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묘족과 토가족 타강 따라 옹기종기… 4000여년 삶의 흔적 간직

“산이 아름답고, 물이 아름답고, 노래가 아름답고, 사람이 아름답다.(山美, 水美, 歌美, 人更美)”

상시(湘西) 사람들은 늘 ‘봉황고성’의 네 가지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무려 4000여년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소수민족 묘족(苗族)과 토가족(土家族)이 살고 있다. 어제와 오늘을 아우르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후난(湖南)성의 서쪽 끝, ‘신비로운 상시(湘西)’. 그 곳에 가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옛 마을’이라 불리는 ‘봉황고성(鳳凰古城)’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초나라의 땅이요, 당나라 때는 웨이양(渭陽)현으로 불리다 청나라에 이르러 ‘봉황’이란 지명을 얻었다.

후난의 성도인 창사(長沙)에서 장자제(張家界)까지 5시간, 다시 장자제에서 서남쪽으로 2시간여를 달려야 봉황고성에 도착한다. 타강(沱江)이 흐른다. 타강을 따라 긴 성곽이 있고, 마을을 만들었다.

북문인 벽휘문((璧輝門)을 내려서면 푸른 듯 희뿌연 타강이다. 봉황의 젖줄이다.

성루 아래에선 짙은 청색의 묘족 전통 의상으로 단장한 총각 뱃사공이 손님을 기다리고, 주황색 지붕을 한 조각배는 줄지어 강물에 출렁인다.

저 앞에 홍교(虹橋)가 있고, 강 양쪽으로 세월의 풍상이 그대로 묻어 있는 수상 가옥인 조각루(弔脚樓)가 어깨를 맞대고 서있다. 강물 위로 학다리 모양의 긴 작대기들이 뻗어 올라 나무집을 받치고 있다. 지금은 강변 여인숙이나 카페로 바뀐 곳이다. 커다란 물레방아도 있다.

타강 뱃놀이를 끝내고, 동관문(東關門)을 끼고 돌면 홍교에 오른다. 명 나라 홍무 년간에 축조된 홍교는 청나라 강희 9년(1670년) 보수한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타강의 남북을 이어주는 홍교 위에는 전망대와 전시실, 상점 등이 있다. 왼쪽에 기봉사(奇峰寺)가 있고, 오른쪽의 조각루 사이에는 ‘봉황’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 황융위(黃永玉)의 화실 ‘탈취루(奪翠樓)’가 보인다.

4- 봉황고성 타강변의 조각루군
5- 봉황고성 승항문 앞 좌판
6- 봉황고성 동문
7- 봉황고성 토가족 노인

홍교의 건너편은 승항문(升恒門)으로 이어진다. 복잡하다. 한 패의 전통 수공예품과 과일을 파는 노점상이 이 곳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길게 성곽이다. 성곽을 따라 아래 위로 두 갈래 길이 나란하다. 멀리 벽휘문(璧輝門)이 보인다.

어린 딸과 함께 화관(花冠)을 만드는 여인, 성을 벽 삼아 좌판을 펼치고 수놓는 할머니. 아래 길가 노점상은 때늦은 점심을 먹는다. 고양이를 안고 있다. 묘족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주먹만한 돌덩어리 하나를 꼬질꼬질한 천 조각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고 하염없이 ‘살 자(者)’를 기다리는 남루한 행색의 아저씨가 있다. 긴 글을 앞에 놓고 머리를 조아린 걸인도 있다.

봉황성의 서문인 ‘부성문(阜城門)’으로 들어서면 작은 광장을 가득 메운 커다란 봉황 조형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광장을 따라 돌다 오른쪽으로 틀면 쭉 뻗은 옛 길이 나온다.

바닥은 돌이요, 좌우엔 전통 상점이 줄지어 있다. ‘석판가(石板街)’다. 묘족과 토가족의 특산품을 파는 거리다. 역사가 깊은지라 꽤 규모가 크고, 활력이 넘친다.

토가족의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관광객을 유인하는 노인, 크고 작은 술통을 진열해 놓은 양조장과 함께 근대화의 물결이 중국 대륙을 휘몰아치던 시절 ‘변성(邊城)’이란 현대소설로 필명을 떨친 문호(文豪) 선총원(沈從文)의 고택이 옛 정취를 더해 준다.

선총원은 중국의 근현대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학자이다. 원명은 선위에환(沈岳煥). 어머니가 묘족 혈통이다. 봉황고성의 중영가(中營街) 10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섯 살 때 사숙에서 글을 배웠고, 상시 지방의 대자연 속에서 많은 영감을 받으며 성장했다.

벽휘문을 지나면 ‘봉황’이 배출한 또 다른 인재로서 어릴 때부터 ‘호남신동(湖南神童)’이란 불린 정치가이자 교육자였던 중화민국 초대 내각 총리 슝시링(熊希齡)의 옛 집이 있다.

골목은 길로, 길은 다시 골목으로 이어진다. 그 곳에 어제와 오늘의 삶이 있다.



글 사진=이창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