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우 배추 캐어들여 김장을 하오리다/ 앞냇물에 정히 씻어 함담(鹹淡·짜고 덜 짠 정도)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짱아찌라/ 독 곁에 종두리요 바탱이 항아리요/ 양지에 가가 짓고 짚에 싸 깊이 묻고…”

1816년‘농가월령가’에 나오는 김장 담그는 모습이다. 오늘날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대로 김장과 장 담그기는 전통적으로 한 해의 2대 행사였다.

이렇게 천년 이상을 우리는 살아왔다. 그래서 김치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김치라는 말에 남다른 애착이 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김치란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김치연구가 이성우씨에 따르면 고려 중엽 이규보의 문집‘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김치무리 담그기를‘염지’(鹽漬)라 했는데 이는 ‘지’가 물에 담근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기에는 유교의 도입으로 복고주의가 유행, 중국에서도 6세기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저’(菹)라는 명칭이 쓰였다. 지가 저가 된 것이다. 조선 초기 1518년에 나온‘벽온방’( 瘟方)이라는 책에는“무딤채국을 집안 사람이 다 먹어라”라는 말이 나오며 저를‘딤채조’라 했다. 즉 소금에 절인 채소에 소금물을 붓거나 소금을 뿌림으로써 국물이 많은 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은 숙성되면서 채소 속의 수분이 빠져나오고 채소 자체는 채소 국물에 침지(沈漬·가라앉음)된다. 여기서 우리 고유의 명칭인 침채가 생겨난 것이다. 한글학자 박갑수씨는 침채가 팀채가 되고 이것이 딤채로 변하고 다시 김채로, 김치로 됐다고 풀이한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김치를 먹었을까.

학자들은 삼국시대 이전부터로 추정하고 있지만 기록이 없어 어디까지나 추정이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중국측 기록에 오이지 비슷한 발효식품에 관한 기록이 있고 일본 문헌‘고사기’(古事記)에도 단무지의 원조라 할 수수보리지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수수보리는 백제 사람으로 일본에 누룩으로 술빚는 법을 전한 인물. 따라서 삼국시대에도 지금의 김치 비슷한 발효식품이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우리 문헌에 김치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중엽 이규보가 지은 시에 “무장아찌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 겨울 내내 반찬되네”라고 한 내용이다.

조선 중엽에 고추가 수입되면서 김치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그 이전의 김치는 소금물에 담그거나 천초 회향 같은 향신료를 이용해 담갔다. 1600년대 말엽의 문헌으로 추정되는‘요록’(要錄)에도 무·배추·오이·동아·고사리·청태(콩) 등으로 담근 김치와 무를 소금물에 담근‘동치미’(冬沈)등 11종류의 김치를 소개하고 있지만 고추를 재료로 쓴 것은 하나도 없다.

1715년경의‘산림경제’(山林經濟)의 김치항목을 보면 고추가 들어온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오늘날과 같은 김치는 보이지 않고 소금에 절이고 식초에 담그거나 향신료와 섞어 만들고 있다.

그러다가 50년이 지난 1766년에 나온‘증보(增補)산림경제’에서는 김치에 고추를 섞은 것이 보인다. 김치 담그는 법을 보면 잎줄기가 달린 무에 청각채, 호박, 가지 등의 채소와 고추, 천초, 겨자 등의 향신료를 섞고 마늘즙을 듬뿍 넣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총각김치와 같은 것이다. 또 오이의 3면에 칼자리를 넣고 그 속에 고춧가루, 마늘을 넣어서 삭히는 것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오이소박이이다. 이밖에 동치미·배추김치·용인오이지·겨울가지김치·전복김치·굴김치 등 오늘날의 김치가 거의 다 등장한다.

18세기에 이미 우리 김치는 중국에 ‘수출’됐다. 1712년 김창업이 쓴 ‘연행일기’(燕行日記)’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귀화한 할머니가 그곳에서 김치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 할머니가 만든 동치미의 맛은 서울의 것과 같다”는 기록이 있다. 1803년의 한 기록에도 “(중국)관리집의 김치는 우리나라 김치 만드는 법을 모방해 맛이 꽤 좋다”는 구절이 나온다.

김치 수출이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광일·주간한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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