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은 재벌왕국의 신하, 총수 의견은 '하늘의 뜻'

경영실패가 발새하는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재벌 총수들이 자신의 측근인 임원들을 '능력'보다는 '충성심'을 기준으로 선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두번째 황제인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3,000여년이 넘는 중국 왕조사에서도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스물여덟살때 ‘현무문(玄武門)의 난’으로 불리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친형인 건성태자(建成太子)를 죽이고 임금이 될 정도로 냉혹한 인물이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로 통하는 선정을 베푼 명군이었다.

이세민은 특히 자신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신하들의 직간(直諫)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듯이 이세민도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대실수를 저지른다. 바로 ‘고구려 원정’이다. 서기 646년 이세민은 30만명이 넘는 정예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이세민은 요하(遼河)를 건너, 수나라 양제가 100만 대군으로도 꺾지 못했던 요동성과 백암성을 순식간에 함락시킨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안시성 공략에 돌입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당나라 군대는 만주벌판의 맹렬한 겨울 추위와 양만춘 장군과 휘하 고구려 병사들의 항전으로 안시성을 함락시키기는 커녕 숱한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게 된다.

중국측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세민은 철수하면서 ‘고구려 원정’을 몹시 후회한다. 그는 ‘고구려 원정’ 3년 전인 643년에 병사한 위징(魏徵)을 떠올리며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이번 원정을 중지시켰을 것”이라고 아쉬워 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이세민은 사자를 보내 위징의 묘를 크게 꾸미는가 하면 유족들에게는 위로의 상을 내렸다. 요컨대 중국 제일의 명군인 당 태종도 자신을 보좌하는 충신이 없어지자 실정을 하게 된 것이다.



측근들 간언 용납못하는 기업풍토

당 태종 처럼 목숨을 걸고 충간(忠諫)하는 부하가 없어지면 기업 총수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는 1,500년이나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60조원의 빚을 남긴 채 쓰러진 대우그룹, 한국을 외환 위기에 몰아 넣은 기아·한보그룹의 몰락에는 모두 측근의 간언(諫言)을 용납하지 않은 총수의 독단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재계에서는 최고 경영자의 고집을 꺾지 못해 일어난 경영실패 사례로 ‘삼성자동차’를 꼽는다. 1999년 7월 삼성그룹은 ‘삼성이 하면 다르다’라는 말로 통했던 ‘삼성불패(三星不敗)’신화에 종언을 고했다.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1995년 3월 삼성자동차를 설립한지 4년 3개월만에, ‘SM 5’라는 승용차를 생산한지 1년 4개월만에 자동차 사업을 포기한 것이다. 당시 재계에서는 “자동차 진출에 대한 이건희 삼성회장의 강력한 의지에 눌려, 측근에서 아무도 바른 소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효율적 조직인 기업체에서 왕조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이유 때문에 경영 실패가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 결론부터 말하면 재벌 총수들이 자신의 측근인 임원들을 ‘능력’보다는 ‘충성심’을 기준으로 선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먼저 삼성, 현대, LG, SK 등 한국의 재벌들은 수십년 동안 탈법적인 방법으로 계열사 임원을 선발하고 있다. 한국의 재벌들은 주주총회 의결없이 매년 연말이나 연초에 총수 명의로 각 계열사 임원을 일방적으로 결정,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한민국 기업이라면 누구나 준수해야 할 상법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즉 ‘이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한다’라는 상법 382조 2항과, ‘이사의 선임 결의는 정관에 다른 정함이 있는 경우에도 발행주식의 총수의 과반수에 해당하는 주식을 가진 주주의 출석으로 그 의결권의 과반수로 하여야 한다’고 명시한 상법 384조가 사문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재벌들은 “내정 인사일뿐이며 추후에 절차를 밟는다”고 해명하고 있지만 학계와 시민단체에서는 “재벌들의 이런 행태는 주주들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크게 반발하고 있다.



충성심이 임원승진의 최우선 요건

더욱 심각한 것은 임원 선발기준. 재벌들은 “임원 인사는 철저하게 능력을 기준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검증된 충성심’이 임원 승진의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1992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대선 출마로 YS정권 시절내내 핍박을 받은 현대그룹의 경우 박세용 인천제철 회장 등 정 명예회장을 돕다가 옥고를 치룬 임원들이 이후에는 오히려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과 올해 초 단행된 주요 그룹 임원인사도 이같은 경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해 가을 총수 부자가 한꺼번에 국회 상임위에 증인으로 출석요구를 받게될 위기에 처했던 S그룹의 경우 국회의원을 상대로 막후 로비를 펼쳐, 총수 부자의 증인 출석을 무산시킨 ‘국회 대책팀’ 소속 임원들을 최근 전원 승진시켰다. K그룹도 총수의 직접 지시에 따라 IMF체제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신의 분신역할을 했던 ‘구조조정본부’ 소속의 부장급 직원을 전원 임원으로 승진시켰다.

S그룹과 K그룹의 경우가 충성심을 인정받은 사람들이 승진한 사례라면 H그룹의 경우는 그 반대이다. 재계에 따르면 최근 단행된 H그룹 임원 인사에서 주력 계열사 임원이던 L씨가 갑자기 지방 연구소로 발령이 났다.

소위 ‘어전회의’를 하던 중 총수가 내놓은 의견을 L씨가 정면으로 반박, 이에 화가 난 총수가 계열사 사장을 직접 불러 L씨를 파면시키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평소 L씨를 아끼던 계열사 사장의 간곡한 만류로 옷을 벗는 대신 지방 연구소로 쫓겨 가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고 말했다.

전횡을 일삼는 한국의 재벌 총수를 ‘황제’에 비유한다면 그 밑에서 일하는 임원들은 총수가 황제로 있는 ‘재벌 왕국’의 신하인 셈이다. 그리고 그 왕국에서는 ‘쓴 소리’보다는 황제의 뜻에 무조건 충성하는 신하가 번성하고 있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