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들은 시간을 앞서 살아가는 사람들. 6개월 앞의 유행을 창조하는 이들에게는 미래를 해석하는 역할까지 요구되고 있다.

파리 밀라노 뉴욕컬렉션 등이 세계의 이목을 모으는 것은 단지 다음 시즌에 유행할 컬러나 스타일 스커트길이가 선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스타디자이너의 탄생을 매스컴이 지켜보고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사기 위해 세계의 부호와 바이어들이 몰려들기 때문만도 아니다.

컬렉션이 일반인의 관심까지 끌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미래에 대한 전망과 사회, 인간성의 변화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12~15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울600년기념관에서 벌어진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컬렉션에도 21세기를 바라보는 디자이너들의 시각이 담겨 있었다. 진태옥 한혜자 김동순 등 국내 톱클래스의 디자이너들이 모여 1년에 두 차례씩 갖는 이 컬렉션은 세계 유명컬렉션들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국내 패션의 흐름과 기량을 엿보는데는 빠뜨릴 수 없는 행사이다.

아방가르드적 표현과 로맨틱한 분위기 공존

99년 봄/여름을 겨냥해 14명의 중견디자이너와 4명의 신진디자이너가 만든 무대에는 ‘세기말’ 이 주제로 올려졌다. 문명위기감을 반영한 아방가르드적 표현과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불어넣어주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공존하는 식으로 ‘세기말’ 에 대한 해석은 제각기 달랐지만.

아방가르드의 대표적인 디자이너는 진태옥. 비대칭적인 커팅과 커프스와 스커트볼륨을 과장하는 등 강력한 표현과 함께 배경음악 모델의 메이크업까지 쇼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무겁고 심각하게 연출됐다.

주름가공 홀치기기법을 이용한 이색적인 소재로 옷의 형태감을 살려낸 루비나의 경우는 아방가르드와 엘레강스한 멋이 만난 경우. 박윤수는 캐주얼과 밀리터리룩의 조화를 통해 거리패션을 아방가르드적으로 풀어냈다. 아방가르드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비관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로맨티시즘은 긍정과 낙관을 기조로 삼고 있다.

로맨티시즘의 대표는 한혜자씨. 스팽글 자수 니트 등을 사용하고 엉덩이를 과장한 버슬형 원피스 등 여성적이고 매혹적인 스타일을 선보였다. 다양한 길이의 스커트, 베이지와 보라의 화사한 매치 등을 보인 지춘희, 니트와 시스루소재를 겹쳐사용한 김선자 등도 로맨틱한 분위기가 강했다.

남성복이 상당수 선보인 것도 특기할 만한 현상이다. 장광효 양복형이 남성복만으로 무대를 꾸몄고 이상봉 정구호 박항치 등도 남성복을 상당수 무대에 올렸다. 남성이 새로운 패션수요층으로 부상했다는 것이 실질적인 이유지만 이면에는 21세기적 남성성에 대한 탐구도 담겨 있다. 남성복에 니트 실크 등 부드러운 소재를 사용하거나 리본이 달린 구두를 배합하는 등 장식적이고 가벼운 표현이 강해졌다.

“역량 뛰어나지만 조화가 없다” 비판도

최근 고부가가치산업으로서의 패션에 대해 기대가 높아지면서 SFAA컬렉션을 보는 눈길도 달라지고 있다. 아직까지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배출하지 못했고 패션의 중심지에서 빗겨나 있긴 하지만 이만한 규모의 컬렉션을 개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컬렉션이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장소는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 도쿄 마드리드와 서울 뿐이다.

그렇다면 SFAA컬렉션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한국의 패션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이번 컬렉션에 참석한 일본 패션평론가 도모코 오카씨는 “한국패션은 아직 꿈을 꾸는 것같다.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애쓰고는 있지만 무엇을 팔겠다는 인식이 부족한 것같다” 고 말한다. 컬렉션이 디자이너와 바이어 소비자의 만남을 위한 과정이 아니라 디자이너들의 자기과시용 무대가 되어버린 점을 꼬집는 것. 그는 또 “개개인의 역량은 뛰어난지 몰라도 전체적인 조화가 없다. 반찬 한 가지 한 가지의 맛도 중요하지만 상 차리는 방법에 따라 식욕을 돋구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한다” 고 말한다. 컬렉션의 성격이 분명해야 바이어의 움직임도 분명해지는데 한국패션을 대표하는 SFAA컬렉션에는 확실한 색깔과 스타일이 없다는 얘기다.

김동선·문화과학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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