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 급등, 한국경제에 적지않은 파장

김대중 대통령은 1월26일 청와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유가 안정을 강조했다. “물가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비축유를 풀어서라도 유가를 안정시키겠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의 이같은 다짐은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국제유가 상승 행진이 국내경제에도 적지않은 파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최근 국제유가 상승은 기간과 상승폭에서 91년 걸프전 발발 이후 10년만에 최고 수준이다. 뉴욕상품시장의 서부텍사스유(WTI)는 26일 한때 배럴당 28.69달러까지 올랐다가 27.84달러에 마감됐다. 뉴욕상품시장의 국제유가는 이에 앞서 1월 둘째, 셋째주 2주간 연속 상승행진을 벌여 배럴당 29.95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1998년 배럴당 한자리수까지 내려가 바닥을 기던 국제유가가 30달러선을 위협하는 폭발장세로 돌아선 것이다.

우리나라 원유수입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두바이유 가격도 25일 배럴당 26.35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10월 배럴당 21달러선에서 5달러 이상이 오른 셈이다. 북해산 브랜트유 역시 배럴당 26달러를 넘어 지난해 초에 비해 2.5배 상승했다.


석유 감산 등오 고유가 계속될 전망

국제유가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 둘째주부터. 하지만 이번의 급등세는 북반구에 겨울이 오면서 나타나는 연례행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세계 석유공급의 목줄을 쥐고 있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인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유가상승은 OPEC 회원국들이 올 3월까지로 돼있는 현행 석유 감산시한을 6월이나 연말까지 연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촉발됐다.

감산시한 연장 의사를 처음 표명한 사람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누 아이미 석유장관. 아이미 장관이 지난해 10월20일 “세계 석유재고 감소추세가 예상보다 더디다”며 감산시한을 3개월 연장할 태도를 보이자 다른 OPEC 회원국들이 동조했다. 현재 상황으로는 3월 열릴 OPEC 총회에서 감산시한 연장이 기정사실화한 분위기다. 최근 OPEC 회원국들간 감산 합의 준수율이 이례적으로 높고, 이라크가 지난해 11월 석유수출 중단을 선언한 터라 당분간 고유가 추세는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고유가 행진은 세계최대 원유소비국인 미국과 일본, 한국, 아시아 각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IMF 관리체제를 막 벗어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의 경제회복에는 걸림돌이 될 우려가 크다.

OPEC의 감산 합의가 연장된다고 해서 당장 석유수급 자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산업자원부의 김호철 석유산업과장은 “원유 수입가격 상승에 따른 원자재 조달비용이 상승하겠지만, 수입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고유가는 경제성장과 무역수지, 소비자물가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고유가의 충격이 곧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국내 비축유가 일정기간 충격흡수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65일분 비축, 일정기간 충격흡수

현재 우리나라 비축유는 모두 65일분. 정부 비축유가 28일분이고, 각 정유사가 비축하고 있는 것이 37일분이다. 1974년 출범한 국제에너지기구(IEA)가 각국에 권고하는 비축유는 90일분. 김호철 과장은 “2006년까지 정부비축분을 60일분으로 늘려 IEA의 권고수준에 맞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우리나라 일일 석유소비량은 평균 199만7,000배럴. IMF로 소비량이 15.6% 감소했던 1998년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매년 소비량이 늘고 있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했을 때, 국내 소비량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50만톤짜리 유조선이 매일 4대씩 들어와야 한다. 수입된 원유는 전국 8개 정부 비축기지와 각사 저장고에 원유와 제품(정제유) 형태로 비축된다. 비축유는 또다시 송유관과, 연안유조선, 철도를 통해 각지로 보내진다. LNG와 LPG도 정부와 각사 비축기지에 저장된다.

유가상승은 구체적으로 국내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해 추산한 내용. 원유 도입단가(통상 선물거래 등을 통해 구매하기 때문에 국제유가보다는 낮다)가 1999년 배럴당 17.3달러에서 2000년 22달러로 21.4% 오르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0.28%포인트 하락한다. 소비자물가는 0.5%포인트 상승하고, 무역수지 흑자는 50억달러 줄어들게 된다.

국제유가 상승은 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생산원가 상승으로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려 채산성을 악화시킨다. 금융시장에도 악재로 작용한다. 금융불안 심리를 확산시키고 주가하락을 부추기게 된다. 고유가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업종별로 다르다. 석유를 많이 소비하는 업종이 일차적인 피해자가 된다.

특히 생산비용에서 원유가 차지하는 비용이 80%에 달하는 정유산업은 원가상승과 수요감소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에너지 다소비 업종인 철강산업과 나프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석유화학산업은 생산비용 증가로 채산성이 악화한다. 생산원가 중 유류비용이 10%를 넘는 전력과 운수업도 타격을 입게 되고, 자동차 산업도 내수감소를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경제회복 걸림돌, 건서.조선업은 활기

반면, 중동특수가 예상되는 건설과 조선업종에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 중동지역은 우리나라 해외 건설수주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중동경제가 활성화할 경우 국내 관련업계는 바빠지게 된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수년간 중동지역 산유국들은 단순 원유수출에서 유화제품 수출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석유화학공장을 건설해 정제된 기름과 함께 폴리머 제품을 수출함으로써 부가가치를 높이려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고유가 행진이 당분간 계속되면 국내 석유화학 플랜트 수출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될 전망이다.

조선업종의 호기는 중동지역 심해유전 개발과 관련돼 있다. 해양유전 개발이 가속화하면서 신규수주가 늘게 된다는 것. 우리나라의 대중동 주력 수출품인 전기·전자제품과 섬유류 등의 수출확대도 예상되고 있다.

선진국 경제도 고유가의 영향을 피해갈 수는 없다. IMF는 국제유가가 10% 상승할 경우 미국과 유럽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1%포인트 낮아지고, 소비자물가는 0.2%포인트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은 실질 GDP 성장률이 0.1%포인트 하락하고, 소비자물가가 0.1%포인트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 개도국들은 전체적으로 실질 GDP 성장률이 0.2%포인트 내려가고, 소비자물가는 0.4%포인트 올라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최근 국제유가 상승률이 10%를 훨씬 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계경제에 미치는 충격파가 상당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현재 전략석유비축분(SPR)을 풀어 유가를 안정시키기 보다는 시장기능에 맡기는 쪽을 택하고 있다. 한국이 에너지 절약형, 에너지 고효율 산업으로 구조변화를 서둘러야 함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배연해·주간한국부 기자


배연해·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