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가는 안보실장·중국 가는 외교장관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왕이 중국 외교부장 겸 국무위원과 취임 후 첫 회담을 위해 서울공항에서 정부 전용기를 타고 중국으로 출국한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한국과 미국, 한국과 중국 간의 외교 밀당이 동시에 이뤄지는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한미일 국가안보실장 회의에 참석하는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미국에서, 3년 5개월만에 한중 외교장관 회담을 갖는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중국에서 미·중 갈등 사이에 끼인 한국의 눈치보기 외교를 펼치는 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이번 사례는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들의 관여가 확대되며 북한 비핵화 협상은 물론, 한미, 한중은 물론 한일관계까지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특히 2일 중국행 비행기에 오른 정 장관은 대만의 진먼다오가 코앞인 중국 푸젠성 샤먼에서 왕이 외교부장 겸 국무위원과 회담을 갖는다. 미중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와 거의 같은 시간에 회담이 열리는 데다 장소까지 미묘한 곳이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모양새다.

고립주의를 버리고 개입주의를 택한 조 바이든 미국 정부와 중국의 패권 경쟁이 더욱 복잡해지는 한반도 주변의 정세 속에 한국의 국익을 지켜내기 위해 긴장된 ‘줄타기 외교’에 나선 두 사람의 어깨가 새삼 무거워 보인다.

서훈 실장은 2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애너폴리스 소재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한미일 국가안보실장 회의에 참석했다. 이번 회담은 조 바이든 행정부 들어 처음 열리는 회의다. 북한 비핵화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의견을 듣겠다는 취지다.

미측은 대북 정책 재검토가 최종단계임을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북한 비핵화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북한과의 협상에 나섰던 경험자들을 인터뷰하며 만들어 온 전략에 한국과 일본의 조언을 녹여 북한과의 협상을 시작한다는 게 동맹 우선주의를 내세운 바이든 정부의 입장이다.

서 실장의 가장 큰 숙제는 우리 정부가 추진해온 종전선언을 미국 측에 설득하는 것이다. 서 실장은 2018년 국가정보원장 시절 정의용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방북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면담했다. 면담 후 곧바로 미국으로 향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북미 정상회담 승낙을 받아내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콤비는 싱가포르와 하노이 1, 2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며 한반도 비핵화의 이정표를 마련하는 듯했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 실패 후 부각된 북미 간의 갈등은 한반도 비핵화의 제자리걸음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우리 정부는 바이든 정부의 출범과 함께 종전선언을 통해 북미 관계 개선을 모색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헛바퀴만 돌리던 북미 비핵화 협상을 종전 선언으로 가속 페달을 밟게 한다는 전략인 셈이다.

상황은 3년 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서 실장은 안보 총괄 책임자로, 정 장관은 외교 수장으로 역할을 수정했다. 서 실장은 지난해 취임 후 트럼프 전 정부와의 협의를 위해 미국 방문 중 "종전선언과 비핵화 과정이 따로 놀 수 없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유엔(UN)총회 화상 연설 중 호소한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강조한 발언이다.

서 실장은 당시 "종전선언 문제는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제까지 항상 협상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문제였고, 그 부분에 대해 한미 간에 다른 생각이 있을 수가 없다"라고 했다. 서 실장은 지난해 국회에 출석해서도 "종전선언은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집착이라고도 할 만하지만 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방향성 준비에 관여하기 위한 방안으로 종전선언을 재차 쏘아 올렸다.

정 장관은 방중을 앞두고 지난달 31일 종전선언에 대해 "미국도 좀 더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북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언급했다. 한미일 안보 실장 회의와 한중 외교부 장관 회담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여전히 종전선언을 통해 북미 대화를 유도하겠다고 공론화 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의견을 반영해 대북 정책 재검토에 반영하겠다는 상황에서 종전선언에 대한 우리 정부의 희망을 예고한 것으로 풀이됐다. 서훈 실장이 회의 참석차 뉴욕에 도착한 직후 "이번 회의의 목적은 북한과 비핵화협상을 하루빨리 재개하는 데 있다”고 말한 것도 북한의 빠른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수 있다.

미국 언론도 우리 정부의 희망에 관심을 보였다. 미국의소리방송(VOA)은 전직 미국 당국자들을 인용해 바이든 행정부가 종전선언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한국의 종전선언 제안과 관련해 “미국이 그런 것을 거부하고 싶진 않을 것”이라며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 준비가 됐음을 시사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의 종전선언에) 긍정적 방식으로 반응하길 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북핵 특사도 바이든 행정부의 최종 대북정책에는 평화협정이 포함될 것으로 기대했다.

반대로 북한의 비핵화 전 종전선언에 대한 미 조야의 부정적 평가도 계속되고 있다.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는 "북한이 관심 있는 대화는 핵무기를 정당화하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어 역량을 감소시키고 한미 동맹을 약화하는 군축 협상뿐"이라며 "미국이 그런 요청에 동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라고 말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북한 문제에 집중하고 싶지만 현 상황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미·중 갈등 속에서 우리 측에 대한 미국과 중국의 줄 세우기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이번 회담에서 반도체 문제와 남중국해 이슈가 의제로 다뤄질 것이라는 점을 선제적으로 공개한 것이 그 예다. 이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의견을 듣겠다고 초대한 이들에게 중국 압박에 대한 동참을 요구할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는 미국이 중국과의 기술 지배력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공동대응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조2500억 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 계획을 발표하면서 일자리 창출과 함께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겠다고 한 것은 미국 측이 경제 분야에서도 중국에 대한 차단을 더욱 본격화할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정 장관은 중국에서 미국 정부와 우리 정부의 관계에 대해 적극적인 해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 장관은 "의도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고 우연히 시기가 겹친 것"이라고 밝혔지만, 주요 2개국(G2) 사이에서 한국이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다는 시선을 피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백종민 아시아경제 뉴욕특파원



백종민 아시아경제 뉴욕특파원 cinqang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