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방을 출범시킨 보리스 니콜라에비치 옐친(68) 대통령. 그는 끝없이 불가능에 도전했고 고비 고비마다 정치생명을 건 과감한 승부사적 기질로 위기의 격랑을 헤쳐 온 ‘민주화의 대부’였다.

공산실험의 실패와 구 소련의 붕괴, 러시아의 탄생, 세계질서의 재편 등 20세기 마지막 대사건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삶의 궤적은 러시아의 격동의 세월에 따라 그려지고 지워졌다.

건설노동자로 출발한 그였지만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현실의 벽’을 깬 승부사였다. 96년 1월 대선 6개월을 앞두고 대권 레이스에 뛰어 든 그의 지지율은 한자리수였다. 그러나 25%의 지지율로 앞서가던 겐나디 주가노프 공산당 후보를 따라잡고 96년 7·3 결선투표에서 대권을 거머쥐었다. 또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시절 공산당을 탈당할 때, 맨주먹으로 강경 쿠데타군과 맞서 싸울 때, 의회를 공격한 무장세력을 탱크로 진압할 때, 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았다. 그 때마다 ‘옐친은 끝났다’는 평가를 무색케 하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95년 7월과 10월 심장병으로 두차례 입원했으며 7·3 결선 투표 이후 지금까지 병든 몸을 다스리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다. 어느날 갑자기 찾아 온 감기증세로 몇주일씩 모스크바 인근이나 흑해 주변의 소치 휴양지로 요양을 떠나야 했다.

이 와중에 98년 8월 러시아를 덮친 금융위기는 러시아경제를 피폐화시켰다.

그는 특유의 강한 성격으로 나쁜 평가를 받기도 했다. 주가노프 공산당 당수는 95년 12·17 총선을 앞두고 “한 번이라도 옐친을 만난 사람은 그를 민주주의자로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독선적인 행태를 꼬집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같은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오늘의 러시아와 옐친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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