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대통령을 둘러싸고‘정치전’ 이 재연되고 있다.

12월8일로 예정된 경제청문회에 김 전대통령을 불러 세우느냐는 문제다.

각 당마다 미묘한 이중기류가 흐르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나라당의 반대, 자민련의 적극 추진, 국민회의의 검토 입장간에 줄다리기가 팽팽하다.

경제청문회가 성사된 명분은 경제파탄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교훈을 얻자는 것이다. 각 당도 ‘정책 청문회’ 가 돼야 한다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정치적’ 으로 흘러가고 있다. 각당의 속사정도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 YS의 증인 채택이 가져올 정치적 이해득실이 내년 정국 구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 공통된 인식이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이 증언한다는 자체만으로 정치적 성격을 배제할 수 없다는 원론적 지적도 나온다.

우선 한나라당의 입장. 특히 민주계에서는 김 전대통령의 증인 채택 문제가 언급되는 것 자체를 대단히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민주계 의원들은 나아가 이회창 총재가 여야 총재회담에서 날짜까지 박아 청문회 개최에 합의한 것에 노골적으로 못마땅해 하고 있다. 이들은 “청문회가 진행되면 YS를 불러내라는 여론이 솟구칠 것이 뻔하고, 인신공격에 마녀사냥식으로 변질될 공산이 큰데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우려하고 있다.

청문회 합의 “민주계 힘빼기 아니냐” 의심

민주계 의원들은 지난 11월 12일 신상우 국회부의장 주재로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박종웅 의원은“김 전대통령이 검찰 조사까지 마치고 자신의 책임이라는 점을 밝혔는데 무슨 증인이냐” 며 YS 증인채택 불가론을 주장했다. 신상우 부의장도 “증인채택과 청문회 대상이 완전 합의되지 않으면 청문회를 열어서는 안된다” 고 지원했다.

이들은 경제지식이 부족한 YS가 청문회에서 ‘망신’ 이라도 당하고 전 정권의 실세였던 민주계가 흠집이라도 잡힐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다. 청문회를 통해 YS와 민주계를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이 몸담았던 한나라당의 위신을 추락시키기는 것이 여권이 노리는 청문회의 목적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 관계자도 사석에서 “나같으면 그렇게 쉽게 청문회 개최에 합의해주지 않는다. 가족까지 합쳐 실업자들이 수백만명에 달하는 마당에 청문회가 열려 고통의 근원이 재론되면 한나라당이 배겨날 수가 있겠느냐” 고 털어놨다.

민주계에서는 또 내년초 정계개편을 위한 사전포석설까지 거론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여권이 정계개편을 위해 우선 민주계의 힘을 빼 놓자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민주계 의원들간에 팽배해 있다” 고 말했다.

그러나 이회창 총재를 비롯한 한나라당의 비민주계 지도부에서도 입장 정리가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은 하루라도 빨리 YS와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데다, 경제파탄의 진상규명이라는 원칙적 명분 때문에 쉽사리 고집을 부리기 어려운 처지다.

이회창 총재는 또 YS증인채택문제로 당의 내분이 초래되는 사태도 염두에 두고 이를 막아야 할 입장이다. 운신의 폭이 제한돼 있다는 얘기다.

실효성, 여론, 정국상황 놓고 저울질

다음 국민회의는 실효성과 여론, 정국상황 등 3가지 측면에서 상황을 저울질하고 있다. 각각의 기준에 따라 의견이 엇갈린다.

실효성 부분에 대해서는 “별무소득” 이라는데 이론이 없다. 김원길 정책위의장은 “솔직히 김 전대통령이 증언한다고 해서 특별히 새로운 얘기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고 말했다. 숨가쁘게 진행됐던 환란 과정이나, 기아자동차 종금사 한보사태 등 청문회 대상에 대해 YS가 정확한 경제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없고, 상황을 제대로 장악하고 있지 못했다는데에 대다수 전문가들은 동의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치가 여론을 먹고 산다는 점을 감안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민회의측의 특위 조사위원으로 선정된 한 의원은 “청문회 진행과정이 TV로 생중계되고, 국민들이 울화통을 터뜨리게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시민단체나 재야에서 YS를 증언대에 세우라고 데모라도 하게 되면 무슨 명분으로 피해갈 수 있는가” 라고 상황논리를 강조하고 있다. 한나라당 민주계 의원들이 우려하는 ‘여론에 의한 YS 희생양론’ 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YS에 대한 비디오 증언, 서면 증언 얘기도 동일 선상에서 풀이할 수 있다.

조세형 총재권한대행도 “청문회 증인에 성역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 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원길 의장은 “증인출석요구서는 1주일전에 송부돼야 하기 때문에 김 전대통령을 청문회 중간에 증인으로 채택하려면, 전체 청문회 활동기간이 변수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물론 청문회 기간 문제도 될수록 기간을 줄이려는 한나라당의 2주일안과 국민회의·자민련의 20일 내지 3주일 안이 맞서 있다.

국민여론 문제는 사실 청문회 개최의 본질과 연관해 봐야 하는 측면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경제 관료들은 내년 하반기부터 경기가 회복하고 경제가 정상화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비관론도 만만치 않다. 고실업률은 항상화하고 고통은 지속되며 물론 90년대초와 같은 ‘흥청망청’ 경기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전망이다.

그러므로 정부 예측과 달리 내년에도 경기가 회복되지 않을 경우, 쏟아질 비난과 국민적 악감정을 생각한다면 여권은 사전에 책임소재를 분명하게 국민들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즉 여권으로서는 경기가 회복되지 않을 ‘만약의 사태’ 에 대비해, “경제파탄의 주범은 여러분이 청문회에서 보셨듯이 전 정권과 한나라당이올시다” 라는 예방주사적 메시지를 남기고 내년을 맞아야 한다는 논리다.

이같은 논리는 주요 경제부처 장관들을 추천한 자민련측에 더욱 적용된다. 경제청문회에 자민련이 가장 강경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같은 연유에서라는 관측이 많다.

‘YS증인 채택’ 신중론도 강하게 제기

하지만 국민회의의 대야 협상채널에서는 “정국 상황을 고려할 때 YS 증인 채택은 가급적 삼가야 한다” 는 신중론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1년 내내 파행으로 치달았던 여야 대치 정국이 총재회담을 계기로 가까스로 정상화했는데, 실효성을 기대하기 힘든 YS 증인 채택 문제로 다시 난국을 초래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당 지도부에서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 이라는 단정적 전망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자민련의 결사적 YS 증인 채택 주장도 한나라당과 마찬가지로 내년 정계개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여야 총재회담에서 드러났듯이 최근 정국구도가 국민회의와 한나라당의 양당구도로 흘러가는 듯한 인상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강하고 인상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자민련은 소외집 단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는 위기 의식이 자민련내에 짙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회의와 한나라당내 민주계와의 ‘민주대연합’ 기도 차단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는 것이 자민련의 현 주소이다.

자민련은 이같은 기조 아래 지난 12일 청문회조사특위 전체회의를 열어 김 전대통령 부자를 비롯한 29명을 증인으로, 강만수 전재경원차관 등 12명을 참고인으로 잠정 결정했다. 자민련 관계자는“김종필 총리가 한때 ‘김 전대통령을 직접 증인으로 할 필요가 없다’ 는 취지의 말을 하고 우리도 영남권 진출을 늘려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온건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 이라며 “그렇지만 총재회담에서 소외되고 차별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성이 강해진만큼 사정이 달라졌다” 고 설명했다.

같은 여권이지만 자민련은 입장 달라

한편 일각에서는 김종필 총리와 박태준 총재, 이건개 박철언 의원 등 자민련 지도부와 김 전대통령과의 구원을 떠올리기도 한다. 문민정부 때 ‘팽’ 당하고 사법처리당하는 등 ‘고난’ 을 겪었던 이들에게 ‘사감’ 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느냐는 곁가지성 분석들이다.

어쨋든 현재 여야간 청문회 쟁점은 증인채택 뿐 아니라 활동기간, 그리고 청문회 대상 선정까지 핵심사항들이 미제 상황이다. 여권은 한보, PCS, 종금사, 금융실명제 졸속 시행, 금융개혁법과 노동개혁법, 기아 문제 등 전 정권의 경제실정 전반을 청문회 대상으로 주장하고 있는 반면에 한나라당은 환란규명으로 국한하되 대선 후 비상경제대책위, 대통령직 인수위의 정책 등 현정부의 대응방식도 포함시키자고 맞서고 있다.

결국 YS의 증인 채택 여부는 김대중 대통령의 최종 결심과 이들 쟁점사항에 대한 여야 협상 추이에 달려 있으며, 그 과정에서 협상카드로 작용할 소지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김 전대통령의 아들 현철씨 문제도 한꺼번에 물려 들어가 복잡한 양상이 전개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PCS사업문제가 청문회 대상으로 확정될경우 항상 막후 영향론자로 거론돼온 김씨를 빼고는 얘기가 진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여권의 주장인데, 한나라당으로서는 YS와 현철씨를 분리해 대응하기도 입장이 곤란하다고 할 수 있다.김병찬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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