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도 같은거 아니요? 사진 찍는데 뭔 이론이 필요해, 씨X. 사진쟁이가 사진만 잘 찍으면 되지! 아휴, 난 이론같은거 하나도 몰라.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최소한 100배는 더 열심히 작업했지. 그 증거를 보여드릴까?”

전각예술가 최규일(60)씨는 쉽게 말해 전각계의 ‘유진 박’이다. 전통 전각계에선 이단아 취급을 받고 있지만, 어쨌거나 현대예술계에서 그 이름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는 중요한 인물.

어느 대가의 문하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일어섰기에 학연과 인맥이 우위를 점하는 이 땅보다는 외국에서 더 널리 알려진 외로운 ‘명인’이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질문은 나중에!”라며 이쪽은 아예 입도 못떼게 하고 장장 30여분동안 혼자 정력적으로 열변을 토하던 그의 얘기도 결국엔 그런 내용이었다.

그 속에 이끌려나온 최씨의 ‘기본’의 철학.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이 어떻게 기본을 배웠냐구요? 잘 들으세요. 기본은 어디서 배워서 시작하는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평생을 해야되는게 기본이란겁니다.”


섬세하고 걸출한 조형미 돋보이는 작품

설령 명인의 칭호가 없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괴짜 소리는 충분히 들었을 위인이다. 치렁대는 은발의 긴 머리와 턱수염. 그의 표현을 빌자면 “기른게 아니라 깎는 일을 그만뒀더니”생긴 결과다. 무슨 일이든 틀에 박힌 습관이 싫다는 것이 이유. 씻는 습관도 남다르다. 목욕은 일년 1회가 평균. 한때는 3년동안 목욕을 안 한 적도 있지만 요즘은 그나마 횟수가 잦은 것이 일년에 너댓번이다. 안 씻는 내력으로 치면 그의 집은 한층 더 유서가 깊다. 50년째 살고 있다는 서울 정릉의 최씨 집은 수년째 청소 한번 해 본 일이 없다. 첫 인상부터가 마치 전쟁대피용으로 만든 방호소 같은 느낌.

까딱하면 헛디뎌 굴러 떨어지기 좋은 캄캄한 입구계단에다 말이 작업실이지 천장과 벽 곳곳이 곰팡이와 거미줄로 도배된 온기 없는 골방 작업실(그래도 이날은 손님이 온다고 전기스토브와 전기장판까지 가동했다), 방문을 나서면 역시 몇분전 피난채비라도 황급히 꾸리던 살림처럼 온 사방이 휴지와 쓰레기 더미로 뒤엉켜 발디딜틈이 없다. 그 너머 그의 작품을 보관하는 창고방엔 정체불명의 흰 더께가 한 벽면을 화려하게 덮고 있었는데, 그것도 알고보니 수십년 된 곰팡이. 아무리 좋게 말해봐야 세상과 담을 쌓은 토굴 그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끄러워 하리란 생각은 완벽한 오해다. 오히려 최근에 봤다는 김용옥의 TV노자도덕경 강의까지 끌어들이며 의연한 논지를 편다.

“김용옥 선생도 그러지 않습디까, 너무 꽉 차면 쓸모가 없다고. 너무 야박하게 깔끔하면 도무지 허(虛)가 없어서 아무 것도 안 나옵니다. 하지만 보세요, 우리집은 전부 허입니다. 창조적인 에너지를 내려면 이렇게 뭔가 춥고 부족하고 불완전한 환경이 더 좋습니다.”

그 먼지투성이 골방이 그에겐 우주다. 작업하는 겉모습만 보면 영낙없는 ‘도장장이’지만, 30년 외길을 걸어온 그는 이미 세계에서도 유일한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특별한 예술가다. 작품의 성격부터가 기존 전각가들과는 현저한 차이를 준다.

이들의 작품이 서예에 가깝다면 그의 작품은 미술에 더 근접한 셈. 섬세하고도 걸출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그림같은 글씨다. 이것은 15년째 누드드로잉을 계속하면서 쌓은 그의 노하우이기도 하다.

각법 또한 현재 전각계에선 유일무이한 ‘1도1각’의 전문가. 1도1각이란 기존 각법처럼 조각칼로 글씨를 매끈하게 파내는 것이 아니라 칼질로 깎여나간 경계면 하나하나가 모여 전체의 선을 이루도록 하는 전각법. 이 때문에 다소 거친선이나 그 자연미가 최규일 작품의 매력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작품 크기도 자유자재. 작게는 6cmx 6cm크기에서부터 어떨땐 한 면이 30cm가 넘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 낸 작품이 대략 한 트럭분, 글자수로 치면 백여만자를 손수 새긴 최씨다.


국내보다는 해외서 더인정받는 ‘가난한 명인’

365일중 300일은 시간개념도 없이 산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종일 손마디가 곱도록 옥돌만 깎는다. 자고 싶으면 낮에 잠깐 자두었다가 밤이면 집중적으로 작업, 그렇게 30년의 열정과 가속이 붙다보니 작업량만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례로 국내 전각계의 거두로 알려진 한 전각가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3년간 새긴 글자가 250~1,000자 정도. 그것도 음각인 경우다.

그러나 최씨의 경우 훨씬 제작시간이 오래 걸리는 양각을 쓰면서도 천자문을 깎는데 단 열흘밖에 걸리지 않는다.

올해만해도 스스로도 족히 1년은 걸리리라 했던 ‘한산시’ 200여편을 거의 열달만에 조기마감한 뒤, 그 다음날엔 바로 ‘법구경’에 들어간 작업중독자. “중요한 건 제가 새긴 그 많은 글자중 단 한 글자도 같은 모양이 없다는 겁니다. 모든 글자가 다 다르지요. 처음엔 긴 글로 보여주니 좀처럼 인정을 안하길래 나중엔 그것을 확실히 보여주려고 여(旅)자 하나만 가지고 다른 모양 600개를 만든 적도 있습니다. 그제서야 피카소보다 더 대단하다며 다들 놀라더군요.”

1985년 경인미술관에서의 첫 초대전을 시작으로 그간 10여차례 전시회도 열었다. 멀리 독일 공영TV의 전파도 탄 바 있고, 일본, 호주, 프랑스 등지 초대전도 갖는 등, 외국에서도 넉넉한 인정을 받은 터.

그러나 냉랭한 것은 오히려 국내 전각계였다. 그럴듯한 계보도 없이 난데없이 등장한데다 작품조차 ‘달라도 너무나 심하게 다른’ 그가 그들에겐 적잖이 불편한 모양이다. “왜 작가가 작품 자체로 평가받기보다는 그의 유명도나, 국전 수상 경력, 아니면 교수 직함 같은 것으로 평가받아야 됩니까? 마치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림은 안 보고 작가 이름이나 수상경력만 따지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답답해 떠들어봐야 나 혼자 깨기엔 한참이나 두터운 벽이라는 걸 절실히 느낍니다.”

지난 85년엔 국내 정상급으로 대접받는 한 원로 대가를 찾아간 일도 있다. 그에게 공손히 작품을 보이자 처음엔 충격을 받은 듯 놀란 표정으로 인첩을 들여다보던 그 노(老)대가가 이내 표정을 고쳐바꾸며 “이건 선이 아니라 쥐뜯어먹은 자국”이라며 호통을 쳤다. 묘한 적대감까지 섞인 의외의 반응이었다.

또 “이건 독창도 예술도 아니다. 독창이란 철저히 옛스승들의 것을 모방하는 가운데 열사람이면 열사람 각각 다르게 나오는게 개성이고 독창이다. 이처럼 왕창 허물어뜨리는건 독창도 뭣도 아니다”라는, 정말 ‘독창적’인 예술론까지 설파하며. 그후 15년이 지난 지금도 국내 전각계는 그 자리 그대로다. 그 노대가의 생각에서 조금도 진전된 게 없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아는 사람들만 알아주는’ 가난한 명인이다.


“돈이란 허무한것”인생의 목표를 전각에 맞춰

서울 토박이로 태어나고 자란 그의 꿈은 장성할 때까지도 오직 돈을 벌겠다는 것 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마부였다. 그도 15세부터 서른살까지 마차를 끌었다. 자동차도 없던 시절이라 벌이는 꽤 좋았고, 나중엔 정릉 일대의 골재를 채취해 파는 건축자재상까지 운영하면서 제법 돈을 모았다.

현재의 정릉 집도 그때 장만한 것. 그러나 30세에 들던 해 모두 무너졌다. 성균관대 야간 경제학과 재학중 군에 입대, 66년 제대하고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으로 어느새 자동차가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부인생도 그 길로 끝나고, 그와 거래하던 한 하청업체까지 부도를 맞으면서 그의 재산이며 기반이 한번에 날아갔다. “정말 돌아버리겠더라구요. 그러다 깨달았죠. 돈이란 허무한 거구나. 언제든 무너질 수 있구나.

그러니 전 인생을 걸만한 대상은 결코 아니란거죠. 그때부터 더 이상 실패하지도, 나를 배신하지도 않을 새목표를 찾았습니다. 그게 전각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주도 있었다. 자랑하기엔 뭣한 얘기지만, 그의 손재주가 빛난 최초의 데뷔작은 6세때 만든 화투. 당시 조잡하던 횟가루 화투대신 그가 직접 마분지에 그림을 그리고 계란 흰자로 덧칠을 해 ‘명품’을 만들면서 동네에서도 큰 인기였다. 18세땐 자신의 집에 한 조각가가 세들면서 매일 같이 놀러가 조각을 배우기를 2년, 20대 초반엔 사진도 쫓아다녔고, 군복무때도 차트사를 담당, 돌이켜보니 나름대로 작은 기본기나 감각은 이미 평생을 걸쳐 모여있더라는걸 알았다.

69년, 아이 셋을 둔 가장의 신분으로 전각에 뛰어들었다. 그후 10년동안은 그저 죽기살기로 덤볐다. “일찍 시작해서 착실히 수업을 받았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서른의 뚝 끊어진 나이로 뒤늦게 출발하려니 그들보다 몇백배 더 목숨 걸고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최씨. 과연 자신이 제 길을 가고 있는지 의심이 나기도 여러번, 확신을 얻는데 꼬박 10년세월이 걸렸다. 반야심경과 금강경 등, 80년 이후 5년간의 작품을 모아 선보인 첫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어찌나 반응이 대단했던지 “그땐 내가 금방 어떻게 되는줄 알았다”고 할 정도. 그러나 그 인기 때문에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자 86년부터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쳐 전국을 떠돌며 숨어서 작업을 한 기간도 5년이나 된다.


얽매이는건 질색, 좁은 골방이 그에겐 천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일도 있다. 물론 그의 체질상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학교측엔 “나는 가르치는 일에만 신경쓰겠다”고 못박았던 최씨는 실제로 “배우고 싶은 사람만 배우면 되지, 출석이나 점수가 무슨 대수냐”며 학점이든 출석점수든 학생들이 원하는대로 다 줘버렸다.

그러자 놀란 학교측에서 이내 간섭에 나섰고, 그게 싫어 학교에다 출석부를 내던지며 싸우고는 나와버렸다. 경복궁내 전통건축공예학교 강의도 나가봤지만 그것도 ‘말이 많아지길래’ 1년만에 중지. 그동안 버틴 것도 용한 일이다.

차라리 자신의 좁은 골방에 앉아 촛불 아래 불경을 들어가며 일이나 하는 것이 그에겐 천국이다. 일에 몰두해 있을 땐 눈에 보이는 것도 없다. 사랑스러운 손자가 들어와도 핏대를 올리며 쫓아내버린다. 외골수 은둔자처럼 사는 그는 1년중 60일쯤은 이 토굴같은 방을 비울 때도 있다. 평소 친분이 있는 몇몇 절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거나 불경을 새겨주는 등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고부가가치 비럭질’이다. 그래도 평생 남의 빚 한번 져 본 일이 없다는 최씨는 그렇듯 비럭질까지 선사하는 전각이 대체 무슨 재미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무엇이든 한참 기어들어가다보면 문지방 같은게 있습니다. 일단 그 문지방만 넘어버리면 도망가고 싶지도 않겠지만, 도망갈래야 가기에도 이미 때 늦어버린 지점이 나옵니다. 좋고 싫고도 없습니다. 그때부턴 죽어 엎어져도 그냥 ‘고’(go)입니다. 제가 지금 거기에 있습니다.”

요즘 그를 괴롭히는건 그러나 비럭질도, 전각계도 아니다. 최근 재건축 계획에 따른 자신의 집 이전, 보상문제로 잔뜩 신경이 곤두 선 상태. 불도저 같던 그의 작업진도도 보름째 제동이 걸렸다. 50년이나 지킨 내 집을 그들이 거저 먹으려 한다며 그가 부탁한다. “재건축조합 사람들한테 날 괴롭혀서 좋을 것 없다고 꼭 좀 써줘요. 그 사람 다치게 해서 내가 온 동네 돌아다니며 씨X,네X 욕을 하고 다녀봐야 그쪽에 득 될거 하나도 없다고. 정 이 집에서 나가야된다면 현 싯가만큼이라도 보상하라는건데, 그깟 십원짜리 몇푼 더 받아봐야 내가 뭘 하겠수. 꼭 좀 써줘요. 예술하는 사람 건드려봐야 좋을거 없다고.” 작품이든 집값이든 제대로 평가받기란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그만큼 욕 잘하고 할 말 다하는 사람조차 쉽지 않은걸 보면 확실히 이 사회가 무섭긴 무서운 구석이 있다.

정영주·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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