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대통령 링컨의 책사들

게티즈버그에서 연설하는 링컨대통령. 링컨의 연설이 너무 일찍 끝나 사진을 찍을 준비를 아무도 못했기 때문에 위 사진이 유일한 사진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는 미국의 국가이미지를 손상해왔던 주요 이슈다. 인종차별 문제는 코로나19와 함께 오는 11월 미국대선을 앞두고 선명한 쟁점이 된 건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의 트럼프 대통령과 대척점에서 비교되는 대통령은 링컨이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에이브러햄 링컨(대통령 재임 1861~1865)은 민족통일과 민주주의를 결합하여 국가통일을 이룬 위대한 인물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링컨이란 이름은 미국 5달러짜리 지폐, 고급승용차인 링컨 콘티넨탈에 붙어 있다. 링컨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전 세계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표방할 때마다 차용하는 구호가 됐다.

그는 고난과 실패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켄터키 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증을 따지만, 그 전에는 소규모 잡화점 점원, 우체국장, 뱃사공, 측량기사 등을 전전했다. 193cm의 장신이었으나 마른 체구였던 그는 프로레슬러로 일리노이 주 챔피언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인생에서 두 번의 사업 실패, 10번의 선거 중 7번의 낙선을 경험했다.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1850년대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부상하자 노예반대를 표방하며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했다. 이후 1855년 연방 상원의원 낙선, 1856년 부통령 후보 경선 낙선을 거쳐 1858년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시 유명 정치인이던 스티븐 더글러스와 격돌했다. 이 선거에서도 링컨은 낙선했지만, 더글러스와의 공개논쟁에서 “내분으로 갈려서 싸우는 집안이 오래 갈 수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는 내용의 ‘분열된 집안(House Divided)’ 연설로 노예제 반대 입장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비록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패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마침내 노예문제가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던 1860년 말 치러진 대선에서, 링컨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남부민주당 존 브리켄리지(18% 득표)와 북부민주당 스티븐 더글러스(29% 득표)의 두 후보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링컨(39.8% 득표)이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미국 역사상 당선자의 득표율이 40%를 넘지 않은 유일한 선거였다. 특히 링컨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건국 당시 13주 이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대통령이자 공화당 출신 첫 대통령이기도 하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링컨은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선언하였다. 남북전쟁 이전의 링컨은 이미 노예제를 가지고 있는 남부의 노예를 즉시 무조건 해방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의 목적은 여러 세력을 조정하여, 강경론자들을 누르면서 노예해방을 점진적으로 단행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당선과 함께 남부 7개주는 잇달아 합중국을 이탈하여 남부 연합국을 결성하였다.

북부 출신의 링컨은 노예제도가 국가의 지속적인 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반면 남부는 오히려 더 완고하게 노예제도를 옹호하며 정당화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높은 수준의 산업화와 경제력을 갖춘 북부와 달리 남부는 농업이 대세여서 엄청난 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 노동력의 기반이 바로 노예였던 것이다.

1861년 4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공격으로 마침내 남북전쟁(1861~1865)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전황은 병력이나 장비에서 우월했던 북군에게 불리하였다. 남군에는 로버트 리와 같은 뛰어난 장군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티즈버그 전투 전에는 북군이 전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의 무능으로 참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북부는 아무리 많은 군대가 있더라도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고, 반대로 남부는 부족한 병력에도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전선을 지휘할 유능한 야전사령관을 찾기 위해 링컨은 인재를 계속 발탁했고 교체했다. 흔히 병법에서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꿔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링컨은 정반대 전략으로 나갔다. 이 전략은 ‘군인 중의 군인, 장군 중의 장군’인 율리시스 그랜트를 찾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랜트 장군은 훗날 전쟁영웅으로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1869년 미국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의 이름을 이니셜화 한 U.S.그랜트가 미국(U.S.)의 이니셜과 맞아떨어진 덕분에 이걸 이용한 광고 전략을 펼쳤다고 한다. 그랜트는 미국 50달러 지폐의 모델이기도 하다.

1862년 9월 링컨의 북군은 노예제 폐지를 예고하고, 영국의 남부 연합국 승인을 저지함으로써 북부와 해외여론을 자기편으로 유도하여 전황을 뒤짚는데 성공하였다. 승리할 기미가 보이자 링컨은 곧바로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월의 일이다. 흑인들은 기뻐했고, 남부는 혼란에 빠졌다. 1863년 7월 1일에서 4일까지 계속된 게티즈버그전투는 북군 반격의 분수령이 되었다. 게티즈버그 전투 이후 전세에서 밀리던 남부군은 리치몬드 전투에서 북군에게 패배하자 백기를 들었다. 남북전쟁으로 6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남북전쟁을 통해 약 400만 명의 노예가 자유를 찾았다.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국립묘지 봉헌식에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멸의 연설을 남겼다. 그 유명한 ‘272 개 단어, 3분짜리 게티즈버그 연설’이었다.

전쟁 중이던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재선 전망이 불투명하였으나, 율리시스 그랜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승리가 계속된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남북전쟁이 종막에 가까워지던 1865년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링컨 대통령은 연극관람 중 남부 출신 배우에게 피격당해 사망하였다.

위대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가 현직에 있을 때 이루어낸 것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철학과 정신이 지속적으로 잘 계승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흔히 대 재벌에 대한 평가도 ‘재산을 남기면 하수, 업적을 남기면 중수, 인재를 남기면 상수’라고 한다.

최인호가 쓴 소설 《상도》에서 거상 임상옥(1779~1865년)은 사업의 급소를 설파한다.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 상업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장사꾼을 대통령, 상업을 국가경영으로 바꿨을 때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링컨 대통령의 4대 업적은 첫째, 남북전쟁을 통한 노예제도 폐지와 연방체제 수호, 둘째, 유능한 인재들에 의한 통합내각 구성과 민주주의 확립, 셋째, 대륙횡단철도 착수, 넷째, ≪랜드 그랜트법≫ 시행 등을 들 수 있다.

알래스카 지도. (사진 유토이미지)
둘째 사항인 통합내각 구성과 운영은 과거와 현대를 통틀어도 링컨만이 할 수 있었던 대담함과 위대함을 보여준 것이다. 포용의 정치가 링컨은 분열된 미국을 봉합하기 위해 여야를 막론하고 능력과 자질에서 각 분야 최고의 인재로 통합내각을 구성했다. ‘인사가 만사다’라는 명제를 실천했다. 윌리엄 시워드는 1860년 11월 제16대 대통령 후보 공화당 1차 경선에서 1위였지만, 과반수를 얻지 못해 두 차례의 결선 투표를 치른 끝에 3차 결선투표에서 링컨에 대역전패한 정치가다. 삼고초려 끝에 행한 링컨 대통령의 시워드 국무장관 발탁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시워드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최장수 국무장관이 되었다. 대통령 감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던 시워드 국무장관의 합류로 미국은 분단의 위기를 넘고 노예해방이라는 가치를 보편화시켰다. 또한 통합 내각의 장관 7명 가운데 4명은 공화당 당내 경선의 경쟁자였으며, 3명은 야당인 민주당 출신이었다. 링컨은 전임자인 제15대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인사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뷰캐넌은 무조건 충성하는 측근 위주로 내각을 채웠고, 남부 위주의 정책을 펼쳐 연방 분열 위기를 증폭시켰다.

링컨은 공화당 후보 경쟁자였던 새먼 체이스 오하이오 주지사를 재무장관에, 에드워드 베이츠 미주리 주 판사를 법무장관에 앉혔다. 재판 송사에서 링컨의 반대편에 서서 그를 ‘긴 팔 원숭이’라고 조롱했던 에드윈 스탠튼 변호사는 전쟁장관이 됐다. 1864년 대선에서는 정적이던 민주당의 앤드루 존슨을 부통령 후보로 발탁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링컨은 남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노예 해방을 쟁취했으며, 자칫 남북으로 갈라질 수도 있었던 미국 역사를 바꿔 놓았다. 반대파를 끌어안은 포용의 정치가 위력을 발휘한 덕분이었다.

셋째 사항인 미국 물류혁명의 출발점인 대륙횡단 철도 건설을 위해 링컨은 공사를 착수했다. 미국의 영토는 남북전쟁 전에 이미 태평양에까지 도달해 있었으나 미시시피 강을 넘어서면 서쪽은 아직도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이 광대한 땅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물자와 사람들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대규모 운송 수단이 필요했다. 당시 유일한 대안은 철도였는데 전쟁이 격화일로에 있던 1862년 링컨 대통령은 역사적인 대륙횡단철도 건설법에 서명했다. 본격적인 공사는 전쟁이 끝난 1865년에 시작되었고, 1869년 5월 10일 양쪽에서 건설해온 철도가 유타 주 프로몬터리에서 만났다. 1865년 3만 5천 마일에 불과하던 철도가 1900년 즈음해서는 거의 20만 마일에 육박했는데, 이 길이는 당시 전 유럽의 철도망을 합한 것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넷째 사항인 토지무상 공여에 의한 미국 주립대학 설립과 고등교육 추진의 기초를 연 『랜드 그랜트법 Land Grant Act』 제정 통과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랜드 그랜트법은 미국의 산업혁명과 사회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농업, 공학, 군사과학 교육을 강화하고, 적어도 한 주에 하나의 주립대학을 건립하는 것을 목표하여 한 대학 당 약 3만 에이커의 땅을 국가에서 무상으로 공여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다. 1857년 버몬트주의 저스틴 스미스 모릴 의원이 제안하여 1859년 의회를 통과되었으나 링컨의 전임대통령인 제임스 뷰캐넌이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모릴은 1861년 이 법안을 다시 제출하였고 1862년 링컨이 서명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현재 랜드그랜트 대학은 주립대학은 물론 MIT와 코넬대 등 사립대를 포함 76개로 미국 고등교육의 핵심이다.

이상 네 가지 업적에 더하여 링컨 대통령의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업적이 있다. 바로 미국의 ‘해양대국 건설구상이다. 링컨의 뜻을 계승한 책사들은 미국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국무장관 윌리엄 시워드, 앤드루 존슨 부통령, 비서 존 헤이 등이 대표적이다.

국무장관 시워드가 주도한 알래스카 매입과 태평양 주요도서 획득 정책이 링컨의 후임이던 제17대 앤드루 존슨 대통령(재임 1965~1969년) 임기 초기에 현실화됐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전임자인 링컨 대통령이 돌연 암살당했을 때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정권교체가 아닌 정권승계였기 때문에 국가의 거대 전략은 링컨 대통령 때 깊숙이 논의됐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알래스카 매입을 주도한 시워드 국무장관은 링컨 대통령이 발탁했고, 훗날 국무장관이 되는 존 헤이가 링컨 대통령의 비서였다는 점에서 링컨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이때부터 이미 미국의 해양강국과 해양영토 확대를 위한 그랜드 전략을 구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워드가 역대 최고의 국무장관으로 평가받는 핵심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할 때 주역이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해외 팽창주의’를 이끈 선구자였다는 점이다. 시워드를 비롯한 팽창주의자들은 새 영토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노예제도에 막힌 상태였다. 새 영토에 노예제 적용 여부를 놓고 남부와 북부가 대립하며 결국 영토 확보를 포기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패해 이런 장벽이 없어진 직후인 1867년 미국의 제17대 대통령 앤드루 존슨 대통령과 국무장관 윌리엄 시워드는 태평양에서 미드웨이 군도를 획득하고,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사들임으로써 북극해까지 영토를 넓혔다. 미드웨이군도는 1859년에 미국 속령이 됐다. 하와이 제도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간점'이란 이름 뜻처럼 아시아와 북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대략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미드웨이제도는 세 섬을 다 합쳐도 6.2㎢ 가량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바꿨다고 평가되는 미드웨이 해전으로 유명하다.

또한 훗날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 기간 중 1898년부터 1905년까지 8년 동안 국무부 장관을 지냈고, 태평양시대를 예견한 존 헤이는 링컨 대통령의 비서였다. 존 헤이가 훗날 루스벨트 대통령 내각에서 국무장관을 맡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조지 워싱턴대학교 대학생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때인 1905년에 존 헤이 장관이 이승만을 만났다는 점이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1952년 유명한 ‘평화선’을 선포한 것은 팽창주의에 몰두해 있었던 미국 지도층의 기류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존 헤이는 1899년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정책의 제창, 파나마운하 건설에 관한 조약 체결 등 미국의 해외팽창정책에 크게 공헌하였다. “지중해는 과거의 바다요, 대서양은 현재의 바다이며, 태평양은 미래의 바다이다.” 존 헤이의 유명한 말이다. 그의 혜안은 후세에 계속 회자되고 있다. 신생국가 미국은 미주대륙뿐만 아니라, 세계 지도에 표시된 섬들을 구매하거나 전쟁으로 확보해 왔다. 알래스카와 하와이 등 태평양 도서는 물론 덴마크로부터는 중남미 카리브 해에 위치한 버진 아일랜드 섬을 매입했다. 대서양에서 파나마 운하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버진 아일랜드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한 미국은 1860년대 링컨 대통령 시절부터 덴마크와 섬의 구입에 관한 협상을 시작하였다. 협상은 1900년 존 헤이 국무장관 시절 500만 달러에 거의 타결 직전까지 갔다가 결렬됐다. 그 후 제1차 대전에서 독일의 잠수함작전의 위협을 느낀 미국은 제28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917년에 버진 아일랜드를 매입했고, 해군 기지를 건설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링컨의 여러 가지 위대한 업적에 미국의 ‘해양영토 확장구상’과 훌륭한 ‘해양책략 후계자 육성’을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링컨은 해양 대통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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