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출발언이냐 의도된 독자목소리냐. 김종필국무총리의 최근 몇가지 발언을 놓고 그 진의와 배경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김총리 발언이 화제거리가 되는 것은 몇몇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그의 견해가 외형상 김대중대통령의 뜻이나 정부 방침과는 어긋나 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달 말 일본에서의 아시아통화기금(Asian Monetary Fund, AMF)창설문제와 관련된 발언. 김총리는 지난 11월28일 일본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각료간담회에 앞서 오부치 게이조 일본총리와 회담에서 갑자기 이 문제를 거론하고 나왔다.

김총리는 이 자리에서 “아시아 전체의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아시아통화기금을 만드는 것에 대해 서로 협의할 때가 온 것 아니냐” 고 물었고 오부치 총리는 “잘 알겠다” 고 대답했다.

아시아통화기금은 지난해 9월 홍콩에서 열렸던 국제통화기금(IMF)총회에서 아시아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일본이 제안했으나 미국과 유럽 등의 반대로 무산됐던 사안. 당시 일본은 한달전 태국에서 발생한 외환위기가 아시아 각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일본이 500억달러, 다른 아시아국가들이 500억달러 등 총 1,000억달러를 출자해서 AMF창설을 제안했었다.

큐슈대 강연 “아시아는 일본이 이끌어가야”

이에대해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국가들은 환영하는 분위기였지만 결정적으로 미국과 IMF가 강력히 반대했다. 여기에는 일본의 AMF창설 제안이 ‘엔(¥)체제’ 로 아시아 경제권 장악을 노리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IMF는 아시아가 ‘딴 살림’ 을 차릴 것이 아니라 IMF를 강화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아시아 각국에도 이익이라는 논리를 폈고 우리나라는 이를 따를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비록 무산되긴 했지만, 일본이 아시아 경제주도권 확보 차원에서 AMF에 여전히 미련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런 상황에서 김총리가 돌연 아시아통화기금의 창설을 제안하고 나섬으로써 일본쪽은 뜻하지 않은 ‘원군’ 을 만난 셈이 됐다.

김총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날 큐슈대 강연에서 이 문제를 더욱 노골적으로 거론하고 나왔다. 그것도 낭랑한 톤에 유창한 일본말로.

이날 그는‘한일관계의 어제와 내일’이라는 제목의 명예박사학위 수여 기념특강을 통해“IMF가 2차대전후 세계 경제질서 안정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해온 것은 사실이나 그 문제점도 지적할 수 밖에 없다”면서“지역내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세계기구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지역내에서 협력을 통해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아시아 국가들의 여러 여건상, 현실적으로 일본이 앞장서서 발의하고 이끌어야 한다”며“일본이 아시아의 리더로서 재원도 부담해 가면서 앞장선다면 우리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일본 언론들은 김총리가‘3,000억달러의 재원규모까지 제시했다’며 일부 확대보도까지 하면서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다.

반면 청와대와 정부내에서는 김총리 발언을 즉각 현실성 없는 총리의 개인견해로 치부했다. 김총리가 자신의 위상제고를 의식해 함부로 내뱉은 일종의 돌출발언이라는 시각이다.

정부입장 고차원적으로 대변했을 수도

이와는 달리 김총리의 AMF발언이 사실은 정부쪽 입장을 고차원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재경부 고위관계자는 일본 현지에서“총리실쪽과 공식적인 의견조율은 없었다”면서도“다만 정부도 AMF가 성사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갖고 있다”고 말해 김총리 제안과 관련한 공감대 내지 내부적인 의견조율이 있었음을 암시했다. 이 관계자는“비록 아쉬움은 있지만 우리가 많은 돈을 내서 주도할 입장은 아니므로 일단은 IMF입장을 따르는 것이 정부 방침”이라며 “당장 성사되기는 힘들지만 중장기적인 기대는 할 수 있는 것이며 총리는 지도자로서, 원대한 방향을 얘기한 것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말은 정부가 미국 입장을 고려할 때 공식적으로 거론하기는 곤란하지만 김총리 구상에 암묵적으로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경우 김대중대통령은 미국과 IMF의 입장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김총리는 일본 입장을 지지하는 식의 역할분담을 구사함으로써 미국의 과도한 압력을 상쇄시킬 수 있는 효과가 있다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이규성장관도 문제의 특강연설문을 미리 읽어본 뒤“그 정도면 문제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었다는 후문이다.

김총리의 독자적인 목소리는 대통령 자문정책기획위원장인 최장집교수의 역사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진다.

김총리는 최교수의‘6·25전쟁관’이 논란이 되자 11월8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오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기자들에게 먼저“여러분들은 최장집교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운을 뗀 뒤“나는 참전했던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면서 “주변에서 연(然)하는 사람들이 문제이고 분홍빛 사람들이 문제”라고 언중유골의 일침을 가했다.

일정부분 독자목소리로 확실한 차별화 시도

김총리는 또 같은달 13일 국회대정부질문 답변에서 “국립묘지의 수십만 영령들이 이런 소리를 소화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라며 “최위원장의 견해는 일반 국민의 견해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시비가 가려지기를 바란다”고 거듭‘소신’을 밝혔다.

그는 최교수의 거취에 대해서도 13일에는 “해임여부는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판단할 사항”이라고 했다가 다음날에는“본인 스스로 결정하면 된다”고 말했다. 총리가 이정도로 얘기했다면 대통령이나 최교수 본인에게 사퇴를 권유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이어 11월4일 한국발전연구원(이사장 안무혁) 주최 조찬강연회에서 “6·25에 관한 최교수의 생각은 옳지 않다”고 단언하면서“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주장이 사라지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고 계속 수위를 높였다. 그는 또 “민주화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서는 이런 현상들을 민주주의의 포용성이란 이름아래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김총리의 이같은 발언들의 배경에는 대북정책에서만큼은 자신의 보수적 색깔을 소신껏 밀고 나가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또한 금강산관광 등 현정부의 일관된 햇볕정책의 기조아래서도 남북관계 만큼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뇌관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누군가는 적당한 ‘브레이크’역할을 해야한다는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총리는 결국 공동정부의 제2인자로서 매사에 김대통령과 보조를 맞춰나가되 일정부분에서는 독자목소리를 통한 확실한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내년의 내각제개헌 공론화 등에 대비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홍윤오·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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