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慶福宮). 그 경복궁에는 4대문이 있는데 동쪽문이 건춘문(建春門), 서쪽문이 영추문(迎秋門), 북쪽문이 신무문(神武門), 그리고 정문격인 남쪽문이 광화문(光化門)이다.

광화문은 본래 조선조 태조 3년(1394)12월에 경복궁의 터를 닦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 9월에 궁궐을 완공하면서 함께 완성된 것이다.

당시 경복궁 건설 총책임을 맡았던 정도전(鄭道傳)이 시경(詩經)에 나오는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慶福)’이란 말을 따서 경복궁(慶福宮)이라 궁이름을 짓고 궁성(宮城)의 둘레가 1,813보(步) 곧 10,870척이요, 높이 지척 1촌이라 했다.

그런데 정문인 광화문은 본디 오문(午門)이라 이름하였던 것을 세종7년(1425)에 ‘모든 빛은 이 문을 통해 들어오고 나간다’는 뜻으로 오늘의 이름인 光化門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

이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의 월대(月臺)위에 3궐(三闕)의 홍예로 된 정면3간의 중층 우진각 지붕의 장엄하기 이를데 없는 다포식 건물이었다.

그러나 광화문은 조선왕조 중기 이후 민족 수난사만큼이나 그 궤를 같이 했다.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년간 방치되어 있다가 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국토를 유린하면서 1927년 총독부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이전시켰고, 그나마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것을 1969년 2월, 현재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박제된 모형으로 앉혀 놓은 것이다.

광화문(光化門)! ‘모든 빛은 이 문을 통해 들어오고 또 나간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이 광화문 거리에 전기통신발신지인 ‘한성정보총국’이 자리했던 것. 조선조 사역원(司譯院)건물을 인수, 1885년 9월28일 문을 열고 제물포에서 첫 전신을 띄웠다. 같은해 11월19일에는 평양-의주까지 전신망을 확충, 이로써 전신으로 필묵을 대신 전광(電光)으로 우편을 대체하였다.

열개의 점으로 만언어(萬言語)를 표현하니, ‘조선전보총국’,‘한성전보총사’에서 출발 ‘통신원’으로 광복뒤에는 ‘광화문전화국’이 생겨, 우리나라 전기통신의 씨앗이 된 셈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나라가 빛의 혁명이랄 수 있는 정보화시대를 활짝 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시인 조병화는 ‘이 곳 이 자리는/ 우리나라 한국의 전기통신이/ 처음으로 그 빛과 소리를 비친/ 통신의 발상지/ 지금은 우주로 전파되고/ 모든 빛과 소리의 고향/ 한국은 지금 눈부시게 발전하여/ 온 세계와 더불어/ 세계안에서 평화롭게 따뜻이 한 가족으로/ 생활의 맑고 신속한/ 그 빛과 소리를 은혜롭게 살아 간다/ (중략) 지금 온 세계는/ 보다 가까운 한마을이 되어 간다/ 이곳 이 자리는/ 우리나라 빛과 소리의 고향’이라고 읊었다.

그래서 ‘모든 빛이 들고 나간다’는 예언적인 관화문거리에서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 천년을 맞이하는 장엄한 빛의 이벤트가 1999년 12월31일 오후5시30분17초 전북 무안 변산반도 격포해수욕장에서 채화한 천년의 마지막 ‘빛’의 씨앗이 500대의 오토바이에 의해 자정 카운트다운 행사장인 광화문으로 봉송돼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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