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18일로 개혁개방정책을 시작한 지 20돌을 맞는다. 78년 12월 18일 열린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3中全會)가 채택한 개혁개방노선은 이후 20년간 중국은 물론 동북아와 세계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장쩌민 국가주석겸 공산당 총서기는 18일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열어 개혁개방 20년을 잇는 새정책을 밝히는 중대연설을 할 예정이다.

중국 대륙은 현재 정신없이 달려온 개혁개방의 세월을 되새기는 붐이 한창이다. 언론들은 9월부터 관련 특집을 게재하고 각종 토론회와 기념우표 발행작업도 성황이다.

78년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는 중국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중국은 이를

계기로 마오쩌둥(毛澤東)의 ‘계속 혁명론’대신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했다. 경제건설을 최우선시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나선 것이다.

개혁개방 20년의 역사는 개혁파·보수파간 권력투쟁의 역사였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인 덩샤오핑은 78년 3중전회에서 마오쩌둥 노선을 추종하던 화궈펑(華國鋒)을 물리치고 중국현대사의 물결을 돌려놨다. 鄧은 처음 10년은 후야오방(胡耀邦)·자오쯔양(趙紫陽)을 양날개로 삼았다. 胡는 보수파의 반발로 87년 1월 학생시위를 책임지고 물러나고 趙 또한 89년 천안문사태 당시 학생운동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두번째 10년은 鄧이 장쩌민 국가주석과 리펑(李鵬)·차오스(喬石) 등에게 힘을 실어줬다. 올해부터는 江주석을 정점으로, 경제통 주룽지(朱鎔基)총리와 리펑이 3각축을 이루는 세번째 10년이 시작됐다. 江체제는 10월 3중전회에서 ‘제2의 농촌개혁’을 선포, 대대적인 투자를 통한 농촌경제 회생으로 전체 중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에 착수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에서 사회주의는 사실상 이름만 남게 됐다. 토지든 물건이든 자유로이 사고팔 수 있다. 자유로운 상거래로 거부들이 줄줄이 탄생하는가 하면 기업 탈세가 당국의 골치거리로 등장했다.

江주석은 지난해 당대회에서 소유제 다양화를 선포함으로써 ‘공유제냐 사유제냐’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아가 2000년까지 헌법을 개정, 개인이나 기업이 토지·건물을 소유할 수 있다고 못박을 방침이다.

이같은 개혁노선은 경제적으로는 과거 수년간 연 10%라는 세계 최고 성장률을 기록하는 성과를 올렸다.

78년 133.6위안에 불과했던 농민들의 연수입은 지난해 2,090.1위안으로 무려 15.6배나 늘어났다. 인민공사가 해체되고 농민이 토지를 임대받아 생산량의 일부를 국가에 납부한 뒤 나머지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청부생산책임제’가 도입돼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78년 3억5,00만톤에서 97년말 5억톤으로 증가한 식량생산량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도시인들의 연수입도 20년전보다 15배 가량 증가된 5,160.3위안을 기록했다.

연안지방 경제특구와 상하이 푸동(浦東)지구는 도시지역의 눈부신 성장을 대변해주고 있다. 평균재산이 6만4,000달러(약 8,300만원)이상의 중산층이 3,000만명을 넘고 인구가 2억8,000만명 늘었으나 빈곤층은 2억5,000만명에서

5,000만명으로 줄었다. 최근에는 미국 호주 영국 싱가포르 등지에 조기유학 바람까지 일고 있다.

개혁개방 20년 물결은 또 청년들의 가치관을 바꿔버렸다. 특히 개인적인 부(富)의 추구와 관련, 중국 공산당이 1935년 무려 2만5,000㎞를 행군해 옌안(延安)에 항일투쟁과 혁명의 근거지를 마련한 ‘장정’(長征)의 노년세대와 ‘뎬나오(電腦·컴퓨터)문화’로 대표되는 신세대간 의식의 차가 엄청나다.

중국의 군사력은 재래식 군사력만 놓고 중국군의 위력을 가늠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핵전력을 시작으로 해마다 강해지는 첨단 전력이다. 전투기 4,000대에 최신 폭격기만 400대가 넘는다. 핵잠수함 9척을 포함 잠수함도 50대를 넘는다. 최근에는 위성을 요격하는 레이저무기도 개발중인 것으로 알려져 미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체제를 더이상 인정할 수 없다며‘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일극체제하의 평화)시대를 종식시키고 ‘팍스 시노-아메리카나’(미·중 양극체제하의 평화)시대를 앞당기겠다는 야심마저 풍기고 있다.

중국의 외교력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엎고 곳곳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양안(兩岸)간 경쟁이란 말은 이미 옛말이고 지난해 제네바 인권회의에서 미국이 제기한 대중국 비난결의안은 중국을 의식한 프랑스 등 다른 서방국의 반대로 상정되지도 못한 채 폐기됐다.

정치적으로는 현단위 인민위원을 뽑는 선거가 복수의 후보중에서 몇명을 고르는 차액선거제로 바뀌고 언론자유 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 바람을 불러왔다.

이같은 성장의 그늘도 만만찮다. 지역·계층간 소득격차가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나날이 벌어지는 계층간 소득차이는 아직은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그러나 지역격차는 차원이 다르다. 중국 당국은 지역간 경제력 차이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제후주의’(諸候主義)를 부추길 것을 염려하고 있다. 허베이(河北)·산둥(山東)·푸젠(福建) 등 화둥(華東) 7개성과 광둥(廣東)성 등 동부 연해지역의 지난해 공업생산 증가율이 21%내외인데 반해 구이저우(貴州) 등 서쪽 지역은 9%에 미달한 것은 동서 격차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와함께 대량실업, 황금만능주의, 태자당등 특권층의 대두, 지도층의 부패 등도 중국이 풀어야할 숙제다.

특히 인권과 민주화는 중국의 아킬레스건이다. 중국은 최근 반체제인사들이 최초의 야당을 결성한 것과 관련, 주동자들을 국가전복혐의로 체포해 미국등 서방세계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티베트등 소수 민족의 분리 독립 움직임에 대해 진압과 회유책을 병행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88년 초인플레, 89년 천안문 사태, 97년 鄧의 사망을 딛고 전진해온 개혁개방정책의 이후 성패는 3세대 지도자로 불리는 江주석 등 현지도부가 개혁개방정책으로 인한 갖가지 부작용을 얼마나 잘 추스리면서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조화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

김혁·국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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