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부터 시작된 동구의 민주화혁명은 당시 우리에게는 역사가 바뀌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전에는 낫과 망치가 그려진 적기에 휩싸인‘철의 장막’안쪽의 상황은 간간이 민주화 시위, 그리고 이를 짓밟는 소련제 탱크등이 전부의 이미지로 각인되었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붉은 색깔이 거두어졌다니.

국제정치학자들은 물론 경제학자, 사회학자들이 어떻게 이런 혁명적 변화가 가능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은바 있다. 게다가 91년 사회주의국가중 최고의 풍요를 누린다던 동독마져 서독에 흡수됐다. 누구도 이를 예상치 못했던 터라 “그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은 사표를 내야한다”고 할 정도였다.

더구나 같은 분단국가인 남·북한에서는 이 현상을 ‘동상이몽’으로 해석했다. 남한측은 사회주의권의 몰락 도미노가 결국 북한에도 영향을 미쳐 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해서 93년 YS정권초기에는 ‘흡수통일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북한측은‘코웃음’쳤다.‘동구국가들이 자본주의의 평화공세에 조금씩 문을 열어주다가 결국 당했다’는 분석이었다.

89년이후 4-5-년간 동구의 민주화과정과 동서독 통일에 관해 한국에서 나온 책들은 대부분 이러한 남북관계와 통일을 염두에 둔 것들이었다. 통일원이나 안기부등 통일관계 부서에서도 돈을 들여 학자들이나 언론인들을 보내 이 민주화과정이 우리 통일에 어떤 도움이 될까를 연구한 논문들과 서적들을 펴내기도 했다. 그래서‘논리반,기대반’이 섞인 듯한 논리들이 많이 나왔다.

98년 현재 북한은 아직도 건재하고 당시에는‘4-5년안에’통일이 될것같던 분위기가 10년이 흘렀지만 남북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이제야 ‘환상’을 접고 조용히 동구와 동독의 민주화과정의 경과와 원인을 논리적으로 따져보는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 그중 하나가 강원대 사회학과 전태국(全兌國) 교수가 쓴‘국가사회주의의 몰락-독일통일과 동구몰락’(도서출판 한울간. 정가 28,000원)이다.

전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와 대학원을 나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사회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몇안되는 정통‘프랑크푸르트학파’다. 그는 이미 93년 게오르그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를 번역했고 95년에는 공역으로‘맑스의 초기저작: 비판과 언론’을 공역해 사회주의의 기초이론들을 우리나라에 소개한바 있다. 이어 94년에는 첫저서인 ‘지식사회학:지배·이데올로기·지식인’을 펴냈고 97년에 수정판을 냈다. 전교수는 96년부터 이러한 사회학 저작들을 넘어 동구사회,통일문제와의 현실접합을 시도해‘세계화시대의 통일문제’(96년) ‘동구사회의 변화와 맑스주의’(97년)등의 논문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정이 이 책이다. 전교수는 이책에서 동구사회를 ‘국가사회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150년전‘공산당선언’에서 이미 몰락을 예언한‘봉건적 사회주의’라는 것이다. 일사분란한 획일주의와 반다원주의, 정권이 바뀌어도 살아남는‘노멘클라투라’(귀족계급), 국가안전기관의 감시체제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의 군부통치시대의 권위주의체제와도 닮아있다. 이것은 맑스나 엥겔스가 오히려 경멸하던 체제였다. 그래서 이런 경직된 체제는 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동구혁명의 또다른 특징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나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과는 달리 폭력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벨벳혁명’은 종래의 혁명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공적영역에 대항하여 가족,친구를 중심으로한 사적인 ‘둥지’가 마침내 독재의 바위를 뚫은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평화와 혁명의 결합은 역사적으로 처음이다.

이러한 무혈혁명으로 인해 폴란드,헝가리, 체코가 독특한 사회적·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음에도 원탁회의, 과도정부, 포스트 공산주의 3단계과정을 공통적으로 걸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마지막으로 동구혁명은 과거의 혁명들처럼 새로운 이념이나 유토피아를 좇은 것이 아니라 서구의 시민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것이었다. 미래적이 아니라 ‘만회적’(挽回的) 성격이라는 것이다.

이 분석들은 앞으로 북한의 변화가능성과 통일에의 많은 시사점을 주고있다. /남영진·주간한국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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