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의 권력이동(파워 쉬프트)이 감지되고 있다.”

여권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최근 자주 나오는 얘기다. 골자는 새정부출범초부터 줄곧 청와대비서실에 놓여있던 권력의 축이 최근 열린 청와대 여야 총재회담을 계기로 국민회의쪽으로 옮겨오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그 배경은 무엇일까. 이것이 가져올 파장은 또 어떤 것일까. 특히 당과 청와대간의 파워쉬프트여부는 여권의 ‘영원한 숙제’ 일 수도 있는 신·구 주류간의 파워게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어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선 ‘파워쉬프트’ 의 실체부터 따져보자. 적잖은 당측 인사들은 이 부분에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이다. 한마디로 “김대중 대통령이 최근 부쩍 당에 힘을 실어주는 추세” 라는 의견이다.

이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사례 몇 가지. 첫째는 여야 총재회담이다. 회담의 성사과정이 ‘주(主)당 종(從)청와대비서실’ 의 양상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회담을 추진하게 된 계기 자체가 김 대통령이 당측으로부터 총재회담 필요성을 건의받고 조대행에게 “당이 맡아서 해보라” 고 지시한 것이었다.

당 주도로 이루어진 여·야 총재회담

이후 회담 추진은 전적으로 당 주도로 이뤄졌다. 창구는 한화갑 총무와 한나라당 박희태 총무였다. 도중에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창구를 신경식 사무총장으로 바꿈으로써 자연스럽게 국민회의 상대도 정균환 총장으로 변경됐다.

회담의 전제조건, 즉 이총재의 세풍·총풍 사과문제가 모두 이들 라인에서 조율되고 결판났다. 회담은 조대행이 총장간의 협상결과를 가지고 직접 청와대로 김 대통령을 찾아가 재가를 받음으로써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이강래 정무수석이 밀접하게 당과 의견을 교환했지만 전반적으로 청와대 비서실은 주류에서 배제됐다. 당측에서 “거의 다 됐다” “다 됐다” 는 얘기가 흘러나올때까지도 청와대 실무진들사이에서는 줄곧 회담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가 흘러나왔던게 그 반증.

이에앞서 회담의 필요성 자체를 놓고서도 당과 청와대는 다른 목소리를 냈었다. 당측은 “국회 등 정치를 현장에서 풀어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총재회담을 통해 경색정국을 풀고 정국을 조기에 정상화해야 한다” 는 목소리가 높았다.반면 청와대는 “아쉬운 것은 우리가 아니라 저쪽” 이라며 세풍, 총풍문제 등과 관련해 강경기조를 유지해 왔다. 심지어 일부 청와대 관계자들은 “세풍, 총풍으로 힘이 빠져있는 이회창 총재를 괜히 총재회담을 통해 살려줄 필요가 있느냐” 고 반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떻든 총재회담이 성사됨으로써 정국의 축은 국회로 돌아오고 정치는 복원됐다. 여전히 우여곡절은 많지만 국회를 중심으로 정치는 돌아가고 있다. 자연히 국민회의의 활동공간이 넓어질 수 밖에 없다.

뒤바뀐 상황, DJ 당에 힘 실어줘

총재회담과 함께 정책적인 측면에서 김 대통령이 김원길 정책위의장을 직접 찾아 여러 당부를 하고 있는 것도 심상치않은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김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11월25일 김원길 의장을 청와대로 불러, 방송법개정과 재벌개혁문제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 대통령이 국회에서의 입법을 개혁수단으로 삼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그 역할을 국민회의에 맡기겠다는 의지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는 평가이다.

그러면 총재회담이전의 상황은 어땠을까. 한마디로 압축해 “청와대는 기가 살고 국민회의는 기가 죽어 있었다” 고 표현할 수 있다. 거리는 여러 가지다. 가장 두드러진게 정치권 사정문제. 청와대의 김중권 비서실장, 박지원 공보수석, 이강래 정무수석 등이 연달아 정치인 사정과 관련해 메가톤급 뉴스를 뿌리고 있을 때 당의 핵심당직자들은 정보가 없어 끙끙대고 있었다. 정대철 부총재의 구속사실을 철저히 모르고 있었던게 대표적인 사례.

당측은 언론에서 사정대상자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조대행 정 총장 한 총무 등이 청와대 관계자, 검찰쪽에 전화를 걸어 사실을 확인하기에 바빴다. 한 핵심당직자는 대통령에게 “당에도 정보를 좀 달라. 야당과 대화를 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니 답답하다” 고 호소했다가 “이 사람아 나도 모르네. 괜히 간섭하지 말라” 고 면박을 당한 일도 있었다. 반면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비서관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김중권 비서실장은 풍부한 ‘정보의 바다’ 에서 헤엄치면서 언론에 뉴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세풍 총풍사건의 강공드라이브도 청와대 몫이었다. 당은 청와대의 리드를 받아 쫓아가기에 급급했었다고 봐야 한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들사이에서 “세풍 총풍은 아직 끝난게 아니다” 는 주장이 나오고 있을 때 당에서는 “이제 끝난 것 아닌가” 라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이밖에 의원, 단체장 영입문제도 청와대측의 ‘기여’ 가 컸다. 특히 영남지역 기초단체장들의 무더기 입당에 이 지역에 연고를 갖고 있는 김중권 실장의 활약이 컸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김 대통령이 광복절에 야심작으로 내놓은 제2건국운동도 청와대의 몫이다. 뒤늦게 국회 예산심의과정에서 문제가 되자 국민회의는 뒷처리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이밖에 각종 개혁조치의 핵심은 모두 청와대 주도로 이뤄졌다. 국민회의는 “당도 개혁해야 한다. 당이 개혁의 중심이 돼야 한다” 는 김 대통령의 언급이 있자 부랴부랴 당내에 개혁추진위를 만들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활동실적은 없는 상태다.

당 핵심인사들도 ‘자기 목소리’

이같은 상황변화를 과연 ‘권력이동’ 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에대해 객관적인 제3자들은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당이 상당히 위상을 회복한 것은 사실” 이라는데 공감한다. 정권초기 거의 무기력상태에 가까웠던 당이 총재회담후 정치복원을 계기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또 당의 핵심인사들이 최근들어 부쩍 자기 목소리를 많이 내고 있는 것도 권력이동의 한 단면이라면 단면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화갑 총무가 사정의 칼날이 여전히 서슬퍼렇던 상황에서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나라당 김윤환 전부총재의 사법처리문제에는 정치적 고려가 있어야 한다” 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인 예. 김원길 의장이 포항제철 분리매각문제 등에 대해 거침없이 소신을 피력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띤다.

그렇다고 현재의 상황을 ‘당측 구주류의 청와대측 신주류 제압’ 이라고 까지 확대해석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 오히려 “정권초반 힘이 쏠려있던 구주류와 침체기에 있었던 신주류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고 있는 수순” 이라고 보는 시각이 더 타당할 것 같다. 특정인에게 힘을 몰아주지 않는 김 대통령의 용인술에 비춰보면 이런 해석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이에비해 내년 정국의 제1화두가 정치권에서의 내각제 개헌여부, 정계개편여부가 될 것이라는 점까지 감안해 본다면 당분간 당측 구주류의 이니셔티브 장악이 대세를 이룰 것이라는 관측도 만만치 않아 귀추가 주목된다.

신효섭·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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