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함 속에 감춰진 고단한 임원들의 그림자

‘142.1대1’

대학 입시나 취업시험 경쟁률이 아니다. ‘142.1대1’은 삼성그룹에 입사한 대입 직원들이 ‘샐러리맨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임원 자리에 오르기 위해 벌여야 하는 경쟁률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1999년말 현재 13만5,000여명에 달하는 삼성그룹 임직원중 ‘이사보’ 이상 임원의 숫자가 950여명”이라며 “중도 퇴직자까지 감안하면 임원이 되기위한 실제 경쟁률은 더욱 높아진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기업 임원은 도대체 어떤 자리이길래 ‘샐러리맨의 꽃’이라는 말이 따라 다니는 걸까. 또 임원이 되면 뭐가 달라지는 걸까. 지난해 그룹 인사에서 직장 생활 22년만에 이사로 승진한 A그룹 계열사의 J이사(47)는 “승진이후 자신의 삶이 한 단계 ‘업 그레이드(Up Grade)’됐다”고 말한다.

J이사에 따르면 임원으로 승진하면 어림 잡아 약 30여 가지가 달라진다. 다음은 J이사가 밝힌 임원 승진이후 달라진 자신의 모습.


임원승진, 30여가지가 달라지는 위상

임원으로 승진하면 가장 먼저 근무환경이 바뀐다. 우선 부하 직원들과는 구별되는 3~4평 내외의 별도 공간이 마련된다. 그리고 컴퓨터, 팩스, 책상, 의자, 책장 등 각종 사무집기가 보다 크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완전히 교체된다. 또 전담 비서는 아니지만 비서 역할을 하는 부하 직원이 배치돼 자신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일일이 받지 않아도 된다.

대기업 임원들의 품위유지를 위해 회사에서도 많은 지원을 한다. 우선 회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중형 승용차가 나온다. J이사는 “자동차 보험료, 연료비, 수리비 등은 물론이고 남산터널 이용 쿠폰까지 지원된다”고 말했다.

또 임원으로 승진하면 임원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골프 회원권과 법인카드가 별도로 발급된다. 해외 출장때도 부장시절에는 ‘일반좌석’을 이용하지만 임원이 되면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현지에서 머물 수 있는 호텔의 등급도 한 단계 높아진다.

가족들도 혜택을 받는다. 비상시에 집에서도 회사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전용회선이 깔린 PC와 팩스가 설치된다. ‘임원의 건강’이 회사의 자산이라는 판단에 따라 임원 부인도 매년 50만~60만원이 소요되는 정밀 건강진단을 받게 된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게 된다. 임원 승진과 동시에 퇴직금을 정산받아 목돈을 만질 수 있으며, 급여수준도 부장때보다 30~40%가량 높아진다. J이사는 “1억원에 약간 못미치는 연봉을 받고 있지만 회사에서 소득세를 대신 납부하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소득은 1억원 이상 연봉자와 맞먹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연봉에 맞먹는 별도의 판공비와 차량 유지비 등 회사의 각종 지원을 감안하면 임원 1명을 위해 회사가 부담하는 경비는 약 4억원에 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삼성, 현대, LG, SK그룹 등 주요 대기업의 임원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최소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지나친 업무스트레스, 고용문제도 고민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대기업 임원들은 겉으로 화려한 만큼 말 못할 고민도 많다. 대기업 임원들의 가장 큰 고민중 하나는 업무 스트레스이다. 자리가 올라간 만큼 회사에서 요구하는 책임이 높아지고 챙겨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하루 종일 극도의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평균 오전 6시에 출근하는 J이사의 경우 회사 업무가 끝난뒤에도 저녁식사나 술 약속 등으로 평균 귀가시간은 오후 11시이다.

고용보장이 안되는 것도 남모를 고민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경기가 나빠지면 가장 먼저 임원들이 구조조정을 당하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1997년말 IMF체제가 닥치면서 주요 대기업과 금융기관이 내놓은 대책은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임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97년 12월 현대자동차가 14개 본부를 7개본부로 줄이면서 임원수를 30%줄인 것을 시작으로 삼성, 현대, LG그룹 등 대부분의 대기업이 구조조정의 제1 타깃으로 임원들을 겨냥했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서울, 제일은행은 자구노력 차원에서 임원들이 임금을 30%반납하는 바람에 임원 급여가 10년 후배인 고참 차장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대기업 계열사의 한 임원은 “외환위기 직후 기업마다 감량경영에 나서면서 임원은 ‘임시직원’의 줄임말이라는 말까지 나돌았으며 일부 부장들은 임원승진 명단에서 빠지기 위해 로비를 펼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임원이 회사를 위해 연대보증을 섰다가 엄청난 피해를 보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총수전횡’에 속수무책으로 당할수밖에

그러나 총수에 대해 반론이 허용되지 않는 한국적 상황풍토에서 임원들을 가장 긴장시키는 부분은 ‘총수의 전횡’을 직접 경험한다는 점이다. 24년간 D그룹에서 재직하다가 1999년 8월 강제 퇴직한 K씨가 노동조합과 총수에게 보낸 편지는 총수에게 시달리는 대기업 임원의 고뇌를 여실히 보여준다.

K씨는 편지에서 “임원 재직시에는 총수의 말 한마디에 상여금이 없어져 대리 수준의 봉급을 받고 혹사당했는데 마지막 순간에는 총수의 말 한마디에 퇴직금도 못받고 쫓겨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7%도 못되는 지분을 갖고 있는 총수가 임원들에게 이렇게 횡포를 부릴 수 있는가. 회장 아들은 군 복무도 하지 않았으면서도 그렇게 승승장구 진급할 수 있는가”라며 총수의 전횡을 비난했다.

K씨는 이어 “우리 나라에는 토의문화도 없고 고발정신도 없고 오직 지배자의 독재에 순종하는 미덕만 있을 뿐이다. 아무도 총수의 횡포에 항의하지 못하고 묵묵히 당하기만 하기 때문에 총수의 전횡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며 고단한 대기업 임원 생활을 한탄했다.

조철환·주간한국부 기자


조철환·주간한국부 ch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