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 세기를 맞은 이 시점에서 대륙에서 뻗어내려 백두대간을 근간으로 하는 우리 땅의 나라이름을 생각해 본다.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한 뒤, 1910년 10월 1일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찌는 서울 남산의 왜성대(倭成臺)에 조선총독부의 간판을 내걸고 시무식에서, “이 땅, 이 나라의 판도는 오늘부터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아니라 ‘조선(朝鮮)’이라 부른다. ‘한성(漢城)’은 ‘경성(京城)’이라 한다. 조센진(朝鮮人), 즉 한도진(半島人)은 ‘조선’보다는 ‘대한제국’에 미련이 남아있고, ‘경성’보다 ‘한성’에 더 연연하며 ‘일본제국(日本帝國)’의 신민(臣民)이기 보다는 ‘한민족(韓民族)’이기를 원하지만 나 데라우찌를 믿고 지시대로 봉공(奉公)하라”는 일장 훈시를 떠벌렸다.

일제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맺자 맨먼저 ‘대한’이라는 나라이름을 말살하고 한성(한양)을 저들 마음대로 일본의 수도 동경의 꼬리글자인 ‘경(京)’자를 떼어다가 ‘한성’의 머리글자인 ‘한(漢)’자를 지우고 ‘경성’으로 창지개명(創地改名)하였다.

순종황제를 이왕(李王)으로, 영왕(英王)을 영친왕(英親王), 의왕(義王)을 의친왕(義親王)으로 격하, 개칭하였다. 나라이름을 뿌리뽑고, 황제를 평민으로, 500년 역사의 조선왕조를 ‘이씨조선(李氏朝鮮)’이라는 한낱 씨족국가로, 또 500년 전통의 왕도(王都)를 격하시켜 경기도에 예속시켰다.

모든 활자매체는 ‘한(韓)’이란 이름을 지우게 함으로써 한민족의 정기와 주체성 말살작업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도 “오등은 자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고 ‘조선’이란 명칭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3·1운동 이후 총독부의 허울좋은 문화정치에 따라 나라안에 생겨난 수많은 단체의 이름들이 모두 그 첫머리를 ‘조선’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라밖, 이를테면 만주, 중국, 제정러시아, 미국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단체들의 이름들은 하나같이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 ‘대한광복군’, ‘대한학생광복단’, ‘대한정의군정사’.‘한족회’,‘대한청년단’,‘대한독립군비단’등 모두 ‘대한’또는 ‘한’을 붙였다. 박은식의 ‘한국 혼’과 같은 저서도 같은 맥락에서 제목을 붙였다.

‘대한’이라는 이름은 고종34년(1897년)에 처음 사용하였다. 1897년 8월 고종은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제정,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 같은 해 10월12일 황제로 즉위, ‘조선’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대한’이란 나라이름을 사용했다.

물론, ‘조선’의 연원도 먼 옛날부터 ‘아사달(아침의 땅)’,‘아침 해 뜨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또 이익(李翼)의 ‘성호사설(星湖僿設)’에도 잘 나타나 있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은 본래 대륙의 동방에 있는 땅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그 땅에 사는 백성을 부르는 이름이 되고 나라이름이 되었는데 그것이 4천몇백년 전 단군(檀君)께서 처음 우리나라를 반포할 때 시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연원은 그렇다손 치고 고려말 이성계(李成桂)가 역성혁명에 성공, 새 왕조를 세우면서 그의 고향인 ‘화령(和寧:영흥)과 ‘조선’의 두가지 국호를 명(明)나라에 보내, 하나를 골라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명나라가 정해 준 것이 ‘조선’이다. 그 오랜 연원의 ‘조선’이란 이름이 사대주의에 오염된 셈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그동안 8차에 걸쳐 개정됐으나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빠진 적이 없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애국가는 오늘도 장엄하게 흐르고 있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