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처럼 흩어져 숨죽이고 있던 한나라당내 비주류의 표정에 생기가 돌고 있다. 이회창총재의 최대 동맹군었던 김윤환전부총재가 이총재와의 결별을 선언, 이른바‘비주류 연대’참여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대구·경북(TK)을 중심으로 무시못할 세를 형성하고 있는 김전부총재의 합류는 소수파에 머물던 비주류에게는 천군만마가 아닐 수 없다. 비주류 진영에서 벌써부터 “이젠 우리가 다수파”“어느 때건 대의원 3분의 1의 서명을 받아 전당대회를 소집하면 이총재는 끝”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김전부총재는 고향(구미)방문 전에만해도 ‘이총재와 거리두기’에 비중을 뒀다. 그러나 그는 현지의 지역민심을 확인한 후 이총재와의 결별을 공식화했고 12월5일 귀경하자 마자 ‘반 이회창 연대’에 동참의사를 밝히는 등 이총재에 대한 공세수위를 점차 높이고 있다.

김전부총재는 “이총재와는 더 이상 타협도 화해도 없다”고 못박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야 한다”며 비주류 노선을 거듭 분명히했다. 그는 “지방에 가있는 동안 이한동전부총재로 부터 여러차례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며 “(비주류 의원들쪽에서) 연락이 오면 못만날 이유가 없다”고 말해 비주류 연대를 실행에 옮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같은 김전부총재의 적극적 태도는 그동안 물밑에서 조심스럽게 진행돼온 나머지 비주류측 인사의 세결집 시도에 상당한 역동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르면 금주중 ‘범 비주류’의 회동이 이뤄질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은 이런 맥락.

“이총재로는 안된다” 공감대 형성

이에앞서 8·31전당대회에서 세대교체론을 주창했던 서청원 강삼재 강재섭의원 등 3인은 1일 회동, “이회창으로는 안된다”는 공감대를 재확인했고 이전부총재는 경기도지역 의원들과 모임을 가진데 이어 12월2일 서의원과도 만나 공조를 모색했다. 이들은 총풍사건이 다시 불거지자 “이총재가 있는한 당이 계속 여권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이총재를 압박했다. 또 이세기 정창화의원 등 다선 중진들과도 연쇄 접촉하며 반 이회창 기류 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각기 나름의 꿈을 갖고 있지만 이총재가 버티고 있는 한 ‘당외의 선택’을 하지 않으면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 처지라는 것. 이전부총재와 서전총장은 지난해말 대선을 전후해 노선차이와 감정문제로 이총재와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게 중평이고, 두 강의원에게 이총재는 세대교체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할 벽이다. 대여(對與) 강경드라이브의 와중에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던 이들은 김전부총재의 가세로 마침내 ‘공동의 적’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기세다.

이들 외에도 공식적으로 비주류 참여를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주류의 한 축이던 이기택전총재대행도 이총재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이전대행은 “한번 총재가 됐다고 영원히 총재라는 태도로 당운영을 하면 오류를 범한다”며 “야당총재는 전당대회 대의원들이 뽑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부총재 인선과정에서 이총재가 자신을 ‘특별 대우’하지도 않았고 자파 인사 2명을 부총재단에 포함시켜 달라는 요구도 묵살한 데 따른 반작용인 셈이다. 지구당 위원장 계파분포상 이총재, 김전부총재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지분을 갖고 있는 이전대행 마저 비주류로 돌아선다면 이회창체제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이총재의 연대파트너는 김덕룡부총재가 유일하게 남지만 현재까지 김부총재도 이총재를 적극 앞장서 보호해 주겠다는 분위기는 아니다.

복잡한 구성, 집단행동은 어려울 듯

그러나 이들 반 이회창 진영의 결집 움직임이 이른 시일내에 당내외 현안에 대한 ‘집단 행동’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만큼 구성원들의 입장이 복잡다기하고 조율해야 할 사안도 적지 않다. 우선 김윤환전부총재부터가 서두르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의 한 측근은 이와 관련, “김전부총재의 언급은 당장 세규합에 나서겠다는 의미라기 보다 비주류의 길을 걷겠다는 원칙론을 개진한 것”이라며 “허주(虛舟·김전부총재의 아호)로선 성급하게 행동할 입장이 아니다”고 말했다. 비주류 연대 추진에 앞서 지역정서 수렴과 TK의원 아우르기가 우선돼야 하는데다, 지나치게 앞서가게 되면 여론의 눈총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의미였다. 또 김전부총재로선 자신의 ‘비리 혐의’에 대한 여권의 처리향배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점도 그의 발길을 더디게 하는 요인이다. 김전부총재의 행보는 여권을 향한 제스처의 성격도 농후한데, 여권의 의중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나갈 경우 스스로 운신폭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여기에 그동안 껄끄러운 관계였던 이한동전부총재와 하루아침에 다시 뭉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다는 판단도 했음직하다.

나머지 비주류 인사들도 김윤환전부총재의 ‘장래’가 관심거리다. 만에 하나 김전부총재가 잘못되면 그의 영향력아래 있던 TK의원 상당수가 이총재쪽에 흡수될 공산이 크다. 비주류 연대의 강력한 동인이 사실상 사라져 버리는 셈이다.

이총재·비주류 싸움 이제부터 시작

이총재의‘정통성’도 비주류가 공세의 명분을 잡기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래도 DJ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이회창”이라는 당안팎의 인식이 아직은 위력을 발휘하고 있어서다. 이를 무기로 이총재가 당초 당직을 거부하던 TK의원들을 각개격파를 통해 끌어들였듯이 밑으로부터 비주류를 허물 수도 있다. 여기에 이총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지만 비주류에 우호적이지도 않은 김덕룡 부총재가 이총재의 손을 들어줄 경우 비주류는 ‘막다른 골목의 선택’을 강요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한나라당의 현 상황은 이총재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될 수도, 비주류의 결속 움직임이 ‘찻잔속 태풍’에 그칠 수도 있는 두가지 가능성을 모두 안고 있다. 이총재와 비주류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유성식·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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