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견디겠다, 바꿔보자.”

자유당의 압제에 맞서 나온 선거구호가 또다시 유행하는 듯한 분위기다.

경실련이 10일 전격적으로 낙선대상의원 명단을 발표한데 이어 참여연대가 주축이 된 ‘2000년 총선시민연대’가 낙천·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공언한데 대해 여론의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언론사, PC통신, 시민단체, 국회 홈페이지 등에는 우려의 목소리보다는 시민단체들의 용기를 격려하는 전화와 글이 압도적이다.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은 “87년 국민운동본부 때의 열기가 생각날 정도”라며 여론의 반향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정치권의 심한 반발과 사직당국이 법위반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대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전국 YMCA연맹이 13일 총선시민연대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겠다고 결정하고 공명선거실천시민협의회(공선협)는 후보들의 전과기록과 납세여부, 병역, 의정활동 등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한발 더나갔다.

정치개혁시민연대도 독자적으로 부실정치인을 선정·발표하겠다고 나섰고 일부 대학 총학생회까지 나서 연대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시민단체들의 낙천·낙선운동은 마른 들에 불길 번지듯 확산되고 있다. 총선시민연대가 예고한대로 20일 낙천·낙선운동 대상 명단 발표를 강행하면 또 한차례 태풍이 몰아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행태에 실망 넘어 좌절감으로

무엇이 여론을 ‘봉기’수준에까지 몰아갔을까.

한림대 김인영교수(정치학)는 “37년만에 영·호남 정권이 교체됐을 정도로 국민들의 개혁에 대한 바람이 높아졌는데도 정치권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 주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외환위기(IMF)라는 한국전이후 최악의 위기상황을 겪으면서 살이 에이는 고통을 받은 국민들의 개혁욕구는 높아졌지만 제몫찾기에만 급급한 정치권의 행태는 국민들에게 실망을 넘어 좌절감만 불러일으킨 것이다.

지난해 10월 당시 경실련 시민입법위원장이었던 이석연 변호사(현 경실련 사무총장)는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의미있는 말을 했다. 많은 국회 상임위가 시민단체들의 국감감시활동을 거부해 일부 상임위에서는 방청석에 있는 시민단체회원들을 끌어내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이변호사는 “우리 정치인들은 국민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다”며 “시민단체들의 국정감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정치권을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변호사는 이후 경실련 사무총장으로 임명돼 본격적인 시민운동가로 나섰다.

지난해 12월초 참여연대 양세진 시민감시부장은 기자들에게“이번 총선에서 시민단체들의 운동은 과거와 차원이 다를 것”이라면서 “비록 법을 어기더라도 공명선거감시차원에 머물지 않고 국회의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예고했지만 제도권 시민단체가 과연 불법행동까지 할 것인지 반신반의했고 부정적 반응을 점치기도 했다. 그같은 예측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정치권 자정능력 상실, 시민이 나서야

시민단체들이 낙천·낙선대상자 명단을 공개한데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분분하지만 이미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정치권이 스스로 변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데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외압이 가해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15대 국회는 통계상으로는 역대 어느 국회보다 많은 일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96년 5월30일 개원한 15대 국회는 1월11일 현재 법률안만 1,544건을 처리해 14대 국회 906건에 비해 71%나 증가했다. 또 법률안중 의원발의안은 1,132건, 정부발의 807건으로 14대 때 의원발의안 320건 정부제출안 582건에 비해 의원발의 비중이 높아졌다.

법률안을 원안 그대로 통과시킨 비율은 14대 71%에서 15대 65%로 줄어들었다. 양적으로 괜찮은 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같은 성적을 바탕으로 “정치권에 대한 언론의 부정적 보도가 국민들의 정치불신을 부추기고 있다”는 불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국회운영과 법안처리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정치권의 변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15대 정부가 들어선 직후부터 국회는 진정한 국민의 대표이기를 포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환위기극복에 앞장서야 할 국회는 총리임명안을 두고 공전을 거듭하기 시작했고 방탄국회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면서도 의원 몇명의 사법처리를 막기 위해 1년 내내 국회만 열어놓고 공전시켰다. 개점휴업이었다. 의원의 불체포특권을 악용한 셈이다.

1999년 한해동안 각종 폭로와 욕설 등으로 고소·고발건수가 무려 24건에 이른다. 지난해말부터 겨우 각종 개혁법안들을 본격적으로 심의하기 시작했지만 부가세법 등 상당수 핵심법안은 개악되거나 퇴색됐고 부패방지법 등은 아예 방치한 상태다. 이제는 1인1표제냐 1인2표제냐로 날을 새고 있다.



국민들 변화요구와 기대에 철저한 배신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에, 국민들의 변화요구와 기대가 높아졌을 때 정치권은 이를 철저히 배신한 셈이다.

연세대 신명순교수(정외과)는 “선거구나 선거제도, 공천, 국회운영 등 새로운 정치틀을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정치권이 여론은 거의 거들떠 보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만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며 “후보자 전과공개 등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은 ‘인권’운운하면서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만 하나라도 더 챙기려는 국회의원들을 누가 신뢰하겠냐”고 반문했다.

1998년 4월 정치개혁이라는 명분을 걸고 출범한 정치개혁특위가 최근 활동을 마감하면서 거둔 성과라는 것도 기대에 훨씬 못미쳤다. 표결실명제와 소위 속기록제 등 국회운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일부 제도도입에는 합의했지만 의원정수를 10%정도 줄이겠다는 약속은 슬그머니 거둬들이고 선거사범의 공소시효도 6개월에서 4개월로 단축해 선거사범수사를 사실상 더 어렵게 했다. 후보의 병역사항 및 최근 3년간 세금납부실적 증명서 제출및 공개제, 선거기간중 선거비용조사 등도 무산되고 말았다. 여·야를 불문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부정적인 제도는 거부했다는 비난을 받기에 충분하다.

총선시민연합 관계자는 “이번에 표출된 상당수 국민들의 충정이 과연 오는 총선까지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정치권도 개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면 그 정도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천년의 문턱에 들어섰다. 미국이 대공황으로 흔들릴 때 루스벨트라는 걸출한 정치인이 나타났고 영국에도 처칠이라는 존경받는 정치인을 갖고 있다. 새천년에는 시민단체가 나설 필요도 없는 정치가 이뤄지기를,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존경받는 정치인이 나타나기를 국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송용회·주간한국부 기자


송용회·주간한국부 songy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