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체제이후 숱한 기업들이 쓰러졌다. ‘맨손으로 시작해 그룹총수가 됐다’ 는 ‘근대화형 신화’ 들도 함께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IMF시대에도 우리 주위엔 어김없이 새로운 ‘입지전’ 이 쓰여지고 있다. 동아증권(현 세종증권)을 인수한 김형진(40) 세종기술투자사장은 IMF체제가 모든 사람에게 ‘독약’ 이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올 7월 세종기술투자라는 조그만 창업투자회사가 동아증권을 인수한다고 발표했을 당시 증권가의 관심은 김형진이라는 인물에 모아졌다. ‘사채업자가 증권사를 거져 집어삼킨뒤 몇 푼 남기고 팔아치우려 한다’ ‘권력과 가까운 인물의 비자금이 인수자금이다’ 하는 루머들이 돌아다녔다. 동아증권 직원들조차 “어쩌다 우리가 이런 꼴이 됐나” 하고 탄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사장이 동아증권을 인수한 지 얼마 안돼 일일이 보낸 편지를 받아본 직원들은 김 사장의 ‘경영마인드’ 가 간단치 않음을 알게 됐다. “회사의 재산을 축내는 직원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회사가 번 돈은 직원과 주주와 고객들에게 고루 돌아갈 것입니다.” 세종이라는 이름도 세종대왕이 새겨진 만원짜리 지폐처럼 고객들이 항상 옆에 두고 싶어하는 금융기관이 되자는 뜻이라는 설명도 예사롭지 않았다.

투명한 경영약속, 99년 순이익 200억원 목표

실제로 김 사장은 인수직후 12개 지점 가운데 영업실적이 가장 나쁜 2개 지점을 폐쇄해버렸다. 반면 영업직원들에게는 수익의 15%를 실적급으로 지급하는 등 침체돼 있던 회사분위기의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김 사장이 회사를 인수한뒤 세종은 기업어음(CP)과 채권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한달만인 8월에 일찌감치 흑자로 전환했다. 이어 9월과 10월에도 각각 39억원, 56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내년에는 순이익 2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주식시장이 호조를 보이고 자금시장이 안정되는 등 여건이 좋아진 탓도 있지만 김 사장은 “회사의 체질이 바뀌고 있기 때문” 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일례로 그는 경영의 투명성을 들면서 그 자리에서 전날까지의 세종증권 재무제표를 컴퓨터로 뽑아서 손님에게 보여주곤 한다.

김 사장은 “세종증권을 인수한 것은 정말로 모범이 될만한 금융기관을 만들어 경영해 보겠다는 뜻” 이라고 말한다. IMF가 없었더라면 이같은 꿈을 현실화하는게 상당히 늦춰졌거나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IMF는 김 사장이 증권사를 인수할 능력과 자신을 갖게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 사장은 IMF구제금융을 신청한 직후 회사채금리가 30%를 훨씬 웃돌고 기업들의 부도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5대그룹이 아닌 중견·중소기업이 발행한 회사채에 투자했다. 고금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는 “80년의 격변기를 돌이켜 보세요. 당시에도 금리가 30%위로 치솟고 부도가 속출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가 정권유지와 정당성확보를 위해 강력한 사회안정책을 실시하면서 금리가 1년6개월만에 13%대로 떨어졌습니다” 라고 말했다.

회사채 선물거래, ‘흐름 읽는 투자’ 로 자금 확보

이같은 판단아래 그는 기업들의 회사채를 ‘입도선매’ 했다. 증권업 허가가 없었기 때문에 증권사를 통해 기업들과 접촉, 회사채 인수계약을 미리 맺은 것이다. 계약내용은 ‘3개월뒤 연 25%의 수익률로 회사채 200억원어치를 인수하기로 한다’ 는 식. 이른바 회사채 선물거래인 셈이다. 계약을 맺는 기업의 자금담당자들조차 김 사장을 이상한 시선으로 봤다. ‘금리가 얼만큼, 언제까지 뛸지 모르는데 이런 낮은 금리로 미리 인수계약을 맺어놓다니.’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불과 몇달뒤 금리는 10%대로 급락했다. 해당기업들 가운데는 ‘김 사장에게 속았다’ 며 분해하는 곳도 있었지만 금리예측에서 승패가 갈린 이상 할말이 없었다.

벤처기업 주식투자에서도 돈을 벌었다. 지난해 8월 자금난에 허덕이던 유일반도체 주식 25만주를 사들였다. 1년이 지난 지금 유일반도체는 영업이 정상화해 코스닥시장에 등록됐고 올들어 320만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주가가 크게 뛰어 시세차익을 남긴 것은 물론이다.

김 사장 표현대로라면 ‘흐름을 읽는’ 이같은 투자 덕에 그는 증권사를 인수할 수 있는 자금과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세인의 관심을 더 끄는 부분은 김 사장의 개인사이다. 중졸에서 증권사 경영주에 오르게 된 그의 이야기는 암울한 IMF시대에 또 하나의 위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무사 사환으로 사회에 첫발, 채권도매업으로 성공

그는 전남 장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상경, 법무사 사무소 사환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사환생활을 하면서도 방송통신고를 졸업하고 임시서기보시험에 합격했다. 등기소 공무원이라는 조그만 출세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이곳에서 채권을 파고들었다. 전화채권이나 주택채권이 어떤 경로를 통해 제도권과 비제도권 사이에 유통되는지를 유심히 관찰한 것이다. 방위근무를 마치자마자 24살의 나이인 81년, 자신을 포함해 직원 3명으로 명동바닥에 사무실을 차렸다. 지금의 부인도 그때부터 고락을 같이한 부하직원이자 동업자이다. 김 사장은 국공채도매에서 출발, 양도성예금증서(CD) 특수채 회사채 전환사채(CB) 등으로 투자 영역을 넓히며 증권가 사람들과 얼굴을 익히고 교분을 넓힌 끝에 90년 홍승캐피털이라는 법인을 차렸다. 김 사장은 자신이 일종의 ‘비제도권 채권딜러’ 였던 셈이라고 표현한다. 채권도매업무만을 하고 대금업은 손에 대지도 않았기 때문에 흔히 부르는 사채업자라는 표현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증권실무는 증권사 직원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때론 얻어먹으며 익혔다. 독학이라면 이력이 나 있었기 때문에 책을 보고 공부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김 사장과 업무에 관해 이야기해본 사람은 그가 정규교육을 중학교까지밖에 받지 않았다는데 놀란다. 그만큼 그는 주식 채권은 물론 선물 스와프 등 파생상품거래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IMF시대를 지렛대 삼아 ‘증권가 신화’ 이뤄

지난해 세종기술투자를 만든데 이어 세종증권까지 인수, 제도권 금융인으로서 자리를 잡았지만 김 사장은 ‘어려웠던 시절’ 을 잊지 않고 있다. 김 사장은 아직 전세집에서 산다. 영풍문고빌딩 한켠의 세종기술투자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말이 사장실이지 두평 남짓한 공간에 응접세트도 없다. “80년대 중반 친척과 함께 강남에 70여평 땅을 샀습니다. 한때 그 땅값 뛰는 맛에 사업을 소홀히 하다가 다 들어먹을 뻔 했지요. 개인재산이야 많지만 모두 회사에 투자돼 있습니다”

IMF시대를 도약의 지렛대로 삼아온 김 사장. 그가 끝까지 ‘증권가의 신화’ 로 남을지, 아니면 앞서간 수많은 기업인들처럼 ‘또 하나의 거품’ 으로 스러질지 사람들은 지켜보고 있다.

김준형·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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