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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국역] "고전의 멋과 맛 살리는게 어려워요"

서울 구기동 민족문화추진회 3층 국역실.

선종순(41·여) 전문위원이 노트북에 쳐넣은 번역문을 다듬고 있다. 주변 서가와 책상 곳곳에는 중국 일본 한국에서 나온 각종 사전류가 무수히 널려 있다. “원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우리 말로 원문의 맛을 잘 살려 옮겨야지요. 어렵지만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일입니다.”

9년전 선위원이 처음 국역 일을 시작했을 때는 원고지에 육필로 썼다. 그러다 컴퓨터가 등장했고 지금은 펜티엄급 노트북으로 작업한다. 원고 쓰고 치는 시간이 많이 단축됐고 검색이 특히 편리해졌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 국역을 하는 인력은 20여명. 대학에서 한문학이나 중문학 국문학 등을 전공하고 이곳에서 10년 가까이 연수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경우에 따라 외부 교수 등에게 번역 위촉을 하기도 한다. 외부 인력은 30명 정도.

한문 고전 국역은 서양어로 된 문헌을 번역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한문 특유의 축약성과 함축성 때문에 글자 한자 한자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잘못하면 명사를 동사나 접속사로 오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고사나 관용적 표현을 모르면 전혀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문학 등 동양사 전반에 걸친 해박한 지식이 없으면 읽기조차 불가능한 글도 많다.

“항상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한 문장 한 문장을 대합니다.” 박소동 국역실장은 늘 이런 마음으로 번역에 임한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의 문집인 ‘완당집’에 나오는 시 한 구절을 잘못 번역한 것이 10년도 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한문 고전을 수록한 CD롬을 검색하다 마침내 해결했습니다. 아직 완당집 개정판에 수록하진 못했지만 개정판을 낼 때 꼭 바로잡을 겁니다. 86년이었을 겁니다. 돌아가신 한학의 대가 신호열 선생님이 완당집을 번역하시는데 제가 주석 내는 일을 돕고 있었어요. ‘우재유허비(尤齋遺墟碑)’라고 추사가 숙종 15년(1689년)에 제주도로 귀양온 당대의 대학자 송시열을 기념해 세운 비를 보고 지은 시였습니다. 추사 자신도 제주에 귀양온 처지라 감회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직역하면 ‘생강 심던 그 해에는 지금도 눈물 짓네’(至今彈淚種薑年·지금탄루종강년)입니다. 문제는 생강을 심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온갖 사전을 다 뒤져도 그런 표현은 없었습니다. 대학자인 신 선생님도 모르겠다시니…. 그래서 그냥 그렇게 옮겨놓고 말았지요. 그런데 최근 ‘종강’이란 표현의 용례를 찾았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죄를 짓고 귀양간 사람이나 그 가족에게 생강 심고 양 치는 천한 일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생강 심는다는 표현은 귀양살이 하는 처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구절은 (송시열이) 귀양살이 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는 뜻이지요. 이런 용례가 나오면 참 막막합니다.”

이처럼 어지간한 사전에는 나오지도 않는 관용적 표현들이 한문 고전에는 부지기수다. 또 우리식 한문에만 나오는 표현도 만만치 않다.

“예를 들어 죄인을 문초한 기록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필자박지(必字縛之) 장석격지(長石擊之).’직역하면 ‘그(죄인)를 필자처럼 묶고 긴 돌로 쳐라’입니다. ‘필자’처럼 묶는다는 게 무슨 말인가? 이 대목은 신문관이 한 말을 기록자가 한문으로 옮긴 것입니다. 이런 때는 처음에 우리 말로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필(必)자는 초서로 쓰면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옆으로 사람을 꽁꽁 묶는 모양이 됩니다. 장석(長石)도 짧은 돌과 상대되는 긴 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말 ‘짱돌’을 옮긴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죄인을 꽁꽁 묶고 돌로 쳐라가 됩니다. 이렇게 시간을 뛰어넘어 옛 사람과 이심전심 하지 않으면 해석이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전 국역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젊은 세대의 감각에 맞는 현대적인 번역문을 구사하는 것이다. 80년대까지 나온 고전 국역서들이 상당부분 한자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옛날 식 표현이 많아 읽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77년에 민추에서 처음 번역한 ‘삼봉집(三峯集·조선 건국의 주역 정도전의 문집)’ 1권 302쪽을 보자. 정도전이 친구 이언창의 호 죽창(竹窓)에 대해 쓴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다만 대(나무)가 봄에는 새들에게 알맞아 그 울음소리가 드높고, 여름에는 바람 부는 데 알맞아 그 기운이 맑고 상쾌하며, 가을이나 겨울에는 눈과 달에 알맞으며 그 모양이 쇄락합니다. 그리하여 아침 이슬, 저녁 연기, 낮 그림자, 밤 소리에 이르기까지 무릇 이목에 접하는 것치고는 한 점도 진속(塵俗)의 누(累)가 있는 것이 없습니다.” 대나무에 눈과 귀가 있다면 그 눈귀로 접하는 모든 것이 하나도 더러운 세속의 때가 묻은 것이 없다는 말이다. ‘진속의 누’ 운운하는 표현이 젊은 독자들에게는 또 다시 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고사숙어와 같다.

박 실장은 “요즘은 독자들이 알기 쉽게 가급적 풀어쓰려고 노력한다”며 “다만 전문적인 용어와 원문의 표현을 살리면서 그 멋과 맛을 100% 전달하기가 참 어렵다”고 말한다.

이광일·주간한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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