동을 벌인 대구 지역 대표 중의 한 분이다. 칠허의 조카며 종손의 종증조부인 금전(琴田) 최종응(崔鍾應)은 우국지사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백불암 9대 종손인 최진돈(崔晉惇, 1947년생) 씨의 우아한 안내를 받으며 먼저 들어선 곳은 유물전시관이다.

종손 최진돈 씨

이 집은 한 차례도 외인들의 침범을 받은 적이 없이 오늘까지 세전 문헌들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종손의 서재로도 쓰고 있는 전시관 한쪽 방에 들어서면서 벽에 걸린 빛바랜 서예작품 한 점에 시선을 빼앗겼다. 격조를 갖춘 ‘영남 유필’이었다.

‘세불아용(世不我容) 지아자천(知我者天)’ ‘세상이 나를 용납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대상은 하늘이다’의 의미다. 달관해 도를 터득한 듯한 어구(語句)다. 글씨 끝에 작은 글씨로 ‘백헌(白軒)’이란 제자(題字)가 있었다.

“이 글씨가 우리 아배 글씨 씨더. 아배는 글씨도 잘 쓰셨어요. 아배는 이 글 내용 그대로 사셨지요.” 짧게 말씀을 마쳤지만 그 말씀 가운데 추모(追慕)의 정이 들어 있음을 느꼈다.

종손은 대구의 터줏대감이지만 안동의 반가(班家)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종손의 모친은 안동의 풍산읍 오미동 풍산 김씨 집에서 오셨고, 부인은 안동의 도산면 토계리 소지명으로 ‘양평’이라는 곳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다.

종손의 장인은 고 완민 이국원 씨인데, 국학자로 많은 후진과 학문적 업적을 남긴 고 연민 이가원 박사의 아우다.

영남 지방으로 답사 다니다 근자에 세운 비석을 살피다보면 ‘진성인 완민 이국원 지음, 초계인 백헌 최병찬(崔秉瓚, 1922-1996) 씀’이라고 표기된 경우를 종종 만나는데, 이처럼 두 분은 글과 글씨로 함께 이름났다. 사돈 간인 두 분은 영남에서 문필로 인정받은 최고의 반려(伴侶)였다.

인조 대에 건립된 종택 사랑채에는 ‘백불고택(百弗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옆 뒷산봉우리인 대암의 정기를 받고 있는 불천위 사당(1711년 건립)과 안채, 그리고 집 옆에 5대조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보본당(報本堂), 그 뒤로 별묘(別廟)가 풍수지리는 물론 주역(周易)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이 집을 찾는 주역 연구자들은 이 집 사랑채야 말로 주역의 건축 원리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라고 감탄해 마지않는다 한다. 문외한의 눈으로 얼른 살펴도 8각형의 기둥 따위는 특별한 경우다.

안마루로 올라 종손에게 백불암 선생의 사승관계를 물었다.

“저희가 보아도 선조께서는 뚜렷한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학 연원으로 보면 대암공께서 한강 정구 선생의 제자이니, 한강의 선생님이 퇴계 아닙니까? 그러니 자연 퇴계 선생의 연원을 이은 것이지요. 물론 가장 바탕이 된 것은 가학(家學)이었을 것이고, 그 다음은 부단한 자신과의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이 중요한 내용이다. “왜 그렇게 되었나 생각해보니, 한강 정구 선생 이후 저희 선조 초년까지 수 십 년간 이 대구 지방에는 뚜렷한 대학자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책을 통해 선현들을 사숙(私淑)하셨어요.

그러다 안동 출신의 대산 이상정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요. 40대 초반에 안동으로 가서 두 분의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선조께서 6년 연장입니다.

대산은 문과에 급제했고, 선조는 이미 25살 때 부친의 허락을 받아 문과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할 때지요.

선조는 대산과 학문을 토로하면서 방향이랄까 학문 요령 같은 것을 얻었을 것이고, 대산은 또 참 공부를 하는 방법을 깨우쳤을 것입니다. 두 분은 이 만남을 유지하면서 학문에 있어서 한 단계 뛰어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백불암이 과거를 그만두었던 25세 때에, 대산은 과거에 급제한다. 그렇지만 대산은 누구보다 학문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던 학자형 관료였다. 그는 잠깐 벼슬에 나아갔다가 쉽 없이 사퇴했다.

대산집을 보면 사직 상소가 지루할 정도로 이어진다. 이들 두 사람은 중년에 서로 출(出)과 처(處)에 있어 차이를 보였으나 도를 밝혀야겠다는 신념만은 동일했고, 마침내 교유를 계기로 학문의 평생 동반자가 되었다.

대산 이상정과는 당시의 이슈였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물론 소학과 대학 등 유가의 기본적인 경전을 깊이 천착해 들어갔다. 또한 대산의 아우인 소산 이광정 등 당시 지역을 대표하던 학자들과도 활발한 학문적 토론이 이어졌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 아들인 최주진(崔周鎭)을 대산 문하로 입문시키기도 한다.

유물전시관은 근자에 문중에서 자력으로 지은 건물인데, 규모나 시설 면에 있어서 타문중의 모범이 될 만하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 진열품을 둘러보면서 그 물품의 다양함과 방대함에 놀랐고, 아울러 모든 물품이 진품이라는 점, 그리고 종손이 손수 유물을 전시, 소개 했다는 점에서, 이 가문의 유래 있는 ‘실용 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의 현실은, 국공립이나 사립 박물관에 가보면, 전시물이 빈약하다거나 또는 진품은 거의 없고 그래픽이나 사진, 복사물로 대체한 경우가 허다하다.

천리 길을 달려온 관람객들은 이 점에 있어서 얼마간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지나칠 정도로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다 보니 생각지도 않게 정부든 문중의 예산이 들어가게 된다. 소위 전시 기획료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본질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유물이 얼마나 잘 보존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을 효과적으로 전시해 소기의 메시지를 관람객들에게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문중의 사설 전시관이 유수 대학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전문성이나 규모를 따라갈 수 없다.

그런데 그러한 곳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이 집 고유의 유물 유품을 종손의 설명을 통해 만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래서 육필로 정성껏 쓴 유물 설명서에서 신선함마저 느꼈다. 제사에 정성이 중요하듯 전시 안내에도 요체는 진품이요 정성이기 때문이다.

대구상고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낙향한 종손은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차종손 기척(基拓, 1988년생) 군은 대구계명대학교에서 중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 최흥원 1705년(숙종31)-1786년(정조10) 본관은 경주. 자는 태초(太初), 여호(汝浩), 호는 수구암(數咎菴), 백불암(百弗菴), 칠계(漆溪)
82년 평생을 올곧은 인격도야에 바친 실천형 지사

논어를 읽어보아도 잠시 동안 인(仁)을 행하기는 쉽지만 오래도록 그것을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다 했다. 그런데 평생을 올곧은 학자로서의 삶으로 일관한 이가 백불암 최흥원 선생이다.

젊은 시절 충분히 문과에 급제할 소양을 갖추었음에도 그 길을 포기하고 학문의 길로 매진한 백불암은 어떤 사회를 꿈꾸었을까? 필자는 이를 자기 수양을 통해 동민들에 대한 사랑, 지역에 대한 애정으로 승화했다고 보았다.

그 대표적인 장치가 지방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의 제정(制定)과 그 실천이라고 본다. 조선이라는 사회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사회 모순이 생겼어도 그를 전후해 500년 간을 지탱할 수 있었던 한 축은 ‘학문의 과 수양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 힘의 원천에는 선비들이 앞에서 이끌었고 백성들이 그 취지에 공감해 뒤따랐던 향약이라는 조선사회의 독특한 자치 규약이 있었다.

경자패

종손에게 들은 이야기 중, ‘구회당(九會堂)’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백불암은 효자로 정려까지 받은 분이다.

그는 효제당(孝悌堂)을 만들고 그 구체적인 실천 절목을 제정해 효도하고 공경하는 일을 실천했다. 보통 당내(堂內)를 말할 때 8촌까지 범위로 한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과는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있지만, 예전에도 9촌이 되면 소원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백불암은 ‘9촌으로 넘어가더라도 함께 모인다’는 의미로 ‘구회당’을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이 문중에서는 중요한 의결 사안을 이 집에 모여 결정한다고 알려주었다. 9촌 이상까지 서로 친밀하게 지내니 부모 형제 사촌 간에는 말해 무엇하랴?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옻골 마을이다.

‘부인동(夫仁洞, 현 대구시 公山 龍水洞 및 新武洞 일대) 동약(洞約)’은 그가 35세 때(영조15, 1739)에 제정한 마을 자치규약이다.

이 규약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여씨향약의 네 덕목인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정신을 따랐지만, 퇴계와 등 선현들의 절목과 그 시행착오를 잘 연구해 만들었고, 또 실제로 시행했으며 이후 100여 년간 유지되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당시 이는 ‘우수 사례’로 견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백불고택 현판

이 절목을 읽어보면 오늘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현재 우리나라는 지방자치단체별로 의회가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이 중심이 되어 ‘21세기 신 향약’을 제정해 실시한다면 사회 풍속 교화에 효과가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선생의 학문 자세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물품이 종가에 세전해 온다. 선생은 평생 머리맡에 ‘공경 경(敬) 자’를 나무에 새겨 걸어두고 경계해 마지않았다 한다. 이를 ‘(敬字牌)’라 한다. 그 글씨는 선생의 제자인 노우(魯宇) 정충필(鄭忠弼)이 썼다고 하는데, 지금 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선생의 제자가 기록한 언행록에 보면,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경에 힘써서 이 마음을 엄숙하고 정숙한 데 두고 이 이치를 이륜(彛倫,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즉 인륜)의 상도(常道)에서 열심히 찾았다.”라고 했다.

이처럼 선생의 학문 핵심은 ‘경(敬) 공부(工夫)’에 있었다. 후손이나 종손의 지구(知舊)들 간에는 풍편에 듣고 이 패를 복제해간 이들이 여러분이라 한다. 선생의 교화의 힘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음을 이 패를 보면서 느꼈다.

선생의 문집(18권 7책)을 보면 1권 부분에 시가 실려 있는데 60여수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 시를 읽어보면 대부분 심성 수양의 도구로 쓰인 듯하다. 두드러진 특징은 기교(技巧)가 적다는 점이다.

道不外乎日用間 진리는 일생생활에 벗어나 있지 않으니

古人所以學無難 옛사람들 이 때문에 배움에 어려움 없었지

事親處族如些誤 어버이 섬기고 친족 대함에 작은 잘못 있으면

聖賢地頭 言+巨 何攀 성현의 그 경지를 어찌 오를 수 있으랴.

족대부(族大夫)의 운자에 차운한 이 시는, 그의 시가 도와 이치를 논하는 도구로 쓰였음을 알게 해준다.

진리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가족 친지들과 불화하면서 남들과 잘 지내는 따위를 잘못된 현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전 사람들은 이러한 태도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공부 그 자체에 어려움이 없었다고 보았다. 그 다음 두 구절은 이를 부연 설명한 것이다.

백불암은 학문적으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과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1713-1782)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추앙되기도 했다. 대산은 퇴계 선생의 학문적 적전을 계승한 이로 ‘소퇴계(小退溪)’로 추앙 받는 이다.

백불암을 영남 주리론을 묵수(墨守)한 이로 단정 지으면 큰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의 묘지명을 순암 안정복(1712-1791)이 썼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불암은 성호 이익(1681-1763)이나 번암 채제공과 같은 근기 남인들과도 폭넓게 교류했다. 그가 44살 때(영조24) 유형원(1622-1673)의 저술인 반계수록(磻溪隧錄, 26권 13책, 잘못된 국가 법제를 전면 개혁할 것을 내용으로 한 저술)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47세 때는 아들 최주진이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길에 경기도 안산으로 가 성호 이익 선생을 찾아보게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자제들에게 반계수록을 정서하게 했다.

종손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 종가의 보본당 왼쪽 방에서 백불암이 반계수록을 교정했다 한다. 실학(實學)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는 평을 받는 유형원의 주요 저술인 반계수록을 백불암이 교정했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되는 일이다.

이 책은 영조의 명으로 경상감영에서 1770년 간행했는데, 그 교정 본부가 종택 내 보본당(報本堂)에 차려졌고 선생의 총괄책임 하에 문인(門人)들의 참여로 완성되었다고 정리될 수 있다.

백불암의 학문은 향약에서도 본 바와 같이 그 실천에 초점이 두어져 있었다. 그는 민생(民生)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가 56년 동안 쓴 일기에서 끊임없이 농사 문제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나, 선산(先山)이 있는 지역의 백성들이 부채(扇) 공출로 고통을 받?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평생 부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등은 그의 실천적 학문 태도와 연관해 주목할 부분이다.

다음 호에는 초계 정씨(草溪 鄭氏) 동계(桐溪) 정온(鄭蘊) 종가를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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