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실전적이란 말을 바둑가에선 자주 한다. 일본바둑의 이론에 꽉 박힌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그 상황에 맞는 구질을 선택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오늘날 한국바둑이 세계속으로 자주 적으로 진출하게 한 가장 근원적인 화두는 역시 이 실전적이란 한마디가 될 것이다.

서봉수는 일종의 신수라 할 뭉툭한 한수를 들고 나왔다. 묘수는 놓이고보면 그 의미를 서서히 알아차리게 되는 법이다. 조남철도 참으로 희귀하게 놓여진 그 한수 때문에 적잖이 속을 썩였을 것이다. 그 수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면 할수록 말이다. ‘허, 참, 그런 수가 있었나.’

물론 서봉수의 얼굴은 조남철 이상으로 홍조가 그득했다. 서봉수는 원래가 좀 외향적이지 못해서 말도 자주 다듬고 한마디를 할라치면 몇번씩 끊어져 듣는 사람이 상당히 인내해야하는 타입이다.

더욱이 초년병 시절에 관록의 대명사 조남철에게 ‘황당한’ 한수를 던졌으니 자신의 심장도 적잖이 뛰었을 것이다. 숫기가 있는 사람 같으면 ‘내가 연구한 이 한수가 어떻소이까’ 하면서 오히려 어깨를 펴고 상대의 시선을 마주치려 할 것인데 오히려 서봉수는 고개를 슬며서 아래로 내리며 얼굴만 한없이 붉어지고 있었다.

당시 서봉수는 이 운명의 4국에 앞서 상당한 공부가 있었다. 아직도 그 방법과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는 혼자서 참선승처럼 골똘히 연구 수양한 건 사실이다. 굳이 무슨 유명한 사찰을 찾았다든지 하는 거창한 건 아니다. 자신도 명인이 되고싶다는 생각이 강했다는 말을 하고싶은 것이다.

자, 다시 숙고하는 조남철로 돌아오자. 노병의 맘은 또다시 여려지고 있다. ‘음, 이 친구는 역시 연구가 되어있다. 나의 한창 때를 보는 것처럼 이 아이도 무한한 자신감으로 밀고 들어온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할 것인가.’

서봉수는 국후 그 뭉툭하여 비참하리만큼 무식한 한수를 어느 책에서 본 것 같다며 자신이 공부가 되어있음을 간접진술하기도 했다. 역시 그 신수는 기막히게 들어먹히고 말았다.

조남철은 나름대로 바꿔치기를 단행하며 난국을 돌파하긴 했으나 마지막 순간, 상대를 강하게 잡아야 할 곳에서 느슨하게 포위망을 치는 바람에 상대가 미꾸라지처럼 포위망을 뚫은 것이다. 이래서는 바둑이 될 리가 없다. 그러나 그 마저도 상대가 탈출해 버린다면 도저히 흥정이 되질 않는다.

바둑은 오후를 넘기면서 더욱 불을 뿜는다. 수차례의 백병전도 불사한다. 다 잡혔던 조남철의 대마가 살아가서 역전에 이르는가 하는 순간, 다시 서봉수의 강타가 터져 다시금 우세를 잡고...

우세를 잡은 서봉수는 자신의 초라해보이는 대마를 방치하고 실리가 가장 큰곳으로 다가가 승리선언을 한다. 노병이 그렇게 간단히 항서를 쓸 까닭이 있나. 조남철은 건방지게 손을 뺀 서봉수의 대마에 목숨을 건다. 잡으러 간다. 잡으러가는 쪽은 도망가는 쪽보다 처절한 법이다. 병법에도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고급수법이라 찬양했듯 잡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함을 만들어 놓았다는 건 조남철이 불리하다는 정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봉수는 이미 살아가는 길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야수 특유의 본능적인 후각은 그 대마가 죽지않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고 주어진 시간동안 그 답에 맞는 식을 찾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대마는 깨끗이 살았고 그리고 바둑은 끝이 난다.

“올 것이 왔군요.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질 않습니다. 제가 평생 애써온 바람이 생긴 것이겠죠.”

조남철은 돌을 거두었다. 19세 도전자가 19세 명인이 된 것이다.



뉴스와 화제

ㆍ이창호 휘청-연말부터 충격의 3연패

이창호가 바둑가에 화제를 뿌리고 있다. 잘 이겨서가 아니라 자주 져서 그렇다. ‘최강’이창호는 연말부터 연초까지 내리 3연패를 당해 슬림프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그러나 새천년 첫 공식대국이었던 1월4일 국수전 도전자결정전 예내위와의 대결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예내위의 파상공세에 밀려 단 한번도 제대로 힘을 써보지 못한 채 내리 끌려다니며 완패, 내상을 단단히 입었다.

그 충격파가 가시지 않은듯 1월10일 이창호는 개인통산 16전전승을 기록하던 만만한 상대 최규병에게도 패점을 기록했다. 11기 기성전 도전1국에서 이창호는 아마유단자도 알 수 있는 쉬운 사활을 착각해 100수도 안되는 단명국으로 막을 내린 것.

아직 슬럼프를 운운할 단계는 아니지만 예전 아창호의 모습이 아닌 것은 확실한 듯.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