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근대까지 수없이 추진됐던 수에즈운하... 佛 외교관 드 레셉스의 꿈과 책략으로 19C 뚫려

결정적 순간마다 드 레셉스 인맥 등장 ‘한편의 드라마’


운하는 대륙을 끊어 육지에 뱃길을 여는 것이다. 비행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때에는 대륙에서 대륙으로 가려면 바닷길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특히 대량화물을 운반할 때는 바닷길이 주요한 수단이었다. 운하가 없을 때는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이나 남미대륙 남단의 마젤란 해협으로 돌아 다녔다. 강대국들은 전쟁이나 물류 비즈니스에서는 ‘시간이 금’이기 때문에 대륙의 잘록한 부분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대륙을 관통하는 첩경 뱃길을 뚫었는데, 이러한 뱃길을 국제 운하 또는 국제 수로라고 한다. 공해와 공해를 연결하는 이러한 ‘국제운하’로는 , 파나마 운하, 킬 운하 등이 있다.

운하는 국가와 도시의 운명을 바꾼다. 새 운하가 열리면 지역은 물론 세계시장의 공급과 수요사슬 망이 변화될 수밖에 없다. 운하는 강대국의 야심과 개도국의 정략이 만난다. 최초의 흑인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의 나라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이 하나의 예다. 아프리카 남단의 케이프타운은 가 건설되기 전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200여 년 간 유럽에서 인도와 아시아로 가는 유일한 항로의 꼭짓점에 위치해서 무역항으로 크게 융성했다. 그러나 1869년 가 뚫리며 점차 물동량이 줄어 지금은 관광지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14년 파나마운하가 개통되지 않았으면, 미국의 해양패권국가로의 급부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프랑스 루이14세와 독일 황제 라이프니츠가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 견제 위해 추진, 기술 부족으로 실패

수에즈운하는 지중해와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두 대륙의 경계를 이루는 수에즈 지협에 굴착된 세계 최대의 해양운하이다. 유라시아의 해상실크로드를 연결하고 거리를 대폭 단축했다. 운하의 항구는 홍해 쪽이 수에즈이며, 지중해 쪽은 포트사이드(아랍어로는 ‘부르사이드’)이다. 의 길이는 지중해의 포트사이드로부터 남쪽 수에즈 만까지 193㎞이다. 연간 통과 선박 수는 개통 당시인 1869년 10척에 불과했지만 1978년에는 2만 척을 돌파했고, 2008년 2만 1415척으로 최고를 기록했다. 1955년에는 유럽의 석유의 3분의 2, 세계무역의 8%가 이 운하를 통항했으며, 2018년에는 88개국의 국적선 1만8174척의 선박이 11억 3900만 톤의 화물을 싣고 통항했다.

이집트에는 ‘모두가 시간을 두려워하지만, 피라미드만이 세월을 비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기원전 2500년경 건축되어 50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일강변에서 그 위용을 떨치고 있는 피라미드를 찬양하는 말이다. 그 속담은 수에즈운하를 건설하려는 장구한 역사에도 적용된다. 고대 이집트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항로를 단축하기 위해 지중해와 홍해를 운하로 잇는 상상과 시도를 해보았으나 기술의 부족과 정치적인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고대 최초의 운하를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BC 19세기 이집트 파라오 왕조 제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역사학의 아버지로 부르는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BC 600년에 이집트의 파라오 네카우 2세의 계획이 있었고, 그후 BC 5세기경에는 이집트를 정복한 페르시아 왕인 다리우스 1세가 홍해와 ‘대염호수(Great Bitter Lakes)’를 거쳐 나일 강 남동부의 부바스티스와 연결했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2세가 BC 250년경 운하를 정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아바스조 칼리프 알 만수르가 AD 767년 델타 지역으로 침입하는 반란군을 막기 위해 운하를 폐쇄할 때까지 약 1000년간 파괴와 보수가 반복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고대 수에즈운하의 고전원형을 장기간 운영했던 프톨레미 왕조의 역할은 중요하고 흥미롭다. 알렉산더대왕(BC 356~323)의 최측근 네 명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프톨레미 1세(재위 BC 323~285)는 알렉산더대왕이 죽은 후 이집트에 프톨레미(프톨레마이오스라고도 부름) 왕조를 세웠다. 알렉산드리아를 수도(현재 이집트의 수도는 969년 이후 카이로)로 삼아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진행하였다. 300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프톨레미 왕조의 마지막 왕이 역사에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여왕이다. 프톨레미 1세의 아들인 프톨레미 2세(BC 285-247)는 안정된 내정과 강력한 해군으로 동부 지중해에서 가장 우월한 위치를 확보했으며, 홍해 안에 여러 항구를 세우고 전략상 요충지에는 함대를 파견하여 완벽하게 홍해를 지배했다. 그리고 나일 강으로부터 홍해로 통하는 운하를 개통해 이집트를 동서양 무역의 중요한 중계지로 만들었다. 프톨레미 2세는 고대 인류 문명의 7대 불가사의로 간주되는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를 세운 주인공이기도 했다. 1869년에 완공된 는 BC323년 알렉산더대왕이 헬레니즘을 전파하는 중심항인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 이후 2200년이 지나고 나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같은 장소에서 다시 한 번 동^서양을 잇는 역사의 평행이론이 실현된 것이다.

수에즈 운하

대항해시대에 접어든 16세기에 지중해 연안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수에즈 지협에 운하를 파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해상 패권에 대응하려고 했다. 17~18세기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독일 황제 라이프니츠가 를 만들어 네덜란드나 영국의 아시아 무역을 억제하려 했으나 토목기술 부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나폴레옹도 영국의 인도 무역에 타격을 주기 위해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한 통상로를 개척하려고 하였지만, 영국 넬슨제독에게 나일해전(1798년)에서 패배함과 동시에 수석 엔지니어의 계산 착오로 포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에 들어선 1846년에는 프랑스 생-시몽주의자(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주도로 프랑스와 영국·오스트리아의 지식인들이 참여한 이른바 ‘수에즈운하연구협회’가 결성되었고 국제기업에 의한 운하 개설 계획이 세워졌으나, 이 시도 역시 영국의 자국 이익에 배치된다는 구실로 중단되었다.

건설의 일등 공신은 1825년부터 1849년까지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외교관 경력을 가졌던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 (1805~1894)이다. 그는 1869년 수에즈운하 건설에 성공했고, 1888년 파나마운하 건설에 도전했던 ‘세계운하의 아버지’이자 대단한 해양책략가였다. 부친도 외교관이었던 페르디낭 드 레셉스는 외교관이자 기술자로서 1825년부터 1849년까지 스페인과 튀니지, 이집트 등에서 근무했다.

나폴레옹도 영국의 인도무역 타격 위해 추진했지만 영국 넬슨 제독에게 나일 해전에서 패해 포기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한 프랑스 외교관 드 레셉스는 수에즈운하 건설에 성공하고 파나마운하 건설에 도전한 ‘세계 운하의 아버지’

운하에 관해 특별한 지식이 없었던 그가 운하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본 단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가면서 를 건설하려던 계획을 담고 있던 그 책은, 그의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고,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인물로 만들었다. 그가 사막을 가로질러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자고 했을 때, 많은 외교관들과 언론은 반대하고 조롱했다. 그들에게 드 레셉스의 계획은 한마디로 무모하고 황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적 사업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 건설을 위한 철저한 타당성 연구조사, ▦기술적 확신, ▦강력한 의지와 불굴의 자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맥과 행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인맥’, 중국은 ‘콴시(關係)’가 중요하지만, 수에즈운하 건설의 고비 고비마다 인맥은 크게 작용했다. 또한 그는 1833년에서 1837년 기간 동안 이집트의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영사로 근무하면서 돋보이는 용기와 깨끗한 기사도 정신, 세련되고 품위 있는 언행들로 이집트 총독인 무함마드 알리를 매료시켰다. 연로해진 무함마드 알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신장이 너무 작고, 몸은 지나치게 뚱뚱한 어린 왕자 사이드 파샤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드 레셉스에게 아들의 신체를 단련시키는 특별훈련을 부탁했다. 총독의 부탁을 받은 레셉스는 사이드 왕자에게 그야말로 가혹할 정도의 훈련을 시켰다. 이 훈련은 예상외로 성공적이었고,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좋은 제자가 훌륭한 스승과 앞선 생각을 하는 부친을 잘 만나면 역사를 바꾼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러한 사례로 그는 최고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혜안을 지닌 부왕 필리포스 2세를 만나면서 세계사에 한 장을 남겼다. 드 레셉스는 자신의 승마제자이자 이집트의 총독이 된 무함마드 사이드 파샤(재위 1854~1863년)에게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운하를 건설하면 장차 이집트에 많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제안했고, 총독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운하건설은 시작되었다. 프랑스인 드 레셉스와 이집트인 사이드 파샤의 신뢰와 믿음이 바탕이 된 헌신적인 인간관계가 아니었다면 사업은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사이드 파샤는 이집트의 국제적 지위를 높여 열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면서 이집트 국민들을 설득했고, 이집트 국민들 또한 열강의 침탈로 주권이 빼앗기고 빈곤한 국가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이집트 왕과 드 레셉스를 지지하고 사업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854년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파샤는 프랑스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에게 운하개설 특허권과 수에즈 지협 조차권을 양도하였다. “사이드 파샤는 레셉스에게 수에즈 지협을 뚫을 권한과 99년간 운영할 권리를 인정한다." - 1854년 11월 30일 이집트의 왕 ‘사이드 파샤’-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프랑스 '페르디낭 드 레셉스’(출처, 위키피디아)

드 레셉스가 위와 같이 에 관한 특허와 조차에 관한 권리증을 얻었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지만, 그가 이 권리를 얻어내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이집트는 사이드 파샤가 왕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약했다. 정치적으론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경제적으론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기에 때문에 드 레셉스가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앞에 두 나라를 설득해야만 했다. 오스만제국과 영국은 이집트가 를 건설하게 된다면 이집트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라 판단하여 드 레셉스의 원대한 계획에 동의하지 않았고, 토목공사에 필요한 자금을 일체 지원하지 못하도록 이집트 내에서의 지원을 막았다. 하지만 드 레셉스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끝내 승리했다.

당시 프랑스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집권했던 시기(1852~1870년)로 프랑스 상선과 해군이 세계 2위 규모로 성장했던 시점이었다. 드 레셉스는 스페인 마드리드 부 총영사 시절 외할머니 쪽 가까운 친척이자 훗날 나폴레옹 3세의 황후(황후 재위 1853~1870년)가 될 외제니 드 몽티조와 잘 아는 사이였다. 드 레셉스는 나폴레옹 3세의 황후 드 몽티조에게 건설에 필요한 기금과 재원을 후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드 레셉스가 스페인에서 맺었던 인연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순간이었다. 외제니 황후는 이집트 수에즈운하 건설을 위한 외교적 지원은 물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사업에 적극 후원을 한 스페인의 이사벨여왕 사례와 유사하다.

드 레셉스는 돋보이는 용기와 깨끗한 기사도 정신으로 이집트 총독 아들의 가정교사 맡아 각별한 인연 쌓아 아들이 총독이 되자 건설에 의기 투합

스페인 근무 때 인연 맺은 드 몽티조가 황후가 되면서 드 레셉스의 운하 건설에 재정적으로 막대한 지원

드 레셉스는 2억 프랑(800만 파운드, 한화가치 2300억 원 상당)의 자본금으로 1858년에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를 이집트 법인으로 설립하였다. 자본금 중 20만 7000주는 프랑스가, 17만 7000주는 이집트가 소유하게 되었다. 레셉스가 프랑스인이었고 나폴레옹 3세의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의 후원 때문에 건설에 대한 채권을 가장 많이 구매한 사람은 프랑스 국민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모인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의 사업은 1859년 4월 5일 시작되었다.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꿈과 이집트왕 사이드 파샤의 염원이 담긴 공사는 장장 10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1863년 1월 18일 사이드 파샤가 죽자 위기가 찾아왔다. 이스마일 파샤가 왕이 되자 영국과 오스만 터키(과거 오스만 투르크제국)는 사업을 연기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에 대해 드 레셉스는 나폴레옹 3세의 왕후 외제니 드 몽티조에게 도움을 얻어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1869년 8월 15일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가 비로소 완공되었다. 공사는 1859년 4월에 시작해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까지 1억 달러의 건설비를 투입하여 세계 최대의 운하가 개통된 것이다. 1869년 10월, 유럽의 모든 왕족과 대표들이 참석한 개통식과 함께 프랑스 선적인 ‘루이즈에 마리’호가 를 처음으로 통과하면서 시작된 는 전 세계의 물류 요충지로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위대한 일을 이루기 위해선 행동만이 아니라 꿈을 꿔야만 한다. 계획만이 아니라 믿어야 한다.(To accomplish great things we must not only act, but also dream; not only plan, but also believe.)” -1896년 12월 24일, 아나톨 프랑스가 쓴 ‘를 구상한 페르디낭 드 레셉스에 대한 연구’에서 발췌-

홍승용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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