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왕국에 시민혁명의 파고가 거세다. 재벌오너가 절대왕권을 행사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절대왕권의 재벌시대를 청산하고 경제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위한 시민군의 봉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정부가 강력한 원군으로 참전하고 있다. 도도한 변화의 물결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절대왕권에 집착할 경우 재벌오너들은 프랑스혁명으로 몰락한 루이 14세의 전철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참여연대는 시민군의 선봉장. 이들은 절대권력을 향휴하던 재벌총수의 영지를 조금씩 잠식해 나가고 있다. 참여연대는 소송을 통해 SK텔레콤의 계열사지원을 차단했고 삼성전자의 계열사지원을 막기위해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또

절대왕권의 세습을 막기위해 2세에게 전환사채등을 통해 부를 넘겨주는 것을 막는 싸움도 벌이고 있다.

외국인투자가들은 이같은 참여연대의 활동이 한국주식시장의 회복을 앞당겼다고 말하고 있다. 특정기업이 번 돈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소액주주의 권한 강화(5월25일, 증권거래법 개정), 결합재무제표 도입(99사업연도부터), 사외이사제 도입(4월1일 유가증권 상장규정 개정), 국제회계기준 도입(99년1월 시행예정), 외부감사에 대한 감시 강화(4월 외부감사법 개정), 집단소송제 도입(2000년1월 시행예정) 누적투표제와 사실상이사제(상법 개정중)등은 막강 원군인 정부의 지원포화이다.

이같은 제도적 장치는 소수지분을 가지고 모든 권력을 장악한 절대왕권을 종식시키고 투자자, 채권단, 거래기업 등 이해당사자가 이해관계에 걸맞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경제민주화를 위한 수단이다.

정부가 진지를 제공하고 외국인이 병참을 보급하는 가운데 시민군이 세력을 확장하자 절대왕권진영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왕국의 몰락을 막기위해 절대왕권을 견제하는 신하들이 나타난 것이다.

일부 외신은 삼성자동차가 기아인수를 막은 사례를 전문경영인이 오너의 결정을 번복한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하고 있다.

오너의 결정에 대해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수 밖에 없었던 전문경영인들도 기업의 생존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기존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모습을 비치고 있는 것이다.

더이상 선단식경영, 오너의 독단적인 의사결정, 편법적인 부의세습등 과거의 관행을 계속할 때는 기업자체가 생존할 수 없다는 인식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이같은 인식전환을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 5대 재벌의 자금줄을 차단하고 있다. 부채비율을 내년말까지 200%로 낮추도록 하고 상호지급보증을 완전해소토록 해 은행대출을 받기 어렵게한데 이어 은행자금이 회사채 CP등을 통해 5대재벌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정부는 이미 5대 재벌의 퇴로가 차단된 상태이므로 기존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경우 재벌그룹들이 스스로 개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정부의 압박작전은 “연내에 5대 재벌개혁을 마무리 지으라”는 김대중대통령의 지시이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역대정권이 정권초기마다 재벌개혁문제를 도마위에 올렸으나 얼마안가 유야무야하던 것 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재벌들이 외치는, “우리가 쓰러지면 나라가 망한다”식의 ‘대마불사론’ 혹은 ‘동반자살론’에 밀려 빼들었던 개혁의 칼날을 슬그머니 집어넣기 일쑤였던 허약한 모습은 아니라는 평가이다.

정부는 일단 5대재벌이 개혁을 회피하는 협박용 무기로 사용했던 동반자살론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했다.

재벌의 덩치를 쪼개 분할 통치가 가능한 수준으로 분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경제장관들과 5대 재벌총수가 합의한 이업종간 상호지급보증의 연내해소가 이를 위한 장치다. 5대 재벌을 4~6개 업종으로 분리해 상호지급보증을 해소토록 한다는 것이다.

재벌들의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힘든 보약이지만 계열사의 우산아래 모든 기업이 공존하던 과거의 관행에서 볼 때는 독약일 수도 있다. 상호지보로 얽혀있는 재벌계열사들이 부실계열사 한 곳의 위기로 인해 동반몰락하는 것을 막고 독립경영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정부와 채권금융단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위기와 금융기관의 부실화를 염려하지 않고 재벌개열사들을 퇴출시키기가 쉬워진다.

독자생존가능성이 없는 재벌계열사들을 여신중단, 또는 여신회수를 통해 정리하겠다는 정부의 다짐이 허장성세가 아닌 실질적인 조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재벌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걱정을 접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부 관계자들은 부실재벌의 일각을 허물어트릴 경우 대한민국이 과거의 대마불사관행을 깨부셨다는 확실한 신뢰를 국제금융계에 심어줘 국가신인도가 개선될 수도 있다고 공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같은 공언은 재벌들이 개혁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선택해야 하는 최후의 대안이다.

때문에 정부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는 재벌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5대 그룹 주력계열사에 대한 출자전환이 대표적인 사례다.

은행부채를 주식으로 전환해 재벌의 부채비율을 외자유치가 가능한 국제수준으로 낮춰준다는 것이다. 재벌들로서는 부채비율도 떨어지고 이자비용도 감소하는등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지만 선뜻 받아들이기도 쉽지는 않다. 기업가치를 향상시킬 경우 경영권을 계속 보장한다는 꼬리표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뒤집어보면 경영을 잘못할 경우 경영권을 박탈하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정부는 이미 금융구조조정과정에서 대부분의 은행에서 최대주주가 되었다. 은행을 통해 재벌경영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수단을 장악했다. 재벌오너의 입장에서는 경영권을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고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절대왕권의 시대가 가고 있음을 절실히 깨닫지 않을 경우 완전한 몰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최창환·서울경제신문 정경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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