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물이 틀림없다”,“무슨 소리냐, 성(性) 의학서다”

요즘 서울지검 형사부 소속 검사들사이에 때아닌 외설논쟁이 뜨겁게 불고 있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명문대 교수겸 의학박사가 외국에서 발간된 성생활 지침서를 번역해 국내에 소개한 한 권의 책을 놓고 검찰이 고심에 빠진 것이다. 아직까지 이런 종류의 성 지침서에 대한 사법처리 전례가 없어 검찰 내부에서조차 찬반 양론이 팽팽한데다 자칫 기소할 경우 제2의 ‘마광수 교수’파문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서적은 현재 S출판사가 시중에 판매중인‘성의 즐거움’(Joy of SeX). 289쪽의 이 책은 미국 UCLA 신경정신과 교수를 지낸 의학박사 알렉스 컴포트씨가 72년 펴낸 책으로‘성에 대해 가장 솔직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미국에서 900만부 이상, 전세계에서 수천만부나 팔린 베스트셀러다. 이 책은 특히 발기부전 조루 여성불감증 등에 대한 이론과 치료법을 자세하게 기술한데다 부부들의 성행위에 대한 대담한 묘사및 삽화 등으로 외국에서도 한 때 논란이 제기됐던 책이다. 한마디로 이 ‘성서(性書)’는 외국에서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것이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명문 S대 의대출신으로 성 칼럼니스트이자 S대 외래교수인 설모씨가 지난해 7월 이 책을 번역, 국내에서 출간하면서부터. 설씨는 96년1월부터 국내 일간지에 성의학칼럼을 연재해온 의학박사로, 진솔한 성표현과 상담으로 국내에 성의학 돌풍을 몰고 온 장본인이다. 87년 경찰병원 신경과 정신과장을 역임한 그는 의학계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편이다.

이 책이 출간되자 30여개 시민단체들은 “성수치심을 유발시키는 음란물”이라며 거세게 반발, 지난해 9월 설씨를 음란문서판매 혐의 등으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이 사건은 곧바로 음란및 퇴폐행위를 집중단속하는 전담부서인 서울지검 형사3부에 배당됐다. 그러나 1년여간 수사검사가 3명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검찰은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수사검사들 사이에서 유례가 없을만큼 치열한 설전(舌戰)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은 일부 검사들은 “설씨가 성행위 장면을 묘사한 삽화중 난삽한 장면들을 상당부분 삭제했다고 하지만 성적수치심을 일으킬만한 내용이 많아 선량한 사회풍속에 위배된다”며 형사처벌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그 근거로 마광수 교수와 소설가 장정일씨의 외설시비 사건을 들고 있다.

마교수는 지난 92년 소설 ‘즐거운 사라’를 저술, 발간하면서 변태적인 성행위와 혼음·동성연애 등을 노골적으로 묘사, 건전한 사회도덕과 미풍양속을 해친 혐의로 구속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법원은 “오늘날 각종 매체를 통해 성적표현이 대담, 솔직하게 이뤄지고 있고 다양한 성표현 등이 방임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 해도 정상적인 성적 정서와 선량한 사회풍속을 침해하고 타락시키는 정도의 음란물까지 허용될 수 없다”며 유죄를 확정했다.

장씨 역시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시중에 유통시킨 혐의로 지난 96법정구속돼 사법처리를 받았다. 당시 법원은 “장씨가 이 소설이 성에 대한 인습과 가부장적 권위에 도전하는 포르노그라피적 순수문학 작품이라고 주장하나 38세 유부남과 18세 여고생이 벌이는 비정상적인 성관계, 집단 성교장면 등 변태적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점에 비춰 죄가 인정된다”며 “이런 스타일의 소설을 쓰는 다른 작가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실형을 선고한다”고 유죄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검찰 간부를 포함한 또 다른 검사들은 “무슨 소리냐. 이 책은 기본적으로 성과 관련된 의학적 지식을 담은 책이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성적흥분을 느껴 실제 현실에서 도착적인 행동을 하리라고 보이지는 않는다”고 맞받아치고 있다. 또 이 서적이 마교수나 장씨가 쓴 소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의학서적이라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 8월 한 수사 검사는 설씨를 음란문서판매 혐의 등으로 기소한다는 내용의 공소장까지 작성, 검찰 간부에 결재받으러 갔다가 핀잔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검사는 차장검사와 부장검사, 수사검사, 공판검사 4명이 참석하는‘공소유지위원회’를 열어 기소 여부를 심도있게 검토하는 방안까지 나름대로 구상하다 끝내 무위로 그쳤다는 후문이다.

다른 형사부 소속 검사는“이 사건은 기소해도 사회적 반향이 크겠지만 무혐의 처리해도 문제가 커진다. 검찰이 무혐의처리할 경우 이와 유사한 서적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올텐데 뒷감당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며 사건처리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당사자인 설씨 또한 이 책을 일반적인 음란물과 똑같은 서적으로 재단한 시민단체들의 시선에 상당히 억울해하는 눈치다. 이 책을 출판하기까지 자신이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책 서문에는 “책을 출판할 당시 외설시비를 우려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자문도 구했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은 의학적 지식을 알리는 것이고 미성년자에게 판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체적으로 한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 삽화내용중 일부를 과감히 삭제했다”는 설씨 자신의 회고가 씌여져 있다. 또 표지 겉면에는‘만 24세 이상 성인에게 판매’라는 희귀한 딱지까지 붙여놨다.

설씨는“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돼 베스트셀러가 된 지 벌써 30여년이 돼 가는 이 책이 어떻게 음란물이냐. 이런 성지침서보다는 오히려 폭력물 영화나 음주가 훨씬 해악이 크다. 또 돈만 있으면 쉽게 여성을 구할 수 있는 국내 성생활 풍토가 더 문제”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는 차라리 “법원에서 심판을 받겠다”며 기소해달라고 검찰에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사회가 점차 개방화, 다양화되면서 이처럼 성생활을 대담하게 묘사한 성 지침서들이 최근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며 “이 사건이 어떻게 처리될 지 아직 모르겠지만 앞으로 다른 서적들의 음란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철·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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