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둑이 들어 112신고를 했는데 “파출소를 지킬 사람이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라”는 답변을 듣게 된다면 어떨까. 막연한 일만은 아니다.

공무원법의 보호하에 ‘철밥통’의 탄탄한 신분보장을 받아오던 공직사회가 IMF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맞고 있다. 이른바 명예퇴직 줄서기다. 국가·지방직 일반공무원과 교사등 교육공무원에 이어 민생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공무원이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아우성이다.

급기야 경찰청은 최근 당초 방침을 바꿔 명예퇴직을 제한적으로 허용키로 했다. 퇴직금 정산 예산부족 때문이 아니라 최소한의 민생치안 유지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올들어 4분기까지 명예퇴직을 신청한 경찰관은 모두 3,166명. 매년 분기마다 4차례씩 시행해온 명예퇴직 실적이 연평균 180여명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무려 18배에 이르는 숫자다. 1~3분기까지 신청자 전원을 명퇴시킨 경찰청은 최근 4분기 신청자가 무려 2,059명에 이르자 경정급 이상 간부와 연령 정년에 걸려 명퇴신청 자격이 올해로 끝나는 274명에 한해 명예퇴직을 허용했다.

경찰관 명예퇴직 희망자가 폭증한 직접적인 원인은 지난 7월 국가공무원법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국가공무원법은 종전 58세이던 공무원의 정년을 1년 단축해 57세로 낮추고 ‘99년 12월31일 이전에 명퇴하는 공무원의 명예퇴직 수당은 종전의 정년을 적용한다’는 경과조치(통칙 제4조)를 두었다. 경찰공무원법에 따르면 명예퇴직자의 정년 잔여기간에 따라 퇴직후 5년동안은 기본급의 50%, 이후 5년간은 기본급의 25%에 해당하는 명예퇴직금을 일시에 지급토록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25년간 경찰에 몸담았던 김모 경위. 그는 원래 2000년 6월30일 정년을 맞을 예정이었으나 법 개정으로 내년 6월말에 옷을 벗어야 한다. 만약 김경위가 올해 말에 명예퇴직을 할 경우 경과규정에 따라 잔여기간 1년6개월에 해당하는 명예퇴직금 981만원(기본급 109만여원의 50% X 18개월)을 일시에 지급받는다. 반면 6개월간 꼬박 출근해 줄어든 정년을 채울 경우 월급과 2차례의 보너스를 합쳐 872만원을 6차례에 걸쳐 나누어 받게된다. 근무수당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정년까지 근속하는 것은 바보나 할 짓이라는 계산이다.

만약 경찰이 명예퇴직 희망자 전원을 명퇴시켰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했을까.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3,166명의 경찰관이 명예퇴직으로 옷을 벗을 경우 전국 225개 경찰서당 약 14명의 결원이 생기는 셈. 서울 등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 경찰서가 총원 100명 미만인 점을 감안할 때 10%이상의 결원이 생기는 셈이고 이같은 경찰관 부족현상은 민생치안에 중대한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다. 더욱이 연말 치안수요가 폭증하는 시점에 이같은 일이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4분기 명예퇴직 신청자를 13%선에서 제한했음에도 불구하고 11월17일 현재 경찰은 총정원(9만638명)에 못미치는 88,284명의 경찰력으로 치안을 떠맡고 있다. 정년 단축에 따른 인력 자연감소 때문이다.

IMF 취업난시대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수많은 대졸자와 대졸예정자를 대상으로 신규 경찰관을 채용하면 되지 않을까. 실제 최근들어 순경공채 시험도 엄청난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경찰업무의 특성상 신규 채용인원을 현장에 곧장 배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경찰 관계자의 말이다. 매년 4차례 실시하는 순경 공채의 경우 모집공고에서 채용까지 2개월이 걸린다. 게다가 충북 충주에 있는 중앙경찰학교에서 6개월의 교육과정을 수료해야 현장에 배치된다. 최소한 8개월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경찰청은 부족한 인력을 위해 연내 2,000여명을 조기배치하는 한편 올해 말에 신규채용한 경찰관의 교육기간을 한시적으로 2개월간 단축, 16주교육만 받게 한 뒤 현장에 배치키로 했다. 내년 신규채용 인원도 경장급(300명)과 경위급 간부후보(50) 경찰대졸업생(120명) 등을 포함 모두 5,650명으로 늘려 잡았다.

경찰의 딱한 사정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두고 뒷말이 많다. 정황을 놓고 볼 때 올해 명예퇴직 신청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고 이에 따른 치안대책 등도 당연히 준비돼야 했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돈’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와 관심만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계산할 수 있는 일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경찰은 이에 대한 아무런 예측도 준비도 대책도 없었다. 경찰청 관계자는 “명예퇴직 신청자가 이렇게 폭증할 줄 몰랐다”며 “내년 말까지 정년에 걸린 예상인원만 나가면 평년 수준을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 경찰관의 경험부족과 교육 부실에 따른 총기 오·남용 등 부작용이 빈발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속성 교육을 받은 경찰관이 일선에 배치되는 편법이 동원될 판이다.

하지만 문제가 여기서 그칠까. 내년에는 경찰청의 판단처럼‘개인사정이 있는 사람들과 국가공무원법 경과조치로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부에 한해서’ 명퇴자가 발생할까.

이와 관련 경찰 한 관계자는 “이번 명퇴 신청자 모두가 얼마간의 명퇴수당을 얻기 위해 등떠밀려 나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지속적인 경제난에 따른 막연한 신분불안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즉 그에 따르면 국민연금 고갈 불안감과 급여삭감 공포, 추가 정년단축 우려가 경찰 뿐 아니라 공무원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으며 이들은 경제여건이 호전되지 않는 한 잠재적인 명퇴자 군(群)을 형성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경찰은 군과 함께 국민의 안전과 치안을 책임지는 중요한 국가기관이다. 업무의 특성상 상황에 따라 누군가 대신할 수도, 급조될 수도 없는 일이며 이런 점에서 사기업이나 일반공무원과도 구분돼야 한다. 장기적이고 치밀한 인력수급 대책이 더욱 절실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윤필·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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