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초만해도 L(53)씨는 어엿한 중산층이었다. 안정된 직장에다 부인과 2녀1남의 자녀들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2년여가 지난 지금, L씨는 더이상 추락할 곳이 없어졌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자리잡은 노숙자들의 쉼터 ‘자유의 집’이 그의 거처다. 세끼 밥과 잠자리를 여기서 해결한다.

IMF사태가 한국전쟁 이후 최대 비극이라면, 이 비극을 가장 철저하게 맛보고 있는 부류는 노숙자들이다. 노숙자(露宿者)는 말 그대로 집없이 길거리에서 잠자는 사람. 그러나 한국적 의미의 노숙자는 범위가 좀더 넓다.

노숙자 수용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이들 시설이 없으면, 꼼짝없이 길거리로 나앉아야 하기 때문이다. 역 부근의 값싼 무허가 여인숙, 속칭 ‘쪽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정상적인 거처가 없다는 점에서 노숙자에 포함된다.

L씨가 자유의 집으로 처음 온 것은 지난해 7월. 고향 광주에서 사업에 실패해 재산을 몽땅 날리고 부인과 이혼한 뒤였다. L씨가 사업을 시작한 것은 98년 중반. 대위로 예편한 뒤 18년간 다니던 모 정부산하기관을 퇴직하면서 였다. 구조조정이 횡행하던 터라 ‘눈치보느니 사업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퇴직금 1억원으로 부인에게는 식당을 내주고, 자신도 따로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그에겐 사업감각이 없었고, 운도 때도 따라 주지 않았다. IMF통에 식당에도 파리만 날렸다.


"더 이상 망할것도 없다"

양쪽으로 적자를 보면서 빚더미에 올라 앉았고, 급기야 집까지 압류당했다. 부인과 불화가 잦았고 급기야는 이혼까지 했다. 월세방에 세자녀를 남겨 놓고 상경한 곳이 자유의 집이었다. 부인과 재결합해 가정을 일으켜 볼 요량으로 한달만에 내려갔지만 여의치 않았다. “재입소 하지 않으려 고심도 많이 했는데, 숙식문제를 해결할 길이 막막했다.” 그가 지난해 9월 자유의 집으로 되돌아 온 이유다.

자유의 집에서 L씨의 침실동료들은 모두 14명. 옷장이 12개밖에 없어 자신은 가방에 옷가지를 넣어 둔다고 한다. 하지만 숙식은 일단 해결되고, 앞으로 자립기반 쌓는데 도움이 될까하는 희망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는 “더이상 망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큰딸은 대학 2학년을 마친 뒤 휴학상태고, 고3 딸은 취업했다. 고교생 막내아들은 집안일에 충격을 받아 가출했다 들어 왔지만 아직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다. L씨의 유일한 희망은 집안을 일으켜 세워 제대로 된 가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녀들을 위해서도 어떻게든 부인과 재결합할 생각이다. 요즘 그는 공공근로와 건설현장 잡부일로 번 돈을 자녀들에게 부쳐주고 있다. “정부에서 영세민을 위한 임대 아파트라도 배려해 주었으면”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개소 1년, 8,500명 거쳐가

자유의 집에 기거하는 노숙자들은 1월7일 현재 963명. 4일로 개소 1주년을 맞은 자유의 집을 거쳐간 노숙자는 8,500여명에 이른다. 최성남 사무장의 말에 따르면 요즘도 매일 20~30명이 새로 들어온다. 이곳 노숙자들도 부류가 다양하다.

IMF실직자(20%), 단신 가족해체 노숙자(50%), 정신질환·알코올 중독자 등 치료대상 노숙자(20%), 만성 부랑노숙자(거지·10%) 등이다. 이중 IMF실직자는 중류생활자로 IMF바람에 실직하거나 부도를 맞아 추락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활의지가 높아 대개 몇달 정도 여기서 숙식을 해결한 뒤 재기기반을 만들어 자진퇴소한다는 것이 최 사무장의 이야기다.

단신 가족해체 노숙자는 고아원이나 불우가정 출신으로 처음부터 사회적 기회가 제약됐던 사람들이다. 불완전 고용에 주거도 불안정한 상태에서 건설잡부 등을 전전해 온 부류다. IMF로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숙식해결 공간이 일시에 없어진 탓에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순수 노숙자’는 전국에 걸쳐 450~500명. 서울에 250여명이 있고, 나머지는 지방 대도시에 있다. 대부분 노숙자 쉼터의 집단생활이 싫다며 지하도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이다. 순수 노숙자는 서울에서만 IMF 중 한때 2,000여명에 달하기도 했다. 쉼터 등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노숙자는 4,500여명(서울 3,500명). 역근처 쪽방에서 기거하는 사람을 포함하면 1만명에 이른다는 추산도 있다.


"형제들 있지만 연락 못해"

98년 노숙자 대책사업으로 마련된 쉼터는 서울에 100개, 지방도시에 50개가 있다. 지방도시 중 쉼터가 가장 많은 곳은 부산으로 12개. 운영비는 국가에서 85%, 해당 지자체가 15%를 담당한다.

복지부 관계자는 “노숙자 대책을 기본생존수단을 제공하던 과거의 방식에서 사회복귀 지원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쟁에서 밀리긴 했지만 아주 망가지지 않고, 아직 가능성이 있는 실직 관련 노숙자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이야기다.

전남 담양이 고향인 K(38)씨는 자유의 집에서 고참이다. 비디오 대여점을 크게 시작했다 털어먹고 지난해 1월16일 여기로 왔다. 작년 3~12월 강원도 평창에서 숲가꾸기 공공근로를 한 뒤 올 1월3일 되돌아 왔다. 공공근로로 모은 돈으로 빚을 일부 갚았다고 한다. 결혼은 포기했다는 그는 고향과 소식을 끊고 산다. “고향에 형제들이 있긴 하지만, 미안해서 연락 한 번 안했다. 친구들 통해서 안부만 확인했다.”

K씨는 3월쯤 날이 풀이면 다시 평창으로 가서 약초를 캘 계획이다. 돈이 좀 모이면 리어카 행상이라도 할 생각이다. 그러면서 K씨는 연신 기자에게 자기 얼굴이 나오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얼굴 나오면 집에서 찾아올까 겁나요. 이 상태로는 도저히 볼 면목이 없습니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배연해·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