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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창] 한국·대만 반도체 업체 압박하고도 제 머리 못 깎는 미국

‘반도체 영업정보’ 바이든 손으로
  •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이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상무부 회의실에서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과 면담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산업통상자원부 제공)
미국 정부는 과연 반도체 공급망 문제를 해결하고 자국 반도체 산업을 육성할 수 있을까. 미국 정부가 극히 이례적으로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기업들을 압박해 반도체 공급망 정보를 확보했지만 반도체 산업 육성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떠오르고 있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지난 8일(현지시간)까지였던 반도체 공급망 정보 신고 마감일까지 각국 반도체 기업들을 압박했지만, 하루 뒤 입장을 바꿨다. 러몬도 장관의 공격 대상은 미국 의회였다.

러몬도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미국 반도체의 생산 부족이 경제적 위협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 위협”이라며 “더 많은 반도체를 미국에서 만들게 하기 위해 의회가 반도체 지원 법안과 미국 혁신경쟁법(USICA)을 가능한 한 빨리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압박의 칼을 미국 의회로 겨냥한 것이다.

반도체 부족 현상이 미국 자동차 생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상황은 조 바이든 행정부에 치명적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친노조 정부다. 반도체 부족으로 자동차 생산이 줄면 근로자들의 수입이 줄어든다. 미국 최대 노조 조직 중 하나인 자동차 노조는 바이든 정부의 핵심지지 세력이다. 바이든 정부가 애플이나 테슬라 등 혁신 기업들의 반도체 부족 상황보다 자동차 업체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 정보를 확보했다 해도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은 한국, 일본, 중국과 달리 국가 차원의 특정 산업 육성 경험이 적다. 미국 산업을 주도하는 것은 민간이지 관이 아니다.

반도체의 고향이 미국이지만 미국 정부는 반도체 부족으로 신음하게 되기까지 상황을 사실상 방관했다. 페어차일드,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인텔, AMD, 엔비디아 등 쟁쟁한 기업들은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주도했다. 미국 반도체 산업은 추격이 불가능한 분야로 여겨졌다. 미국은 D램을 일본에 빼앗기면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주력했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이어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생산 분야에서 발을 빼고 반도체 설계에 주력했다. 이른바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업체) 붐’이다. 지금도 미국의 반도체 설계가 없으면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은 존재가 불가능하다.

문제는 생산이다. 미국이 설계에 주력하는 사이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이, 반도체 생산은 대만이 최대 강자로 부상했다. 미국이 설계한 반도체는 대만 TSMC와 삼성전자가 생산하게 됐다. 미국 기업들은 대규모 생산 설비 투자 대신 설계만으로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 반도체 생산 중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대 40% 수준에서 지난해에는 12%로 추락했다. 미국 정부가 이런 상황을 사전에 관리했다면 현재의 반도체 공급망 붕괴 현상은 달라졌을 수 있다. 과거 방관자였던 미국 정부가 변신을 주도할 능력이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윌리 시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TSMC와 삼성전자는 아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상황은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다. 코로나19 상황 초기 수요 예측에 실패한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반도체 부족 현상에 시달렸다. 현대차, 도요타 등이 반도체 확보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GM 등 미국 자동차 기업들은 제대로 된 대응조차 못했다.

정치권도 문제다. 미국 상원은 지난 6월 자국 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52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담고 있는 혁신경쟁법(USICA)을 통과시켰지만 이 법은 하원에서 낮잠만 자고 있다. USICA는 미래기술, 과학, 연구 분야에 향후 5년간 최소 2000억달러를 투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을 견제해 미국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면서도 정치권 갈등이 산업 육성의 걸림돌이 되는 상황이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의석을 양분한 상원에서 통과된 법안이 민주당이 다수인 하원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진보 중도가 갈등 중인 민주당의 내분이 자국 산업 진흥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국 정부는 과거 반도체 산업의 최강자였던 인텔에 의존하는 모습이다. 인텔은 자사의 반도체 공정 전문가였던 팻 갤싱어를 최고경영자(CEO)로 세우고 200억 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위탁생산 시설 건립에 나서겠다고 나섰다. 과거 D램 업체에서 개인용 컴퓨터(PC)와 기업용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는 기업으로 변신했던 인텔은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모바일 시대 대응에 뒤지며 삼성전자, AMD 등 후발주자에 뒤지는 수모를 겪어 왔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인텔이 공격적으로 투자해도 이미 미세 공정에서 앞서나간 삼성전자, TSMC와 비교해 인텔이나 글로벌파운드리와 같은 미국 기업들은 2세대나 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를 인식해 인텔도 정부의 지원을 바라고 있지만 지원 법안은 의회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든 정부의 가장 골칫거리는 미·중 갈등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반도체 부족 현상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세계 기업들, 특히 중국 기업들이 반도체 재고 비축에 나서며 꼬인 글로벌 공급망이 코로나19를 계기로 붕괴해버렸다.

반도체 생산이 중국 인근인 대만과 한국에서 이뤄진다는 점은 더욱 뼈아프다. 전 세계에서 가장 지역적 갈등 수위가 높은 대만과 한국이 전 세계 반도체 수탁생산과 D램 생산을 책임지고 있다.

북한이 한국의 반도체 공장을 공격하거나 중국이 대만을 공격해 TSMC를 장악하면 현 수준의 반도체 공급망 붕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전 세계적인 위기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 한국과 대만을 사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D램의 경우 미국에서도 생산이 되지만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TSMC의존도는 절대적이다. 미국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연임을 통해 1인 독재를 확실시하며 대만 압박에 나서는 상황을 더 좌시할 수 없다. 타임도 TSMC 문제가 ‘바이든 정부의 두통거리’라고 전했다.

백종민 아시아경제 뉴욕특파원 cinq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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