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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세상읽기] '아름다운 시절' 그리고 SKC

백두대간 이광모 감독이 시나리오 ‘아름다운 시절’을 들고 본격적으로 투자자를 찾아 나선 해는 94년. 대기업과 창업투자사가 앞다투어 한국영화 투자에 열을 올리는 때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시나리오에는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하나. “돈이 안된다”는 것. “예술성이나 작품의 가치는 고려대상이 아니다”는 태도였다.

그런 태도는 그 이듬해 초 ‘아름다운 시절’이 사상 처음 미국 하틀리- 메릴 시나리오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는 기염을 토해도 바뀌지 않았다. 다시 한번 대기업을 순례하고 나서도 영화로 제작될 희망이 없어진 이광모는 허탈과 좌절을 달래기 위해 단전호흡을 배웠다. 그러던 그해 여름 SKC가 조용히 다가와 투자를 제안했다. 10억원. 이광모 감독은 많은 돈은 아니지만 영화를 만들기에는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광모로서는 ‘제작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개봉일자를 못박지 않는다’는 조건까지 받아들여 준 것이 더 고마웠다.

SKC로서는 모험이었다. 비록 시나리오는 잘 썼지만, 연출력은 증명이 안된 신인에게 10억이란 돈은 마음대로 하라고 맡긴 셈이니. 그러나 나름대로 몇가지 계산이 있었다. ‘우리는 다른 대기업과 달리 이런 작품에도 투자한다’‘국내보다는 해외시장을 개척해 보자’‘SKC와 백두대간 공동제작이니 이 작품 성공하면 이광모의 이름과 함께 회사이름도 알려져 장기적으로 영상산업 수출에 큰 도움이 된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지난해 칸영화제 초청에 이은 도쿄, 데살로니키, 하와이 영화제에서 연속 수상으로 주목을 받았고 그에 힘입어 해외배급도 이뤄질 전망. 요즘 흔히 말하는 합리적 투자였다.

‘아름다운 시절’을 찍으며 이광모는 돈이 모자랐다. 한장면 한장면에 조금이라도 모자람이 있으면 고치고 다시 하고 하다보니 시간도 경비도 많이 들었다. 이미 IMF한파가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 영상산업을 포기할 기미를 보인 SKC는 “추가지출은 절대 불가”였고 다른 투자자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자기 돈 2억5,000만원을 썼다. 그는 그 돈으로 꼼꼼하게 후반작업을 했다. “회수는 기대하지 않았다. 나의 영화, 나의 미래에 대한 장기투자라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이익도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국내 개봉에서 ‘아름다운 시절’은 두 달(98년 11월21일~99년 1월22일)동안 2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여기에 비디오 판매량까지 예상하면 SKC로서는 투자비 거의 전부를 건진다. 이광모 역시 해외영화제에서 받은 상금 1억600만원으로 손해를 줄인 셈. 여기에 앞으로 이뤄질 해외배급을 감안하면 오히려 흑자를 누릴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명예도 얻고, 돈도 얻는 기분좋은 투자.

문제는 그 마무리였다. 광고 마케팅을 맡은 SKC는 영화를 개봉하면서 ‘도쿄영화제 금상’수상 사실을 넣어 새로 포스터를 만들지 않았다. 책정된 비용(2억원)을 다썼기 때문에 더 이상 지출할 수 없다는 것. 여기엔 준비를 다 해놓고 감독의 완벽주의 때문에 ‘아름다운 시절’의 개봉이 6개월이나 늦어져 같은데 돈을 두 번 쓰게 한다는 불만도 있었다. 백두대간이 자체적으로 새로 만들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결국 영화는 수상사실을 넣지 않은 포스터를 붙이고 개봉했다. 절약된 돈은 겨우 100만원.

그것을 넣고 안 넣고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넣었다고 관객이 더 늘어난다는 보장도 없으니 이 어려운 시대에 100만원이라도 아끼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대신 자부심의 한 조각은 포기했다. IMF한파가 우리에게 바로 눈앞만 계산하도록 강요한다. 그렇다고 미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더 초라해질 것이다.

이대현· 문화과학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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