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회사원 B씨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어머니의 시신을 안치하고 조문객을 받다가 깜짝 놀랐다.

병원측에서 밤 11시 이후에는 문상객은 물론 상주도 식장에 남아 있으면 안된다고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순간 “어머님이 계신데 어떻게 자식이 다른 곳에 가 잔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장례식장이 설치된 병원 영안실의 경우 요즘 그렇게 하는 곳이 많다는 얘기가 생각나 별 말 없이 받아들이고 말았다.

문상객들도 뭔가 허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저 영정 앞에 절 두 번 하고 상주와 맞절 나누고 부조 내고 나서는 더 머물 곳이 없다. 복도 양 옆으로 소파가 있지만 거기 앉아 30분 이상을 보내기는 쉽지 않다. 밥도 식당에서 식권주고 따로 먹어야 한다.

이를 두고 번거롭지 않고 깨끗해서 좋다고 하는 이도 있고 뭔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도 있다.

전통문화연구회 이계황 회장은 후자쪽이다. “예절도 사회변화에 따라 달라지고 점점 간소화되는 추세니까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칸막이 친 골방에 들어가 절 한번 하고 그냥 가는 것은 너무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고인과 사연 있는 사람이 눈물도 흘리고 하는 것이 상가의 인지상정인데…. 그런 점에서 보면 전통 유교식 장례가 번거롭다고 할지 모르지만 고인을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한 인간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예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훨씬 의미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전통 장례에서는 발인제(發靷祭·주검이 집에서 나갈 때 지내는 마지막 제사)가 끝나면 바로 출상(出喪)이다. 이제 장지로 향한다.

행렬 맨 앞쪽에는 고인의 본관 이름 직위 등을 적은 명정(銘旌)을 세워 누구의 장례인지를 밝힌다. 이어 고인의 살아 생전 업적을 기리는 시를 비단천에 적어 깃발처럼 꾸민 만장(輓章)이 뒤따른다. 만장은 많을수록 호사로 쳤다. 그 노랗고 빨갛고 하얗게 바람에 나부끼는 만장들…. 그 뒤로 사자의 혼백을 담은 영여(靈輿)가 서고 뒤이어 상여가 따른다.

상여는 종이로 만든 연꽃으로 치장해 화려하기 그지없다. 조문객들이 그 뒤로 뱀꼬리처럼 이어진다. 앞소리꾼이 상여 위에 올라 요령을 흔들며 상두가를 메기면 상여가 나아가기 시작한다. “북망산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북망일세”하고 선창하면 “어허이 어허 어허넘차 어허”하고 뒷소리가 받는다. 이렇게 장지로 향하다가 고인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곳을 지날 때는 모두 나와 노제(路祭)를 지낸다.

이렇게 진행되는 장례 행렬은 장중하기도 하고 비통하기도 하지만 가슴 찡하면서도 고인을 허허롭게 고이 보낼 수 있는 무심함을 느끼게도 한다.

그 번거로움과 비용과 시간만 제한다면 영안실에서의 ‘2박 3일’의 죽음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한 평생 이 세상 소풍 나와 살던 이를 그에 걸맞은 정성과 마음을 다해 품위있게 보내드리는 것이다.

어디로 가는 걸까.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물론 답은 모른다. 진짜 죽음을 체험한 사람은 되살아날 수가 없으니 그 실상을 체험했다 해도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죽음 이후에 대한 호기심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영생에 대한 희망까지 얽히고 설켜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는 다양하다. 시대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변화를 겪는다.

예를 들어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벽화를 보자. 죽은 이를 모신 석실 벽 사방으로 생전의 생활모습을 다채롭게 그려놓았다. 이어 천장쪽으로 가면 연꽃을 비롯해 불교적 상징들이 자리잡고 다시 그 위쪽으로 선계(仙界)의 모습을 펼쳐놓았다. 사자는 생물학적 죽음 이후에 신선이 된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하늘로 오르게 하는 데는 특이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티베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특정한 들판에 내버려 독수리에게 살점을 뜯어먹게 한다. 이러한 조장(鳥葬 또는 천장·天葬)을 통해 죽은 이의 영혼이 새와 함께 하늘로 오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독수리가 시신을 깨끗이 먹어치울수록 영혼이 더 좋은 곳에서 환생한다고 믿는다. 장례는 다음 생을 위한 준비이기에 라마교 승려와 함께 장례를 치르는 유족의 표정은 눈물이 없고 담담하다고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전한다.

이에 비하면 육체 자체가 어느 시점이 되면 부활한다고 믿고 미라로 만들어 보존해 두었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죽음관은 오히려 상당히 유물론적이다.

죽음의 의미는 물론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달라진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1914∼84)가 ‘죽음의 역사’에서 보여준 지극히 20세기적인 특이현상 한 가지. 아리에스는 1973년 프랑스의 인본주의 역사가이자 예수회 신부인 프랑수아 드 댕빌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동료 신부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백혈병에 걸렸는데 자신의 상태를 완벽하게 의식하고 용기있고 지혜롭게 그리고 평온하게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후송한 병원 의료진에게 협력했다… 그곳은 끔찍했다. 세균이 득실대는 입원실 유리창을 통해 전화로밖에는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의 콧구멍에는 두 개의 흡입 튜브가 꽂혀 있었고 숨을 내쉬는 튜브 하나가 입을 막고 있었는데 나는 무엇이 그의 심장을 지탱해주는 장치인지를 알 수 없었다.‘남아서 당신과 함께 잠시나마 날을 지샐께요’ 그때 나는 댕빌 신부가 묶여 있던 양팔을 잡아당기고 숨을 내쉬는 마스크를 얼굴에서 떼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나에게 마지막 몇마디 말을 했는데 그것은 이런 것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내게서 죽음을 빼앗아가고 있어’.” 죽음이 그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 병원이 죽음의 시기를 늦추고 당기는 ‘권력’을 지니게 됐다는 얘기다.

이광일·주간한국부 기자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