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던 대제국, 제해권 상실서부터 패망이 시작됐다

홍승용 박사

해방과 내전,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숨 가쁘게 내달려온 대한민국 호는 근래 들어 동북아 세력 재편, 보호무역주의의 대두 등 미증유의 시련에 직면했다. 여기서 주저앉을 것인가,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얻을 것인가. 한국 해양정책의 석학인 는 동양과 서양, 고대와 중세 및 근현대를 넘나들며 `해양을 통한 부국과 강국의 조건과 성취'를 탐문한다. 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해양 정책전문가이자 해양 전략가로서 우리나라 해양수산정책의 수립과 집행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최장수 해양수산부 차관,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원장, 세계해양포럼 공동의장 등을 역임했다. 우리나라 중장기 해양 정책의 효시인 ‘해양한국 21’, 대한민국 태평양 심해저광구 유엔 등록, 남극세종과학기지 건설, 한중어업협정 체결, 여수세계해양엑스포 기획 등이 그의 대표적 활동이다. 는 고등교육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인하대 총장을 비롯해 덕성여대 및 중부대 총장을 역임했다. 또 국가교육과학기술위원회 부의장, 대학구조개혁위원회 위원장으로 대학교육 혁신에 기여했다. 홍 박사는 <주간한국>의 창간기획인 ‘홍승용의 해양책략’을 통해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주요 해양수산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한 테크노크라트의 역정과 2000년대 변혁기의 대학을 경영한 총장의 경륜을 바탕으로 이노베이션(Innovation)과 하모니 (Harmony)의 국가경영철학과 책략을 피력할 예정이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는 그리스를 넘어 유럽 심장부로 향하고 있다. 13세기 ‘동방견문록’을 쓴 이탈리아 베니스 상인 마르코 폴로가 지나갔던 육로와 해로를 시진핑 주석은 일대일로로 책정했다. 시진핑의 일대일로에 있어 이탈리아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다. 시진핑 주석은 2019년 3월 23일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와 회담을 갖고, G7국가와는 처음으로 일대일로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양해각서롤 통해 중국은 제노바 등 이탈리아 4개 항만에 투자하게 됐다는 점이다. 중국의 일대일로가 마침내 유럽의 지중해 관문인 이탈리아로 손을 뻗게 된 것이다. ‘모든 길은 로’라고 큰소리쳤던 팍스 나(Pax Romana)의 후예들이 21세기 팍스 시니카 (Pax Cinica)를 꿈꾸는 중국에게 문을 연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접경 지역에 있는 트리에스테는 중국 일대일로 사업의 집중 공략 지역인 중·동부 유럽과 지중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경기침체에 빠진 이탈리아로서는 중국의 투자가 반가웠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항구 개방은 과거 이탈리아가 국제사회의 비판을 이유로 밀라노의 라스칼라 오페라극장에 대한 사우디아라비아의 투자를 거부했던 자존심과 극명히 대비된다.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들이 바다로 진출하던 BC 8세기경 작은 도시로 출발한 는 수 세기에 걸친 전쟁과 개혁을 거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의 방향을 동방으로 향한 덕분에 를 비롯한 지중해 서쪽은 정복당하지 않았다. 를 통일로 이르게 한 가장 중요한 계기는 BC 367년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 제정이었다. 법은 집정관 가운데 한 자리를 평민에게 할애하고, 토지소유에 상한을 두게 했다. 이 법의 제정으로 내부적으로는 귀족과 평민의 융화가 이루어졌고, 밖으로는 느슨한 라틴동맹이 해체되고 를 중심으로 한 연합이 발족됐다. ‘다수 민족에 의한 한 국가 Out of Many, One People 전략’은 훗날 세계국가로 떠오른 영국과 미국에서 그대로 재연된다. 는 이 법에 의해 거듭나면서 BC270년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다.

통일의 마지막 장애물은 그리스 북서부에 위치한 에피루스국의 피로스 왕이었다. 그는 최고의 전략·전술가로 회자되었다. 카르타고와는 반대로 동지중해를 기반으로 서쪽을 정벌해 세계를 통일하려고 했다. 피로스는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에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고, 군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승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피로스 측의 손실 또한 너무 많았다. 이득이 없는 무의미한 승리를 이룬 경우, 다시 말해서 전술적 승리를 전략적 승리로 환원하지 못한 경우를 ‘피로스의 승리(Phyrric Victory)’라고 하는 연원이다. 반대되는 개념은 ‘파비우스의 승리(Fabius Victory)’라고 하는데,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거두거나 혹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을 뜻한다.

로마

파비우스는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붙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지구전을 통해 를 지킨 집정관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말한다. ‘피로스의 승리’는 ‘전투에서는 이기되 전쟁에서는 지는 것’이고, ‘파비우스의 승리’는 ‘전투에서는 지되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피로스는 마지막 원정에서 시칠리아의 카르타고를 무찌르고는 다시 와 겨루었으나 패퇴했다. 결국 그리스로 돌아갔다가 전사하고 만다. 피로스가 사라지자 지중해의 패권을 노리는 카르타고를 막을 세력은 뿐이었다. 가 세계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카르타고와 장장 118년 동안이나 붙었던 포에니전쟁(BC264-147년)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중해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지중해 해상권을 쥐는 국가는 세계를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실 에 의해 망하기 전까지 카르타고는 ‘바다사람들’로 불리던 페니키아인들이 망명하여 건국한 나라로서 해상무역에서 두각을 보였다. 그리스가 몰락한 후 지중해 세계에서는 카르타고가 최고의 경제대국이었다. 반면 포에니 전쟁 전까지의 는 카르타고와의 불평등 조약(BC 348년)에 따라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섬 서쪽, 즉 지중해 서쪽 전역과 통상이 금지돼 있었다. 오죽하면 “카르타고의 허가 없이 인은 바다에서 손도 씻을 수 없다”라고 할 만큼 카르타고의 경제력과 해상력은 압도적이었다. 카르타고의 상업 활동 무대는 지중해의 아프리카 해안은 물론 대서양 연안과 심지어 아일랜드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지중해의 한 지역에서 싸게 구입한 상품을 다른 지역 상인들에게 비싸게 파는 중개무역을 했다. 지중해 연안 곳곳에 상업기지와 식민지를 보유했었다.

라틴어로 ‘페니키아인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포에니전쟁에서 와 카르타고는 국운을 걸고 세 차례 사투를 벌였다. 대국 카르타고와 신흥 가 포에니전쟁에서 맞붙은 이유는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 발끝에 위치한 시칠리아 섬 때문이었다. 서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동지중해를 향하여 세력을 넓혀 갔으며, 지중해 중심부에 위치한 시칠리아는 과거 3세기 동안 구세력인 그리스와 신흥세력인 카르타고의 패권이 충돌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포에니 전쟁 직전까지 시칠리아 섬의 서측 반쪽은 카르타고가 차지했었고, 동측 반쪽은 그리스계 메시나와 사라쿠사가 지배하고 있었다. 반쪽을 차지했던 카르타고가 동쪽으로 섬 전체를 차지하려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시도는 뜻밖의 암초에 부딪쳤다. 우선 그리스 도시국가의 하나인 에피루스의 왕 피로스가 카르타고의 야심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 암초는 바로 였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시칠리아를 침공했을 때 그리스계 메시나는 에 원군을 요청했다. 전쟁준비가 안된 는 망설였다. 하지만 시칠리아가 넘어가면 이탈리아 반도도 위험해진다는 지정학적 판단에 따라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의 마지못한 ‘우연한 파병’이 무려 118년에 걸친 포에니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카르타고는 부유해지면서 망국의 길에 들어섰다. 카르타고의 최전성기에 나타난 명장 한니발은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그가 주도한 전쟁으로 본인도 카르타고도 파멸을 맞았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카르타고는 군대를 용병을 통해 유지했는데, 장기간의 전쟁을 거치면서 내분에 노출됐다. 그 와중에 가장 중요한 지중해의 해상권도 와해됐다.

포에니전쟁이 카르타고의 멸망으로 종결되었을 때, 는 지중해의 확고부동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지중해는 인에게 ‘우리의 바다’가 되었고, 도시 는 ‘세계의 수도’로 불리게 되었다. 카르타고로부터 해양 자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승전국 는 지중해를 자신들의 내해(內海)처럼 이용하고, 지중해 교역을 독점하였다. 는 이를 통해 ▦지중해 동쪽으로 헬레니즘 문화권과 이집트 ▦서쪽의 아프리카 북부, 이베리아반도 및 갈리아, ▦브리타니아,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마니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인은 정복자였지만 피정복자를 ‘공동운명체’(식 표현은 가족의 일원이라는 ‘파밀리아’)로 만들어가는 것을 제국의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공생은 인이 추구한 기본적 사고방식이었다. 에 납세만 하면 인종을 불문하고 자유롭게 교역활동을 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헬레니즘은 군사집단이었지만, 는 법률과 제도로 상업 활동을 활성화시킨 국가경영시스템을 갖추었다. 19세기 독일 법학자인 루돌프 예링은 저서 ‘법의 정신’에서 “는 세 차례 세계를 정복했다. 처음에는 무력으로, 두 번째는 기독교로, 세 번째는 법으로”라는 유명한 글을 실었다.

17세기 프랑스의 시인 라퐁텐의 ‘모든 길은 로 통한다’는 말에는 육상의 가도와 지중해 해상의 길이 동시에 내포되었다. BC 312년에 시작한 가도 부설은 BC 1세기의 공화정 시대에 본국 이탈리아를 총망라하여 완성되었고, 제정 시대에 들어서는 유럽, 중근동, 북아프리카에 걸쳐 뻗어 나갔다. 전체적으로 지중해 연안 전체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모습의 제국은 수세기 동안 ‘팍스 나(Pax Romana)’를 구가할 수 있었다. 팍스 나 또는 의 평화는 제국이 전쟁을 최소화하면서 평화를 누렸던, 대체적으로 기원전 27년에서 180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비슷한 시대에 고대 제국인 와 중국이 인프라 건설에 국력을 쏟아부었지만, 두 나라의 ‘삶의 방식’은 전혀 달랐다. 의 도로망은 사람과 물자와 정보가 왕래하는 가도이자, 궁극적으로는 ‘팍스 나’로 연결되는 기능을 했다. 반면 만리장성은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끊는 장벽이자, 중국에 ‘팍스’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가 통일을 이룬 무렵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거쳐 진나라에 의해 BC 221년 통일됐다. 짧은 진나라 시대가 붕괴되자 BC 202년에 유방에 의해 한나라가 세워졌다. 한나라를 이은 후한 시대는 서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서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자가 찾아온 시기이기도 하며, 실크로드의 최초원형이 만들어졌다.

팍스 나 시대를 이룩하는데 의 해양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문명을 전파하는데 의 도로들이 준 영향에 대해 아주 많이 듣고 있다. 그러나 그 기적을 일으킨 함대의 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완전히 무시해 왔다. 제국이 그 도로들만큼이나 함대에 많이 의존했던 사실은 지금도 입증할 수 있다.” 제국은 방대한 식민지와 속주들로부터 공물로 받은 물품을 중개무역하며 국부를 축적했다. 제국의 특징으로 기억되는 코스모폴리탄적 문화와 극단적인 사치, 향락풍조는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부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제국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제국’이라 할 수 있다.

제국의 형성과 유지는 인들이 지중해를 마음대로 항해하며 오갈 수 있었을 경우에만 가능했다. 강성해진 사라센제국이 아프리카 북부지역과 스페인 남부를 장악하고 지중해의 제해권을 잠식하며 제국을 초승달 모양으로 포위하자 제국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지중해의 새로운 제해권 세력이 지중해의 새로운 강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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