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대 종손 공덕성(孔德成) 박사유가의 전통 살아 숨쉬는 한국에 각별한 애정 느껴77대 2557년 역사 지닌 전통의 명가… 퇴계 종손과 특별한 인연국민당 정부에 의해 타이완으로 이주 … 대학교수로 명성 날려

공자 종가(孔府)는 퇴계 종가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현 퇴계 종손 이동은 옹의 조부인 이충호(李忠鎬)는 인편을 통해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는 공자 종가의 종손인 연성공(衍聖公)에게 편지 한통을 보낸다.

때는 공자 탄신 2천 4백 71년 경신년(1920) 2월 28일이었다. 목적은 경남 합천에 마련한 배산서당(培山書堂)에 봉안할 공자의 초상을 보내달라는 데 있었다. 이 편지는 퇴계 이황 선생과 동갑인 합천 이씨 청향당(淸香堂) 이원(李源)의 후손인 이병헌 형제 등 그 지역 유림들의 요청으로 작성된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절박했던 것은, 이때는 이미 공자의 76대 종손인 공영이가 세상을 떠났고 유복자로 공덕성이 막 세상에 태어난 때였다.

공자의 종손은 강보에 싸인 영아였기 때문에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공자 종손인 연성공 공덕성의 명의로 답장이 조치되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십오헌(李十吾軒) 선생 펴보십시오

곡부 연성공부 비서처가 인편에 부침

이 달 12일에 진암(眞菴, 李炳憲) 이군이 그의 아우와 함께 산을 넘고 물을 건너기를 마다 않고 저희 집(曲阜 孔府)에 찾아 오셨으며 아울러 보내주신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저는 초대원 공경석(孔慶錫)을 파견하여 그들을 모시고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이어서 해당 초대원을 통해서 보내오신 의견이, 오로지 구할 수 있는 성인의 초상을 요청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깊이 간직하고 깊이 간직하려는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저희 집이 대대로 지켜 받들고 있는 것은 대성전에 있는 앞을 바라보는 초상 소장본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유행하는 것은 오도자(吳道子)가 돌에 세긴 유교를 행하는 초상과, 후세에 그것을 본 따서 조각한 것입니다. 이를 제외하고는 별도의 유상(遺像)이 없습니다.

만약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주 어려워서 사진을 찍는 방법을 쓰더라도 집이 깊고 넓어서 손을 쓸 수 없습니다.

부득이 겨우 이 두 초상을 검토하여 이 군에게 주어서 가지고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독서를 하고 성교(聖敎)를 높이는 것은 그 중요함이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고 그 바탕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 있는 것으로, 그 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며, 모습에서 강구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선생께서는 달인(達人)이시니 반드시 이 말을 가볍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덕성(왼쪽) 박사와 필자

■ 77대 연성공 공덕성(孔德成) 머리 숙임(頓首)

필자는 2004년 10월 이후 몇 차례 공부(孔府)와 공묘(孔廟), 공림(孔林) 등 이른바 ‘삼공(三孔)’을 관광한 바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감회와 감상이 있다.

그 중에서도 유림들이 평생을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도 한 번도 이곳을 찾지 못하고 세상을 버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실제로 연일 지면을 메우고 있는 여행 상품을 살펴보아도 공자의 고향에 대한 관광 상품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수요가 없고 또 여행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산동성에 속한 노(魯)나라와 제(齊)나라 수도 지역인 공자의 고향은 그 지역이 매우 광활해 동선이 분산되어 3박 4일 일정으로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 계림이나 장가계, 소주와 항주의 풍광이나 상해의 번화함과 쾌적함, 수도인 북경의 상징성 등 모든 면에서 이 지역은 매력적이지 못하다.

또한 산동성 지역은 역사나 전통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과 조예가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곳이다. 그래서 대중적인 여행 코스로 각광 받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산동성 여행, 특히 공자의 고향인 곡부 관광의 기존 관념을 깬 사건이 2004년 가을에 생겼다.

사단법인 박약회(博約會, 회장 이용태)가 주도해 회원 556인이 참가한 ‘곡부치전(曲阜致奠, 2004년 10월 23일-28일)’ 행사가 그것이다. 박약회는 그 행사를 공부에 있는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大成殿)에서 한국 성균관 석전 의례에 준해 제사를 올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이견을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석전례를 거행하지 않는다는 것, 왜 우리가 그곳에 가서 석전 정일(定日)도 아닌데 우리 방식으로 의식을 거행해야 하는가? 하는 등의 문제 제기였다.

타이페이 공묘 석전의식

그러나 박약회 집행부에서는 중국 일본 대만, 월남 등 동남아 유교 문화권을 우리가 주도해 엮어 퇴속(頹俗)을 진작(振作)시키자는 취지로 먼저 공자의 고향인 곡부 대성전을 찾아 분향 헌작하자고 결정했다.

초헌관 이용태, 아헌관 김호면, 종헌관 남효근 세분의 헌관과 대축 집례 등 다섯 집사는 찬란하고 위의를 갖춘 전통 금관제복(金冠祭服)을 입었다.

그리고 제례에 참여한 여러 집사들은 모두 도포(道袍)와 심의(深衣)에다 유건(儒巾)을 착용했으며 참례자 역시 도포나 한복을 입었다.

성균관 석전 홀기에 의해 위의 있게 진행된 의례는 중국 측 인사들은 물론 내외 귀빈과 언론, 특히 중화권 언론 인사들에게 매우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 주요 언론사들에서도 ‘공자님 한국유교 절 받으십시오(조선일보)’ ‘한국 유림 中 공자묘 찾아 제사(동아일보)’ ‘한국 유림 中서 공자제례 재현(한국일보)’ ‘한국 제례 유교 본향을 가다(중앙일보)’ ‘공자의 고향에 심은 한국의 전통유교 예법(연합뉴스)’ ‘공자의 고향서 석전대제 재현(경향신문)’ 등 제목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행사는 대 성공이었고, 이를 계기로 박약회에서는 매년 곡부 공자 사당을 찾았을 뿐 아니라 이후 대규모의 관광단을 꾸려 대만과 일본, 월남 등지의 공자 사당 투어를 실시했다.

공교롭게도 중국 중앙정부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이듬해인 2005년부터 매년 9월 28일을 정일로 석전의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박약회가 부식(扶植)한 공이 없지 않다고 본다.

그렇지만 행사 성공에도 가슴 한구석에는 허전함이 남았다. 이는 공자의 고향, 공자의 종가를 찾았지만 정작 그 주인은 만나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우리나라 궁궐의 몇 배나 되는 공부와 공묘는 집 주인이 없음으로 해서 너무나 넓어보였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 성안에 고색창연한 전통 양식 건물로 남아 있는 호텔인 궐리빈사 정문에는 논어 첫 구절이 크게 게판 되어 길손을 맞고 있다.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공자 고향에 있는 호텔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씀이다.

‘먼 곳으로부터 친구가 나를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는가?’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정작 주인의 이런 즐거움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2004년 당시에 중국 산동성 부성장(副省長)과 여유(旅游, 觀光)국장, 곡부시의 시장 등 중국 공무원들의 주도면밀한 주선과 격려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주인의 환대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치전 행사를 마친 뒤 회원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공자 종손의 재종고모로 알려진 공영인(孔玲仁) 여사의 진정에서 우러나온 축하메시지로 큰 위안을 삼았다.

곡부 대성전 안에서 행사를 도우면서 공자 종손이 타의로 이곳을 떠난 슬픈 현실을 생각했다.

필자가 공자 77대 종손 공덕성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81년 1월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북 안동시의 안동문화회관 1층 회의실에서 지역 유림들과의 상견례 자리였다. 당시 필자의 글 선생이셨던 용헌(庸軒) 이용구(李龍九) 옹과 필담이 이루어졌다.

통역은 대만 문화(文化)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딴 고(故) 김주한(金周漢) 교수가 맡았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알 수는 없지만, 종이에 쓴 글을 전해 읽은 뒤 종손은 선생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읍을 하면서 매우 경의를 표한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종손은 매우 정중한 표현으로 유림들의 인사에 답했고, 시종 덕을 갖춘 군자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그 때 공덕성 박사는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 선생의 사당에 참배한 뒤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학문화 교화가 남아 있는 지역이라는 의미)’이라는 휘호와 자신의 퇴계 선생을 흠모하는 마음을 글로 남겼었다.

후일 이 휘호는 서원 입구에 아담한 돌에다 새겨져 지금까지 남아 있다. ‘추로지향’ 비는 공자 종손에 의한 퇴계 선생의 고향인 안동지역에 대한 추로지향이라는 추인(追認)인 셈이다.

근자에 그 끝에 적은 경신년(庚申年, 1980)이란 것을 보고 당시에 공자 종손이 회갑 년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쳤다. 아울러 60년 전인 경신년에 퇴계의 종손이 막 세상에 태어난 공자 종손인 공덕성 박사에게 인편을 통해 편지를 보냈고, 이에 대해 공덕성 명의로 답장을 쓴 역사가 겹쳐졌다.

2004년 가을, 박약회의 곡부 행사를 준비하면서 필자는 퍽 흥미로운 책자 한 권을 입수했다. 녹동서원(鹿洞書院)에서 소화6년(1931) 9월 5일에 발간한 곡부성묘위안사실기(曲阜聖廟慰安事實記)다. 1930년(경오년) 12월 31일에 찍은 사진에는 조선 유림 대표인 박연조(朴淵祚)와 안승구(安承龜) 두 사람 사이에는 11살 난 연성공 공덕성 박사가 서 있었다.

공자 탄신 2481년에 기구하게도 공자 사당은 병화(兵禍)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조선 유림들은 대표단을 파견해 곡부 대성전에서 위안 고유 예식을 거행했고, 예를 마친 직후에 기념촬영도 했다.

이 책에 기록된 피해 상황을 보면, 대성전에까지 포탄이 관통해 지붕이 파손되었고, 규문각(奎文閣)과 여러 대문 등 온전한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전국 유림이 곡부 대성전 위안 행사에 호응해 보내온 통문이 279통에다 연명한 선비들의 수가 총 8,425인이며 유림 대표자만도 508명이나 된 것으로 보아 전국 유림의 뜻을 모아 행한 일임을 알 수 있다. 80여 년 전 일제치하에 조선 유림들이 품었을 그 비분강개함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이 책에 실린 팔도 유림 대표의 명단을 살펴보다가 경상도 조에 도산서원(陶山書院) 대표에 이충호(李忠鎬), 분강유소(汾江儒所) 대표에 이용구(李龍九)가 올라 있었다. 이충호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이용구는 농암 이현보의 종손이다.

이용구 옹은 1930년 당시 연소한 공자 종손과 간접적인 접촉이 있었고, 세월이 흘러 회갑 년의 공자 종손을 고향인 안동에서 직접 상면한 셈이다. 고인이 된 이용구 옹께서 그러한 인연을 알고 계셨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마침내 필자는 공자의 종손을 거처하고 계신 손녀의 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필자가 만난 가장 유구한 역사를 지닌 종가는 회헌 안향과 포은 정몽주 종가다. 이 두 집은 모두 24대에 이르는 유구한 곳이다. 그런데 공자 종가는 77대에 2557년에 이르는 상상을 초월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공자의 종가가 있는 중국 산동성 곡부가 아닌 대만 대북시 외곽 아파트에서 공자 종손을 만난 것이다.

필자는 지난 2006년 봄에 박약회 회원과 함께 대만 대북시 공묘(孔廟)에서 치전 행사를 가진바 있다.

본래 그 장소에서 공자 종손을 회원 여러분과 함께 만날 것을 희망했었다. 그러나 공묘측에서는 종가에서 행사 참가와 회원 면담이 어렵다고 통보해왔다. 결국 종손 면담은 불발에 그쳤다. 그러나 이 백 명이 넘는 대규모 방문단에 의한 대북 공묘 치전행사는 정식 외교관계는 단절되었지만 오랜 친구관계인 양국 간의 우의를 다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행사로 상호 인식했다.

이에 당시 공묘의 집행비서였던 두미분(杜美芬, 현 대북 민정국 視察) 씨 등의 역할로 공묘와 대북시 공무원, 그리고 제향 시에 일무(佾舞, 공자를 제사할 때 추는 전통 춤사위)를 추는 학생들로 구성된 답방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되었다.

박약회 측에서는 이들을 안내해 안동 도산서원과 주요 지역 유적지 관광은 물론 일무 시연과 성균관에서 석전 관련 학술모임까지 가질 수 있게 조치했다.

이어서 지난 2007년 9월 27일-10월 2일까지 110명의 회원들이 대만 관광에 나서 9월 28일 대북시 공묘에서 거행된 공자탄신 석전 전례행사를 참관했다.

필자와 박약회 사무국장 이육원은 9월 29일 명륜당 강당에서 2일간 열린 ‘공묘동학회(孔廟同學會)’ 회의 도중에 몸을 빼서 대북시정부 민정국(民政局) 주선으로 공자 종손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았다. 종손은 현재 손녀 집에 머물러 계시며 본가 역시 그곳과 인접한 아파트라 했다.

손녀 집은 격조 있는 고급 아파트였다. 아파트 입구에는 연락을 받은 종손의 손자(孔垂長, 견습 봉사관)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내려와 있었다. 손자는 호남형의 헌헌 장부였다.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 현관으로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돈된 거실 중앙 의자에 종손은 까만 양복을 입은 채 신선같이 앉아계셨다.

27년 전에 만났던 종손의 얼굴 모습이 기억되지는 않았지만 돌아가신 글 선생님과의 관계가 생각나 가슴 찡했다. 사진으로 본 11살 때의 미소년의 모습과 88세의 고령인 현재의 모습을 사진과 현실에서 함께 만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복을 갖추어 입은 박약회 이육원 사무국장이 준비한 퇴계 차종손 이근필(李根必) 씨의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휘호 족자 한 폭을 펼치자 종손은 감사의 표시로 두 손을 모아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회갑 때 안동 문화회관에서 글 선생님께 표했던 경의를 다시 보았다. 종손은 논어 첫 구절인 ‘유붕이자원방래면 불역락호아’의 심정인 듯 했다.

종손은 당초 종가를 방문하려 했던 퇴계 선생 차종손 이근필 씨와 학봉 김성일 선생 차종손 김종길 씨는 물론 여러 박약회 회원들에 대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제가 다리 병이 있어 석전례에 참여하신 한국 박약회 회원들게 직접 인사드리지 못해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작년에도 대만의 공자묘를 찾아 왔었다는 소식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곳에 나가게 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저로 인해 불편을 끼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니 이를 널리 헤아려주시고, 여러분께서 저의 이러한 사정을 직접 잘 말씀드려주시기 바랍니다. 공자 묘우의 봉사관인 제가 집안에서 이렇게 여러분을 맞아 정말 죄송합니다.”

종손은 말씀 중에 여러 번에 걸쳐 ‘정말 매우 죄송합니다(眞抱歉, 쩐 빠오시엔)’라 했다. 여기서 ‘겸’이라는 글자는 본래 흉년이 들어 곡식이 잘 익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부끄럽고 어색하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글자다. 겸연쩍다는 말로 많이 쓰인다.

종손은 1920년 2월 23일 곡부 공부에서 공자의 77대 적손(嫡孫)으로 태어나 100일 만에 대총통 서세창(徐世昌)에 의해 세습 연성공(衍聖公)에 봉해졌다. 1935년 남경의 국민정부에 의해 연성공에서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으로 지위가 바뀌었고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1936년에는 청나라의 이름난 벼슬아치의 딸인 손기방(孫琪芳)과 결혼해 슬하에 2남 2녀를 둔다. 1949년 국민정부에 의해 대만으로 옮겨서 대북시에 가묘(家廟)를 건립하고 유학(儒學)을 창도했다.

■ 국립대만대학교서 예학 등 가르쳐

장개석 총통이 대만으로 옮겨올 때 공자 종손인 공덕성 박사를 특별히 모셔왔는데, 이는 그가 중국에서 역대 황제가 서로 전했던 옥새(玉璽)와도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종손은 대만에서 봉사관 외에도 9년간 고시원(考試院) 원장을 역임했고, 현재도 총통부 고문역을 맡고 있을 정도로 국가로부터 예우를 받고 있다.

종손은 저명한 학자이기도 하다.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정치학 석사를 마친 종손은 미국으로 가 연구를 지속했고, 우리나라의 성균관대학교와 영남대, 일본 레이타쿠대학(麗澤大, 東京), 대만대학교 등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종손은 학자로서 국립대만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는데, 예학(禮學)과 문자학(文字學) 등에 더욱 조예가 깊다. 종손이 남긴 예기석의(禮記釋義, 1951), 금문선독(金文選讀) 등은 공부하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는 책이다.

종손에게 필자가 쓴 종가기행(宗家紀行) 책을 펴 안향 선생의 종가 안자묘(安子廟) 비석 글씨를 보여드렸다. 예전에 자신이 직접 써서 전해주었던 사실에 기억이 새로워진 듯 다시 두 손을 모아 경의를 표했다.

필자는 이어서 자신이 예전에 대학생 시절 안동에서 종손을 만난 것과 그 때 필담을 했던 이의 제자라는 것, 그리고 그 일이 27년 전의 일이라는 사실을 통역을 통해 알렸다. 종손은 “그래요 그래요, 기억이 납니다.”라고 기뻐했다.

종손은 한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퇴계 선생은 정말 훌륭한 분이십니다. 한국 음식이 정말 맛있어요. 저는 한국의 이화여자대학이 여자대학으로서는 가장 명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종손은 한국의 최고 철학자를 존경하고 우리 음식의 맛을 알며, 우리의 대학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그리고 만났던 여러 학자 친구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씔纜“?공자의 사상에 대해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종손이 88세 고령인 점과 시간과 언어상의 제약으로 그만두었다.

■ 논어 구절 쓴 친필 휘호 3점 선물

종손을 만난 다음날 공묘 측에서는 미리 종손께서 보내준 친필 휘호 세 점을 사무국장에게 전해 주었다. 논어 구절을 붓글씨로 쓰고 성명과 낙관을 찍은 작품이었다. 필자는 그 세 점의 휘호를 보면서 종손이 한국의 벗에게 공자의 중심 사상인 ‘인(仁)’을 배우고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고 느꼈다.

“己所不欲을 勿施於人이니라.” “己欲立而立人하고 己欲達而達人이니라.” “夫子之道는 忠恕而已矣니라.”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을 먼저 세우고, 자신이 현달하고자 하면 먼저 남을 현달하게 해주어라.” “부자의 도는 충성과 용서일 뿐이다.” 고심해서 어구를 선택해 썼을 종손의 지향(指向)은 한 글자 ‘인(仁)’에 모아졌으니 이것이 바로 ‘공자의 도(道)’다.

아파트 베란다로 청명한 가을하늘이 드넓게 보였다. 그 하늘에 펄럭이는 대만의 국기인 청천백일기는 일품이다. 그 하늘 먼 곳에 있을 고향 곡부는 한 번 떠나온 뒤로 다시 가지 못하고 말았다. 생이별한 그리운 누이(孔德懋)도 그래서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

다산 정약용 종가 인터뷰를 하지 못해 부득이 공자 종가를 먼저 싣습니다.

이제부터는 이달 말로 마무리를 해야 하니 다음호 예고를 하지 않고 가겠습니다.

<저작권자 ⓒ 한국아이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서수용 박약회 감사 saenae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