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김대중 대통령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아시아위크)’, ‘한국 증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머니투데이)’, ‘경기고가 낳은 3대 천재’….

국민의 정부 출범이후 한국 금융계의 실권을 쥐고 있는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을 따라 다니는 화려한 수식어다. 하지만 이 위원장은 1998년 정권교체 이전까지는 20여년 가까이 ‘재야(在野)’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위원장은 경기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하고,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천재’였지만 관운이 따르지 않았다. 재무부 과장시절이던 1970년대 중반 이 위원장은 특유의 총명함을 인정받아 당시 김용환 장관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지만 신군부 집권이후 사표를 내야 했다. 겉으로 드러난 이 위원장의 사직이유는 율산그룹의 몰락과 관계가 있었지만 그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했다’는 점도 중도하차의 간접적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입장이다.



튀면 손해보던 개발시대의 직장문화

이 위원장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1980년대 한국의 직장문화는 적당히 버티고 나이가 들면 급여와 직급이 저절로 높아지는 ‘연공서열-종신고용’문화였다. 똑똑하고 튀는 사람보다는 나이 많은 상급자들의 지시를 묵묵히 따르는 사람이 우대를 받았다. 이에 따라 튀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직속에 묻혀 지내는 것이 출세를 위한 샐러리맨의 성공전략이었다.

그렇다면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소위 ‘개발시대’에 한국기업들이 ‘연공서열-종신고용’을 인사관리 원칙으로 내세운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연공서열-종신고용’이 가장 효율적인 제도였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원이 내놓은 ‘고용방식의 다양화와 한국기업의 선택’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고도성장기에는 조직의 급속한 확대로 인력을 정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일해야 할 자리’보다는 ‘일할 사람’이 모자라는 시기이므로 기업들은 신입사원을 뽑아 교육시키고, 시간이 흐르면 승진시키는 단순한 정책만으로도 사람을 관리할 수 있었다. 성장기 청소년의 경우 밥을 많이 먹으면 저절로 키가 자라고 체력이 좋아지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청소년들도 나이가 들면 배가 나오는 중년 아저씨로 변하듯이 1996년 이후 한국 기업은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기 시작한다. ‘연공서열-종신고용’관행에 따른 과중한 인건비 부담이 기업들의 목을 죄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때 외환위기까지 터지면서 경제전체가 파국으로 치달았다.

비만환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량을 해야 하고, 감량을 하려면 먹는 것을 줄이고 운동을 해야 하듯이 한국 기업들도 살아남기 위해 직원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하기 시작했다.



대량해고, 비정규직으로 빈자리채워

먼저 대량 해고가 이뤄졌다. 삼성경제연구원에 따르면 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동안 국내 기업중 65%, 대기업중에서는 72%가 인력을 감축했다.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자리는 임금도 낮고 언제나 해고할 수 있은 파트타이머들로 채워졌다. 이와 관련 한국노동연구원은 “IMF체제 이전 81.2%였던 정규직 취업자 비중이 1998년말에는 57.7%로 감소한 반면 비정규직의 비중은 18.8%에서 42.3%로 증가했다”고 밝히고 있다.

감원뿐 아니라 급여·복리후생 삭감도 함께 이뤄져 1998년의 경우 30대 기업의 인건비가 1997년보다 42%나 줄었다. 30여년 넘게 지켜오던 ‘연공서열-종신고용’관행이 불과 3년만에 완전히 무너졌고, 자신의 직장을 ‘평생의 직장’으로 여기며 묵묵히 일해온 샐러리맨들에게는 엄청난 변화였다.

더욱 큰 문제는 지난 3년동안의 이같은 변화는 앞으로 다가올 더 큰 변화의 전조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삼성그룹이 최근 작성한 ‘삼성의 인사전략 방향’이라는 보고서는 ‘연공서열-평생직장’붕괴이후 한국의 샐러리맨들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될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삼성그룹은 보고서에서 ‘20대80’원칙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즉 “기존의 ‘양어장식’ 인력양성 방향을, ‘낚시형’으로 전환하겠다. 장기적으로 Keeping(유지)해야 할 핵심인력과 외부에서 확보할 수 없는 특성인력만 사내에서 양성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은 또 “앞으로 회사, 업종, 직종에 따라 제반 인사관리 기준을 과감히 차별화해 능력있는 직원에게 과감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입장이다. 요컨대 조직에서 필요한 20%를 위해 나머지 80%는 과감히 버리는 인사정책을 펼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삼성그룹 등 대기업들의 인사혁신과 관련 서울대 경영대 최종태교수는 “IMF체제 이후 연봉제 도입과 파트타이머 채용 등 노동불안이 심화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노동조합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적당히 버티면 살아 남았던 20세기식 샐러리맨에게는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