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미국 행정부와 의회가 중국을 견제하면서 자국 내 공급망과 산업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한국 등 미국의 동맹과 파트너 국가의 역할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우리 기업들이 대만 일본 등 경쟁국 기업과의 자리다툼에서 앞서기 위한 노력과 정부 차원의 지원이 더욱 중요해졌다. 미국의 목표가 중국 견제인 만큼 미·중 사이에 끼인 상황에 대한 대응의 중요성도 한층 높아지고 이다.

지난 8일(현지시간) 백악관이 발표한 반도체, 배터리, 의약품, 희토류 공급망 개선을 위한 검토 보고서는 한국과 미국 간의 경제 협력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계기로 평가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 반도체 부족 사태로 인한 차량 생산 중단이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지적하며 공급망 개선 방안을 지시한 후 미국과 한국의 경제 협력은 이제 희망이 아닌 필수 조건이 되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안보 차원의 동맹이었던 한미 관계가 이제는 경제 동맹 관계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을 계기로 주요 7개국(G7) 수준으로 부상한 한국 경제에 대한 미국의 협력 필요성은 어느 때 보다 커진 상황이다.

백악관은 반도체 분야 공급망 강화에 있어 동맹 및 파트너와의 협력 필요성을 부각하면서 미국 기업 및 해외 기업의 미국 투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백악관은 특히 공급망 개선 보고서에서 미국 반도체 분야에 대한 삼성전자의 170억 달러(약 19조원) 규모 투자를 언급하며 "공정한 반도체칩 할당과 생산 증가, 투자 촉진을 위해 동맹 및 파트너와의 관여를 강화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보고서에는 한국에 대한 언급이 74차례나 등장하고 삼성이라는 특정 기업에 대한 언급도 20여 차례에 달했다.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한국 기업과의 협력이 없이는 미국 공급망 개선이 불가하다는 상황을 미국 정부도 인식한 것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 정부가 동맹과 파트너 국가의 정부는 물론 기업들을 망라하는 공급망 강화 국제회의를 소집키로 한 가운데 반도체·배터리 분야를 주도하는 한국 기업들은 핵심 참가 대상으로 거론된다. 마침 바이든 정부가 추진 중인 그린 정책에서 반도체와 배터리가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는 상황은 한미 경제 관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새기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의 후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에너지솔루션, SK이노베이션 경영자들을 일으켜 세워 미국에 대한 투자에 고마움을 표시한 것은 역대 어느 정상회의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와 바이든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에서 일본 기업의 대미 투자는 거론되지 않았던 만큼 한국 기업의 투자에 대한 미국 측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 상원도 ‘중국견제법’을 초당적인 지지로 통과시키며 중국과의 경쟁을 위한 지원 사격에 나섰다. 상원은 중국과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반도체 등 첨단 산업 기술 개발과 생산에 필요한 2500억달러(약 280조원)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중국 견제법을 찬성 68, 반대 32로 통과시켰다. 법 통과에 따라 향후 5년간 1900억달러(210조원)가 기술 개발에 투자되며, 특히 540억달러(60조원)는 반도체에 특정해 집행될 전망이다. 자동차 부품용 반도체 개발에만 20억달러(2조2000억원)가 배정됐다.

의회의 행보는 미 행정부에도 큰 힘이 될 전망이다. 이날 발표된 백악관의 공급망 검토 계획을 논의하기 위한 각료회의에서도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50억달러 규모의 초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제기된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도 지난10일 법안 통과 직후 "인공 지능에서 반도체, 리튬 배터리에 이르기까지 미래의 가장 중요한 기술을 미국이 주도하기 위한 리더십을 마련하게 됐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21세기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다른 국가는 이미 투자에 나서 우리가 뒤처질 수 있다"라며 미국이 가장 혁신적이고 생산적인 국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번 법안의 하원 통과를 촉구했다.

단 우리로서는 경쟁국인 대만의 추격과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대만 지원 대책이 부담스럽다. 2000년대 이후 큰 격차를 보여온 한국과 대만의 경제력이 미국의 적극적인 대만 지원 정책으로 대폭 줄어들 가능성도 예상된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10일 대만과의 무역투자기본협정(TIFA) 위원회 회의를 향후 몇 주 내로 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TIFA는 자유무역협정(FTA)의 전 단계라는 평가되는 만큼 미국과 대만 간의 FTA 체결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는 평가다.

미국과 대만은 1994년 TIFA 협상을 시작한 이래 10차례 관련 회담을 진행해 왔지만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 이후 진척이 이뤄지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가 이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최근의 상황은 대만에 유리해지는 모습이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 병목 상황이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소재한 대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민주주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도 대만과의 FTA 체결에 나설 명분이 생겼다.

미국과 대만간에 FTA가 체결되면 한미 FTA를 앞세운 한미 경제 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이 예상된다. 최근 미국의 대만 지원 확대 방침이 대만의 경제력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한국 경제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경제 외교의 변화가 예상되는 상황은 한국에 더욱 주도면밀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이 숙제를 풀어야 한국이 G7 국가로 당당히 합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백종민 아시아경제 뉴욕특파원



백종민 아시아경제 뉴욕특파원 cinqang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