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운동은 당연한 권리, 유권자 선택 유도

우리나라 선거법은 노동조합 이외 단체의 선거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시민단체가 특정정치인에 대해 낙선 또는 지지운동을 벌이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물론 후보에 대한 공개적인 낙선운동은 개별의원들의 의정활동에 대한 정밀한 평가에서 출발한다는 대전제를 깔고 있다.

유럽인들은 국민의 정치적 대표자가 되고자하는 사람을 여러 형태로 검증하는 것은 유권자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각종 정치적 결사체는 물론 이익단체와 압력단체들은 선거를 앞두고 후보로 나선 정치인들의 정치적 지향점이나 특정 사안에 대한 견해를 파악해 수시로 공개, 유권자들의 선택을 돕는다.


프, 노골적지지및 낙선유도는 삼가

자크 시라크 파리시장과 리오넬 조스팽 사회당후보가 맞붙은 95년 4월 프랑스 대통령선거의 1차투표 직전 ‘프랑스가정’이라는 이익단체는 후보자 8명에 대해 평점을 매겨 공개했다. 프랑스 가정의 결핍문제에 대한 각 후보들의 인식도를 측정해 유권자들의 심판을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시민단체들은 특정후보에 대해 노골적인 지지나 낙선유도 운동을 삼가고 있다. 낙선 또는 지지운동이 법으로 금지돼 있어서가 아니라 선거가 끝난 후 자신들의 입지가 불리해 질 수 있다는 오랜 경험 때문이다. 프랑스의 시민 및 압력단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환경보호주의자와 동물보호협회는 물론 에이즈퇴치협회 수렵협회 정년퇴직자협회 가족운동협회등은 비롯해 파이프담배애호가협회, 자동차운전자협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가 이를 데 없다.

후보들로서는 이들 이익 압력단체들을 어떻게 잘 응대해 지지를 이끌어내느냐가 선거운동의 관건이다. 이 때문에 후보들은 전문가로 구성된 전담팀까지 두고 이익단체들의 압력에 대응하고 있다.

이익단체들은 각 후보들에게 공약에 관한 질의서를 보낸 뒤 선거본부의 답장을 토대로 공약의 허실을 지적, 직·간접적으로 선거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건축업연맹은 95년 대선에서 퇴직제와 국영기업의 민영화문제를 거론하며 각 후보의 답변을 비교 제시했으며 프랑스 장애인 연합은 후보들의 답변서를 7만여 회원들에게 발송해 장애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유도하기도 했다. 선거담당자들은 선거철 마다 이익단체들의 질문서에 곤욕을 치르지만 합리적이고 책임질 수 있는 답변만이 후보의 신뢰성을 높인다는 것을 알고 대응하고 있다.


선거운동 무제한 허용하는 영국

영국도 민주주의의 발상지답게 특정 후보자 낙선운동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선거운동을 단체와 개인에게 무한정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영국에서도 무수한 이익단체와 압력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국 최대의 조직망을 갖추고 있는 노동조합회의(TUC)와 영국산업연합회(CBI)외에도 전국농민조합(NFU) 전국상점주연합회(NSA) 전국임차인단체(NTG)등이 대표적인 압력단체다.

또 환경단체인 ‘지구의 친구들’을 비롯해 비핵화운동(CND) 공민의 자유전국위원회(NCCL) 아동학대방지전국연합회(NSPCC)등도 영향력있는 단체.

영국의 이익·압력단체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도권에 편입된 경우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TUC와 CBI는 각각 노동당과 보수당에 우호적이다. 특히 노동당은 노동조합이 창당의 모태가 됐고 지금도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법인기업을 소속 회원으로 거느리고 있는 CBI는 전통적으로 보수당의 탄탄한 지지기반이자 든든한 자금줄이다.

영국에서는 의회에서 로비스트의 정당한 활동이 법적으로 허용돼 있고 상당수 의원들이 기업 또는 특정단체의 상담역으로 과외수입을 올린다. 그렇지만 이익 압력단체의 과도한 활동이나 후보간의 결탁사례로 물의를 빚은 사례는 눈에 띄지 않는다. 사회관습과 전통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규제하는 법률이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향력 큰 독일노총, 정치권서 눈치

독일의 경우 뒤셀도르프에 위치한 독일노총(DGB)은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이익단체 중의 하나다. 전국 16개 산별노조로 구성됐으며 회원만 하더라도 800만명에 달한다. 출신 현역의원도 20여명이 넘는다. 이 때문에 각 정당과 후보자들이 노총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독일전체의 이익단체 수는 20만개로 추정된다. 성인의 절반이상이 1개 이상의 이익단체에 속해있는 셈이다.

연방하원의원이 발간하는 로비스트명단에 올라있는 등록단체만도 1,200개에 이른다. 독일에서 이익단체를 ‘제4의 권력’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의 활동은 철저하게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익단체들은 평소 전문분야에서 행정부의 자문역할을 하거나 여론형성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시민단체들에 의한 선거감시와 유권자들에 대한 판단근거 제공은 유럽 선거문화의 대세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창민·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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