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 한다.’

경제학에 대해 원론적인 지식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어, 그레샴의 법칙이네’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은 원래 16세기 영국의 경제학자였던 토마스 그레샴(Thomas Gresham·1519~1579)이 주장한 화폐이론이지만 요즘에는 ‘나쁜 것이 좋은 것을 몰아낸다’는 의미로 다방면의 사회현상에 원용되고 있다.

요즘 주요 대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은 말 그대로 ‘그레샴의 법칙’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조직에서 꼭 필요한 20%의 핵심 직원들은 줄줄이 회사를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회사입장에서 ‘떠나도 괜찮다’라고 평가를 내린 나머지 80%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충성심저하, 금전적으로도 퇴사가 유리

현대, 삼성, LG그룹의 경우 정보통신 관련 계열사들을 중심으로 인력들이 대거 퇴사, 경영상의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S그룹 L임원의 경우 지난해말 스톡옵션을 받고 인터넷 관련 기업의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또다른 대기업의 경우에도 ‘핵심요원’으로 분류됐던 정보통신분야의 팀원이 통째로 코스닥 상장을 앞둔 벤처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삼성SDS의 경우 전체 직원의 10%가 퇴사했거나 퇴사를 고려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대기업에서 이처럼 퇴사열풍이 부는 이유는 뭘까. 우선 직원들의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IMF체제 이후 현저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우리는 한 가족’이라며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했던 회사가 동료직원들을 가차없이 해고시킨 것을 목격하면서 ‘우리 회사’라는 개념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의 충성심 저하와 함께 회사를 떠나는 것이 오히려 금전적으로도 유리하다는 점도 퇴사를 부채질하고 있다. 실제로 인터넷, 정보통신 관련 업체들의 경우 주가가 급등하면서 직원들이 술렁이고 있다. 과거에 헐값으로 받았던 ‘우리사주’의 가치가 급등, 직원들 사이에 억대부자들이 속출하면서 ‘우리사주’의 처분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려는 것이다.

한국통신프리텔의 경우 정식직원 700여명이 모두 2,000~5,000주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데, 지난 6일 주가가 19만4,500원인 점을 감안하면 이미 대부분이 억대부자이다. 코스닥 등록으로 6일 현재 주가가 5만5,100원인 한국통신 하이텔도 이미 종업원 1인당 수천주씩을 받아 억대부자의 반열에 올랐으며 한솔PCS도 1997년 이후 3~4차례 우리사주를 나눠줘 대부분의 종업원들을 부자로 만들었다.



당근·채찍 동시에 쥔 인재유출 방지책

이처럼 인재들의 탈출이 계속되면서 대기업들도 갖가지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스톡옵션(Stock Option)’의 도입이다. 회사주식을 유리한 가격으로 매수할 수 있는 권리인 스톡옵션은 미국에서는 성과가 우수한 임직원들에게 주어지는 인센티브로 생겨났지만, 한국에서는 인재유출 방지수단으로 바뀐 것이다.

현대그룹과 LG그룹의 경우 2000년 신년사를 통해 연구직이나 임원 등을 대상으로 스톡옵션을 도입할 것임을 선언했으며, 삼성그룹은 올해부터 스톡옵션을 전계열사로 확대, 핵심인력의 경우 연봉의 200배이상을 스톡옵션으로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했다.

삼성그룹 계열사인 제일모직 관계자는 “인재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계열사별로 스톡옵션의 적용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은 인재유출을 막기위해 스톡옵션이라는 ‘당근정책’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이미 회사를 떠난 ‘유출 인력’에 대한 감시와 경고·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인재유출로 고심하는 대부분의 기업들은 공통적으로 사적전화 금지, 사내 보안강화 등을 통해 헤드헌터 등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A업체의 직원은 “이미 벤처기업으로 옮겨간 직장 동료들로부터 전화연락이 오면 오해를 받을까봐 E메일로 연락을 주고 받고 있다”고 말했다.

심한 경우에는 퇴사한 직원에게 ‘조직의 쓴 맛’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S그룹의 경우 계열 S증권에 근무하던 직원이 D증권으로 옮긴뒤 S증권과 유사한 인터넷 주식거래 시스템을 개발했다는 정보를 입수, ‘기업비밀 유출’로 검찰에 고발해 구속시켰다. S그룹 관계자는 “평소 같으면 경고차원에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일벌백계(一罰百戒) 차원에서 강경대응 했다”고 말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S그룹의 경우 회사를 그만두고 인터넷 벤처기업을 창업,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는 전직 임원에 대해 회장의 친필 경고서한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