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자 서봉수가 백차례. 지금까지 전적에서 서로 흑을 들고 이겼으니 조남철로서도 흑을 잡은 이 바둑이 아무래도 편할 것이다. 그러나 막판이란 건 사람을 쥐어짜게 만든다. 별의별 망상이 머리속을 괴롭힌다. 흔히 하는 얘기로 부동심(不動心)을 갖기 힘들다는 뜻이다.

“내가 만약 이 바둑을 진다면...” “내가 벌써 이렇게 늙었나...” 조남철로서는 이같은 생각들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철철 넘쳐나는 힘을 자랑삼아 19세 청년 서봉수는 욱일승천의 기세를 타고 있고, 49세 챔프는 혼자 몸도 가누기 힘든데 20kg의 완전군장을 더하였으니 승부는 이미 정한 이치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까. 조남철이 가진 심적부담은 완전군장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의 바둑은 소목이 주류였다. 서로 한귀씩을 굳혔고, 서로 실리전법으로 착실하게 흐른다. 하기야 큰 바둑일수록 급히 서두는 쪽이 불리한 법이다. 길게 가급적이면 패를 끝까지 ‘쬐는’건 도박판에서만 일어나는 진풍경은 아닌 것이다.

초반의 열기가 서서히 피어날 즈음, 조남철은 입을 쩌억 벌리고 만다. 마주않은 ‘괴동’서봉수가 구사한 지극히 무식해 보이는 한수를 보고 나서다. ‘아니, 이런 수도 세상에 다 있는가.’

흔히 바둑에서의 기본 행마법에 ‘한칸’이 있다. ‘중앙으로 한칸 뛰기’ ‘한칸 뜀에 악수 없다’는 바둑속담에 나오는 그 한칸 말이다. 그런데 당연히 한칸을 뛰어야 하는 그 대목에서(소위 정석이라고 일컷는 대목에서) 서봉수는 자신의 색깔이 흠씬 묻어나는 철주(鐵柱·‘철기둥’이란 뜻의 바둑용어)를 박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일단 그것이 좋은 수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었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그것에 대한 찬반은 아쉽게도 이 운명의 한판이 끝나고 나서 검토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그 낯선 서브를 받아야하는 리시버 조남철의 마음가짐이다. 결론이긴 하지만 이런 가정은 가능할 것이다. 조남철이 30년 연하의 2단기사와 정상을 놓고 자웅을 겨루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조남철이 지나치게 그 부분을 강조한 건 곧 있을 패배에 대한 북선이 아닌가 싶다.

사실 승부란 이름두께로 결정지어지는 건 아니다. 그가 비록 고단자이지만 당연히 질 수 있는 일이요, 설사 그가 서봉수보다 기력이 우월하다고 해도 질 수 있는 것이 승부인 것이다. 문제는 강한 승부사라면 돈을 싸짊어지고 나타나는 ‘봉’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내가 너무 강해서 저 ‘봉’이 걱정된다”는 식으로 여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훗날 조훈현이란 절대강자가 이창호라는 ‘새끼호랑이’와 만날 땐 어떤 말이 나왔을까. 자신이 직접 키운 15세 가량의 ‘애’하고 국수를 놓고, 명인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조훈현의 심정은 어땠을까. 더욱이 한집에서 같은 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같은 화장실을 쓰던 조훈현의 심정 말이다.

“아, 부담이야 있지요. 다만 실력이 승부를 결정하는 요인이니 일반의 상상 이상은 아닙니다.”

제1국에서 제3국까지 모조리 불계로 바둑이 끝났다는 건 신명나게 서로 싸웠다는 것이다. 서로 싸워서 좋은 건 아무래도 기력이 다듬어지지 않은 서봉수였다. 곱게 긴 승부를 이끌었다면 아무래도 노련미에서 차이가 나는 서봉수는 스스로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초반 KO를 노리는 상대는 자신이 쓰러질 수 있는 확률도 높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오히려 조남철이 더 서글프게 된 건 운명의 제4국이 자신에겐 막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날짜도 기억하기 딱 좋다. 1972년 5월5일 어린이날. 대원호텔에서였다.

<뉴스와 화제>

ㆍ ‘마녀’예내위(芮乃偉) 최강 이창호 뉘다!

‘마녀’예내위가 이창호를 꺾었다. 전통의 국수전 제43기 도전자결정에서 ‘최강’이창호를 맞은 예내위는 시종 난타전을 전개한 끝에 불과 147수만에 흑으로 불계승을 거두며 한국무대 진입 후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지난 4월 꿈에 그리던 한국무대에 진입한 예내위는 1992년에도 응씨배 세계선수권에서 이창호를 꺾은 바 있는데, 이미 여류국수전을 우승한 그녀가 과연 전통의 한국국수에까지 이르게 될 지 바둑팬의 초미의 관심이 되고있다. 현재 국수는 조훈현.

2000년 들어 첫 공식대국이기도 한 이번 도전자결정전은 뭇 세계대회나 타이틀 도전기 보다 훨씬 많은 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한국기원 홈페이지에서 실시한 생중계에 풀타임으로 관전한 인원만도 무려 100명에 이를 정도.

과연 예내위가 이창호의 적수가 될 수 있을까. 그 여부는 곧 한국바둑계의 정상구도 개편을 뜻하는 것으로 새해 벽두부터 바둑가는 예내위 돌풍이 거세다. ‘영원한 국수’ 조훈현과 ‘이방인 국수’에 도전하는 국수전 도전3번기는 1월 셋째 주중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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