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국민당 "사업 손 떼고 정치만 하겠다" 선언

2000년 벽두부터 대만과 독일 정치판에 주목할만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대만 집권 국민당이 자진해서 당재산을 이용한 수익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에서는 통일의 영웅인 헬무트 콜 전 총리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이유로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됐다.

국민당을 항복시키고, 콜 전 총리를 추락시킨 힘은 다름아닌 국민이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지지하지 않겠다’는 국민의 비판은 총칼 보다 더 무섭다. 민주사회에서 국민의 비판에 귀를 막고 있는 정치세력은 설 땅이 없다. 대만과 독일의 예는 4월13일 총선을 앞둔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편집자 주>

대만 집권 국민당의 별명은 백년노점(百年老店). ‘100년 묵은 오래된 가게(또는 여관)’란 뜻이다. 역사를 따지면 아직 100년은 되지 않았다. 국부 쑨원(孫文)에 의해 중국대륙에서 창당된 1912년을 원년으로 보면 89년째다. 중국인들이 오랜 시간을 말할 때 흔히 백년, 천년을 쓰는 터라 햇수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정당ㆍ기업집단 두 얼굴의 국민당

하지만 왜 하필 ‘오래된 가게’로 불리게 됐을까. 국민당이 가진 재산 때문이다. 국민당은 정당이자 기업집단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국민당은 대만의 최대 재벌이다. 국민당이 완전히 소유하고 있거나 일부 지분을 갖고 있는 국내외 기업은 300여개. 자산규모는 약 2,000억 대만달러(8조원)에 달한다. 지난해 벌어들인 수익금만 4,800억원. 1998년에는 8,000억원이었다.

국민당은 당내 ‘당영(黨營)사업 관리위원회’ 산하에 지주회사 7개를 두어 이들 재산을 관리하고 있다. 당영사업관리위원회의 류타이잉(劉泰英) 주임은 당내 실세다. 97년 말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한국에 10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큰소리친 장본인도 劉주임이다.

국민당은 이 재산을 외교적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97년 대미 경제협력 명분으로 1,000만 달러를 투자해 알래스카에 수산물 가공공장을 세웠다. 남태평양의 팔라우와 외교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1,000만 달러를 들여 팔라우 아시아 호텔을 지었다. 93년에는 1억4,000만 달러를 쏟아 부어 도쿄(東京)의 대만무역센터 건물을 매입했다. 남아공과 싱가포르, 홍콩에서도 대규모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정치와 돈줄의 함수관계를 가장 뚜렷히 드러내는 예가 국민당이다. 국민당이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영사업이 버티고 있었다. 국민당이 자랑하는 막강한 조직력의 비밀도 결국은 돈이었다.


총통선거 지지율 최하위로 '고육책'

그런 국민당이 뜻밖에 스스로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1월2일, 국민당 총통선거 후보 리엔짠(連戰) 부총통은 “국민당은 모든 사업을 포기하고, 당재산은 신탁관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총통선거본부 발족식에서였다. 왜 포기선언이 나왔을까. 3월18일 총통선거 때문이었다. 선거를 두달여 남겨둔 시점에서 집권당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최하위를 달리고 있는 상황이 결단을 재촉한 것이다. 금권정치, 금권선거, 부패연루설로 만신창이가 된 국민당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극약처방이 필요했던 셈이다. ‘100년 비밀의 성’이라 불리던 국민당의 재산은 이렇게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됐다.

대만 총통선거는 현재 3파전으로 진행되고 있다. 국민당의 連(64) 후보, 제1야당 민진당의 천수이비엔(陳水扁·49) 후보, 무소속의 쑹추위(宋楚瑜·58) 후보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1월5~6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만성장 출신의 宋후보가 지지율 26%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타이베이(臺北)시장을 지낸 陳후보는 23%를 기록해 2위, 連 부총통은 18%에 그쳤다. 아직 지지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부동층이 32%에 달했다.

국민당은 지지율을 끌어 올리기 위해 당영사업 포기 공약의 효과를 극대화하려 하고 있다. 連후보는 당영사업 포기가 87년 계엄령 해제, 96년 총통직선제에 뒤이은 제 3차 개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모든 당재산을 실사, 공개한 뒤 8월까지 신탁공사에 맡길 것이라며 시간표를 제시하고 있다. 連후보는 나아가 2월까지 정당의 영리사업을 금지하고, 국고에서 정당자금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당법을 개정하겠다고 말했다. 이른바 선거공영제를 실시하겠다는 이야기다.


"당재산 국민에 돌려주겠다" 공약

리덩후이(李登輝) 총통도 사업포기를 강조하며 連후보를 지원사격하고 있다. “국민당의 재산은 훔쳐온 게 아니다. 과거 국부(쑨원)가 신해혁명을 일으킬 때부터 국가사업을 위해 모아온 긴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정당이 투자사업을 하는 것은 정당간의 공정경쟁을 위해서도 옳지 않다. 국민당은 앞으로 당재산을 위탁한 후 삼민주의 정신에 따라 국민들에게 돌려 주겠다.”

국민당의 메가톤급 공약에도 불구하고 국민여론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재집권을 위한 술수로 비하하고 있는 분위기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45%가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끝날 것이라고 응답했다. 정치 평론가들은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사업포기 공약에 현혹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야당도 국민당의 선언을 공격의 빌미로 삼고 있다. 국민당의 재산형성 과정이 권력형 비리로 가득차 있다며 도덕성에 흠집을 내고 있는 것이다. 민진당의 陳후보는 “국민당이 국토를 강탈해 치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용토지를 무상점용하거나 저가에 임대한 뒤 특혜매입하는 식으로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과거 일본이 점용했던 상당수 적산(敵産)을 국민당 재산으로 불법편입했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국민당은 이에 대해 모든 당소유 토지가 시가에 매입된 것이라며 해명하고 있지만 설득력을 잃고 있다.

민진당은 이와 함께 자신들의 당재정을 공개함으로써 국민당과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민진당이 밝힌 중앙당의 고정자산은 13억2,000만원. 정당보조금과 당비, 기부금을 모두 합친 지난해 연수입은 80억원이다. 국민당이 지난해 당재산 8조원으로 벌어들인 돈은 2,400억원. 민진당은 이같은 차이를 강조하며 유권자들의 선택을 유도하고 있다.


국민당의 변신 이끈 국민의식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국민당이 이번 사업포기 공약으로 유권자의 5%만 현혹시킬 수 있다면 連후보의 당선이 가능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국민당이 스스로 ‘민주화의 함정’에 빠진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양산된 중산층 시민의 요구에 밀려 민주화 개혁을 실시했지만 결국은 민주화가 국민당의 존립기반을 허물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더이상 국민당이 권력형 독점·특혜 사업을 통해 시장의 공정성을 교란하는 것을 참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국민당이 사업포기 공약을 어느 정도 지킬지는 아직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공약이 대만 정치사에 한 획을 긋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백년노점 국민당이 신해혁명을 성공시킨 과거의 혁명정당 외피를 벗고 현대적 의미의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국민당의 변신을 강요한 것은 국민의식이었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배연해·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