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으로 점철된 역대정권과 재벌간의 공생관계는 이제 ‘12·7 재벌빅뱅’ 으로 종막을 고하고 있다.

한국재벌은 60년대 3공초기 불균형성장전략에 따라 정부의 특혜자금으로 덩치를 키워온 이래 거대한 공룡집단으로 성장했다. 재벌들은 우리경제에 뚜렷한 공과를 남겼다. 재벌들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전경련에 따르면 30대그룹은 97년에 54조2,726억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전체 국민총생산(GNP) 416조179억원의 13.0%를 기록했다. 5대그룹이 전체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43.7%로 거의 절반이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주력제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된 것도 재벌의 선단식경영에 기인한 바가 컸다는 분석이다.

선단식경영의 해체와 소유·경영의 분리

국민의 정부는 12·7 재벌빅뱅을 통해 재벌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선단식 경영의 해체와 소유·경영의 분리를 재벌개혁의 2대과제로 선정하고, 숨가쁘게 몰아부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한국경제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공룡’ 과도 같은 재벌을 개혁하기위해선 정경유착의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실련 유종성 사무총장은 “행정규제와 고비용정치구조가 기업코스트를 높여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며 “특히 고비용정치구조 타파를 위해 정치자금의 지출을 양성화하되 개인과 단체의 선거자금 기부액을 제한하고, 선거자금기부자에 대한 실명제를 실시하여 선거자금흐름의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고 말했다. 정부도 ‘인치’ 가 아닌 투명한 제도에 의한 경제정책을 운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필상 고려대교수는 “재벌들도 로비등에 의존한 구시대적 경영관행에서 벗어나 실력에 의한 정도경영으로 국제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12·7 대합의’ 로 한국의 재벌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재벌이 ‘독립된 기업의 연합체’ 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키운 재벌을 여야정권교체를 실현한 김대중 대통령이 정리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12·7 대합의’ 의 기본목표는 재벌의 금융독점, 은행빚에 의존한 ‘대마불사’ (大馬不死)의 관행, 족벌경영 등 재벌체제의 퇴출이다. 정부와 재계의 합의사항은 상당한 수준의 재벌개혁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새 정부 출범후 도입된 각종 제도적 장치는 재벌체제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며 이는 ‘12·7 합의’ 의 골자를 이루고 있다. 재벌총수의 독단경영, 이른바 ‘황제경영’ 을 가능케했던 인적 구성인 기조실과 회장실을 정리토록 한 것을 비롯, 재벌에 대한 각종 견제시스템을 도입했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이에 대해 “야생마를 길들이기 위한 울타리 설치는 이미 끝났다” 며 “평생동안 울타리 허물기에 주력해왔던 재벌들은 앞으로 이에 적응해야 한다” 고 밝혔다.

문어발식확장 불가능, 경쟁력 없으면 도태

소액주주의 권한 강화(5월25일), 사외이사제(4월1일), 결합재무제표 도입(99사업연도), 국제회계기준 도입(99년1월), 외부감사에 대한 감시 강화(4월), 집단소송제 도입(2000년1월), 누적투표제·사실상이사제(상법 개정중) 등이 바로 재벌해체를 위한 수단들이다. 이 장치들이 가동되면 재벌 총수들이 소집해온 ‘사장단회의’ 는 불법모임이 되고 총수들이 이사가 아닌 기업에 관여할 경우 손해배상 대상이 된다.

문어발식 확장도 불가능해졌다. 정부는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이 완전 해소되고 결합재무제표가 도입될 경우 우량계열사의 부실계열사 지원은 불가능해진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감시를 대폭 강화하고 나섰다. 재벌기업이라도 자생력이 없으면 더이상 생존할 수 없게됐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을 표방하는 DJ노믹스는 더이상 재벌이 중소기업의 희생위에 독과점시장에서 안주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또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으로 맺어졌던 정부와 재벌의 밀월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재벌 황제경영 역사속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은 각종 보고서에 5대 그룹을 ‘TOP 5 CHAEBOLS’ 로 쓰고 있다. 외신들은 한때 ‘소화불량에 걸린 거대한 괴물’ ‘하나의 사이비 종교, 총수는 황제’ 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외국 투자자들은 계열사와 협상을 벌일때 재벌회장이 나서지 않으면 미심쩍어 한다. 그러나 ‘12·7 합의’ 가 제대로 지켜지면 앞으로 ‘재벌’ 과 ‘황제경영’ 이라는 말은 역사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게 됐다.

5대 그룹은 이번 합의에 따라 3~5개의 주력업종 중심으로 계열사를 재편, 계열사 수를 264개에서 130개 내외로 감축할 예정이다.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도 2000년 3월말까지 완전해소된다. 재벌체제를 가능케 했던 그룹의 울타리가 무너지는 셈이다.

그룹이라는 보호막의 위력은 엄청났다. 아무리 부실해도 그룹사에 속하면 돈빌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우량 계열사가 지급보증을 서기때문이다. 실제 5대 그룹의 상위 5개사는 그룹 전체 채무보증의 70%이상을 맡고 있다. 대우중공업의 경우 대우그룹 전체 빚보증의 절반이상을 섰다. 무분별한 투자나 과감한 신규사업 진출도 그룹의 영향력때문에 가능했다. 각 그룹종합상사의 경우 계열사 제품의 취급비중이 50%를 넘는다. 높은 부채비율에도 견딜 수 있는 배경중 하나다.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는 재벌은 독립기업연합 형태로 탈바꿈할 것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독립기업연합이란 회사명이나 브랜드는 공유하되 별도 기업처럼 경영되는 시스템이다. 의사결정기구였던 그룹 사장단회의는 정보교류를 위한 친목모임으로 바뀌게 된다. 부실한 계열사나 소그룹은 우량회사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워 언제든 망할 수 있다. ‘가족’ 간 경쟁도 불가피하다.

그룹의 해체는 황제경영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제껏 총수(오너)의 독단에 제동을 걸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사회와 주주총회는 거수기에 불과했다. 오너가 결정하면 수익성이 있는 사업이든 그렇지 않든 추진됐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30대 그룹의 자산중 총수를 포함한 지배주주의 기여도는 3%, 나머지는 주식·채권시장과 금융기관에 조달됐다. 올해 4월15일 기준으로 5대그룹 계열사 257개중 총수 지분이 단 1주로 없는 회사가 201개로 전체의 78.2%에 달했다. 그런데도 총수는 그룹전체의 자산에 대해 100%의 재량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룹과 빚보증이 없어지고,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조사가 강화하는 상황에서 지분이상의 경영권 행사는 힘들어진다. 더구나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장치가 대폭 보강될 예정이어서 경영을 잘못했다가는 회장자리마저 내놓아야 한다.

‘빌리고 보자’ (차입경영) ‘늘리고 보자’ (문어발식 확장 및 과잉투자) ‘오너만 쳐다보자’ (소유경영) 등 한국 재벌의 3대 경영방식은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 물론 그 속도는 이번 합의내용의 이행도에 달려 있다.

유승호·정희경 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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