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이 정치판 물갈이 원년이 될 모양인가.’ 현역의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16대 총선을 세달 앞두고 여의도 의사당의 주인들이 다선·재선길을 막고 있는 난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현역을 괴롭히는 악재들은 당선의 첫 관문인 공천에서부터 ‘2여다야’로 인한 경쟁과열,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에 이르기 까지 첩첩산중이다. 계파간 공천지분 싸움과 자치단체장들의 도전, 지방선거 성적, 선거구 재조정 등이 재공천에 대한 자신감을 흐리고 있다.


◆재공천을 자신할 수 없다

전쟁(총선)에 임해서 다계파 공존은 불가능한 것인가. 이달 6일 국민회의 이인제 당무위원 휘하의 전 국민신당 지구당위원장들이 권리주장을 하고 나왔다. 98년 국민회의와 합당할 때 약속받았던 16대 총선에서의 20% 지분보장을 요구한 것. 이들은 이위원에게 요구가 수용되지 않을 경우 ‘새로운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했다.

민주당으로 거듭 태어날 국민회의 현역의원들 상당수도 공천 장벽에 직면해 있다. 지금까지 치러진 지방선거의 공천 실패, 지역구에서의 잡음, 재판 계류 등으로 재공천을 기약할 수 없게 된 것. 1월7일 마감한 1,2차 조직책 신청을 마감한 결과 호남 7.6대 1, 서울 7.1대 1, 경기 6.3대 1등의 높은 경쟁률이 잘 말해준다. 벌써부터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등 소장파나 영입파가 협공을 하는 양상이다.

호남에선 거의 모든 의원들이 도마위에 올라 있다. 공천을 자신할 수 있는 의원은 10여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지역 분위기다. 일부 뿌리가 약한 동교동계 의원들은 ‘물갈이 명분’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지역구 동정도 심상치 않다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수도권 다선 의원의 지지도가 낮게 나오는 것으로 알려지자 여당 중진들이 긴장하고 있다. 여권 핵심부가 총선을 앞두고 조직책 선정의 제1원칙을 ‘당선 가능성’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세대교체 바람이 중진들에게는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특히 민주당 조직책 선정위원회가 김대통령의 직할체제로 구성된데다, 개인적 인연과 지분배제 등 엄정한 공천기준을 강조하고 나선 게 관심거리다. 일부 중진까지도 당내 공천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 수도권 중진들이 원내외 구분없이 지역구 관리에 몰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상현 고문이 최근 지구당 조직책과 신당 지도부에 대한 경선론을 강조하고 나선 배경도 이와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민주당 창준위의 우상호 부대변인 등 ‘젊은피’들의 도전을 뿌리치면서 민주적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전략이라는 이야기다.

이종찬 부총재는 언론문건 파문으로 타격을 입은데다, 최근 정흥진 종로구청장까지 출마 가능성을 비치자 아예 지역구에 상주하고 있다. 경성사건 연루혐의를 받고 있는 정대철 부총재도 현재 진행중인 재판을 통해 무죄를 입증함으로써 명예회복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조세형 고문은 지역구(광명) 활동을 대폭 늘리는 한편, 지역공약 이행을 통해 기반 다지기를 강화하고 있다. 김영배 전 대행은 산악회 등 지구당 조직을 점검하면서 취약점으로 지적돼 온 호남출신 유권자들에 대한 접촉을 활발히 하고 있다.


◆선거구 조정, 누가 피해자 되나

여야 선거법 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면서 통합대상으로 거론되는 선거구를 맡고 있는 의원들이 속을 태우고 있다. 현재 여야는 선거법 협상 과정에서 인구 하한 8만5,000명, 상한 34만명을 기준으로 선거구를 조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이에 따라 부산 금정갑·을과 동래갑·을, 남구갑·을, 사상갑·을 등 8개 선거구가 4개 선거구로 통합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부산이 텃밭인 한나라당 현역의원 8명은 벌써부터 물밑에서 통합선거구 확보에 분주하다. 통합선거구 확보가 곧 공천권을 의미하기 때문. 금정갑의 김진재 의원과 금정 을의 김도언 의원은 지역구 뿐 아니라 부산전체에 대한 지금까지의 기여를 내세우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 고위중진들인 동래 갑의 박관용 의원과 동래 을의 이기택 위원장도 한판 싸움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상희(남구 갑) 의원과 김무성(남구 을) 의원, 권철현(사상 갑) 의원과 신상우(사상 을) 의원도 관계가 껄끄럽게 됐다. 특히 권 의원측은 시민단체 등에 의해 4년 연속 베스트 국회의원으로 선발된 의정성적을 들며 신의원측의 양보를 기대하고 있다.

선거구 통합과 관련한 갈등양상은 아직 명시적으로 표출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선거법 협상이 타결되면 치열한 공천경쟁과 이에 따른 후유증이 예상된다. 사정은 여권도 마찬가지. 일부 통폐합 대상 지역구 의원들은 당내 실력자와 경합하게 되는 불운을 안게 돼 의사당 재입성이 불투명해 졌다.


◆군소정당 거센 도전에 불안감 가중

군소정당들의 창당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선거구도가 ‘2여다야’로 잡힐 가능성이 커졌다. 이번 총선에 후보를 낼 것으로 전망되는 군소정당은 대체로 5~6개 정도.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과 기존 정치권 및 구정치권의 분파세력들이다. 기성 정치권의 틈새를 겨냥하고 있긴 하지만, 득표력의 한계선상에 있는 현역의원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다.

민주노동당은 1월10일부터 전국 40여개 지구당 창당 작업에 착수해 30일 중앙당을 창당, 본격적으로 총선체제에 돌입할 계획이다. 민주노동당은 울산, 부천, 안산 등 노동자들이 집중된 지역에 전략적으로 후보를 낼 계획이다. 노동자와 농민 위주의 정책으로 승부를 걸 경우 전국적으로 5% 이상을 득표해 비례대표도 배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무소속 홍사덕 의원과 마지막 재야인사로 불리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이 추진하는 개혁신당의 움직임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반DJP·비한나라당 노선’을 추구하는 개혁신당은 1월15일께 창당준비위를 발족해 세규합을 본격화한다는 계획이다. 이들은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한국의 선택 21’의 박계동 전의원, 김도현전 문체부차관 등은 물론 민주당으로부터 소외된 여권내 개혁성향의 인사와 한나라당내 재야출신 인사들에게도 손을 내밀고 있다.

‘희망의 한국신당’으로 당명을 정하고 1월11일 창당발기인 대회를 가진 김용환 의원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김의원은 허화평 전의원은 물론, 이수성 민주평통 수석부의장과도 접촉해 충청권과 TK세력의 연대 가능성이 주목되고 있다. 정호용, 허화평 전 의원 등을 중심으로 TK신당 창당 움직임도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다. TK정서를 바탕으로 독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할 경우 성공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계산이다. 부산·경남지역에서도 신당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후광을 등에 업은 김광일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문정수 전 부산시장 등 구민주계 인사들이 구심점이다.

민주당은 기본적으로 다당구도가 득표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지지기반이 겹치는 민주노동당의 영향력에 신경을 쓰고 있다. 자민련은 ‘TK 신당설’과 ‘한국신당’의 파괴력 규모에 긴장하고 있다. 한나라당도 군소정당의 출현이 득될 게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단체장 등의 거센 도전

총선 출마를 노리는 자치단체장들의 움직임은 현역의원들에게는 복병이나 다름없다. 헌법재판소가 단체장의 임기중 총선 출마를 금지한 선거법 조항에 대해 위헌결정을 했기 때문. 단체장들은 유권자 접촉 범위가 국회의원보다 상대적으로 넓다. 아울러 조기축구회, 노인회 방문 등 일상적인 직무도 곧바로 선거운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맞대결에서 결코 현역에 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서울 종로에서 뛰고 있는 국민회의 이종찬 부총재의 경우 정흥진 종로구청장이 도전장을 내밀자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구청장은 언론문건으로 난타당한 이부총재의 출마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출마를 기정사실화했다.

부산지역 현역 민선 구청장들도 최근 잇달아 총선 출마를 선언하거나 출마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재선으로 5년째 구정을 책임지고 있어 지역현안에 밝고 주민 인지도 면에서 상당한 우위를 보이고 있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이탈현상이 심화할 경우 충분히 기존 지역구 국회의원들을 위협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부산지역 현역 구청장중 출마 예상자가 4~5명에 달한다.

대구에서도 자민련 이정무 의원(남구)이 무소속인 이재용 남구청장의 출마설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대전에서는 송석찬 유성구청장의 총선 출마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자민련 조영재 의원을 긴장시키고 있다. 서울의 고재득 성동구청장과 김성순 송파구청장 등도 출마를 노리며 지지기반을 넓혀가고 있다.


◆무소속 돌풍에 무당파 유권자의 차가운 눈길

공천탈락자와 정치신인들이 한편에서 현역을 위협한다면, 또 한편에서는 기성 정치권을 불신하는 무당파 유권자가 차가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현역에게는 안팎의 시련이다.

중앙선거관리위의 한 관계자는 이번 총선에서 무소속 후보가 전체의 20%를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무소속 후보군은 우선 물갈이에 반기를 들 기성 정치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회의 원내외 지구당 위원장들은 이미 민주당의 신인 영입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해 왔다. 아울러 세대교체를 바라는 신인들도 이번 총선을 3김시대의 마지막 총선으로 보고 기반쌓기에 나설 전망이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어느 당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파가 전체 유권자의 40~5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들 무당파 유권자가 최종적으로 ‘지역우선’의 투표성향을 보일지, 아니면 ‘계층우선’성향을 보일지에 있다. IMF로 인한 빈부격차 심화 현상이 계층우선 투표성향으로 귀결된다면 현역의원들은 유탄을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민단체 낙선운동의 주요 타깃

재당선을 원하는 현역은 이제 시민단체의 ‘재가’도 얻어야 할 판이다. 이달 12일 발족하는 시민단체들의 총선 대응기구인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소속단체는 무려 100여개.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이 공동사무국을 맡는 총선시민연대의 주임무는 낙선운동. 의정활동 성적과 과거 경력 등의 기준을 바탕으로 공천자들에 대한 낙선운동을 펼칠 예정이다.

총선시민연대는 발족과 함께 시민사회의 ‘공천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발표한다. 이어 20일께 현역의원을 대상으로 하는 공천 반대인사 리스트를 작성해 공개할 예정이다. 아울러 단체의 선거운동 금지를 규정한 선거법 87조 개폐운동도 병행한다. 선거법 87조가 유지된다 하더라도 지역별 유권자 평가대회와 전국 버스투어 등을 통해 낙선운동에 돌입할 작정이다.

한국노총도 이달 7일부터 정치활동에 본격 돌입해 현역의원들의 몸을 사리게 하고 있다. 노총은 중앙정치위원회를 열어 조합원 여론조사, 총선후보 평가기준, 총선후보 선출방법 및 심사기준, 100억원 정치활동기금 모금을 추진키로 했다. 자체 후보를 내 20명을 당선시킨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지만,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총선후보 평가기준. 각당 후보에 대해 친노동계(30점), 개혁성(15점), 청렴도(15점), 당선가능성(30점), 제휴정당(10점) 등 5개 항목을 평가해 60점 이상인 후보는 당선운동, 40점 미만인 후보는 낙선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배연해·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