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이 시작되는 벽두부터 재계가 술렁이고 있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등 대기업 총수들이 잇따라 중병에 걸리거나 중병설에 휩싸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 이회장의 경우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MD앤더슨 암센터’에서 폐암진료를 진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병원의 한 의사는 “이건희회장은 폐암인 것으로 추정되며, 앤더슨 암센터 호흡기계 암 전문의인 이진수박사가 치료를 담당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회장은 미국으로 출국하기 앞서 지난해 11월 삼성 서울병원에서도 병세와 관련해 정밀진단을 받았다. 병원 관계자는 “정기건강 검진에서 쇄골 밑 림프절이 커져 있는 것이 발견돼, 조직 검사를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성측은 “이회장이 지난해 11월 결핵성 임파선염 진단을 받았으며, 심한 감기와 몸살로 인한 폐렴증세를 보여 현지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만 밝히고 있다.

정세영 현대산업 개발 명예회장도 이회장과 비슷한 병세로 역시 ‘MD앤더슨 암센터’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해 12월초 아산재단 서울 중앙병원에서 폐암진단을 받은뒤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고 있다. 현대 관계자는 “정회장의 폐암은 초기이며, 수술과 방사선 치료 등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완치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최고의 주치의들로부터 수시로 건강진단을 받고 있는 재벌 총수들이 왜 중병에 시달리는 것일까. 재벌 총수들이 특별히 허약한 체질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정답은 하나이다.

즉 재벌그룹 회장이라는 화려함 속에 숨어있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중병에 걸리는 주요 원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실제로 폐암판정을 받은 정세영 명예회장의 경우 담배는 물론이고 술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또 1998년 폐암으로 사망한 최종현 SK그룹 회장도 폐암진단을 받기 10년전에 금연을 선언한 것은 물론이고 ‘단전호흡’으로 건강을 다져왔다.

사실 재벌그룹 총수들은 보통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한국의 모든 기업들이 생존의 갈림길에 직면하면서 대기업 총수들의 스트레스는 최고조에 달했다. 더구나 계열사별 독립경영, 상호지급보증 해소, 소액주주 권리강화 등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총수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정부의 압박은 ‘총수들의 수난시대’를 낳았다.

타고 난 강골로 소문났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경우는 재벌총수의 업무강도를 짐작케 하기 충분하다. 평소 ‘일로 스트레스를 푼다’고 말했던 김 전회장은 1998년 11월 중국 출장중 두통을 호소, 서울대병원에서 뇌경막하혈종 제거수술을 받았으며, 지난해 7월 대우사태로 평생을 일궈온 자신의 사업이 물거품이 된 뒤에는 충격의 후유증으로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심장병이 악화한 상태이다.

사실상 그룹이 공중분해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도 현역시절의 후유증 탓인지 일본에서 직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는 현재 장충동 집에 칩거하며 정기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치료를 받고 있다.

피말리는 LG반도체 통합협상을 벌였던 김영환현대반도체사장은 인수에는 성공했으나 현재 병원에 입원중이다. 그는 지난해말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었다. 노관호전현대자동차사장은 안면경색으로 1년여 대외활동을 못하다 지난해말 사임했으며, 대우건설부문 정진행부사장은 지난 5일 출근후 “몸이 좋지 않다”며 퇴근했다가 자택에서 숨졌다.

‘재산을 잃으면 10분의 1을, 명예를 잃으면 절반을 잃은 것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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