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에게 ‘인간의 조건’은 굳은 의지와 능동적 정신이었다. 1927년 중국 상하이에서 장제스에게 배신당한 젊은 공산주의자 키요만은 혁명이라는 가혹한 현실을 총명과 활력으로 극복했다. 일본의 작가 고미카와 준페이에게 ‘인간의 조건’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다. 그것이 무너진 처참한 전장에서 그는 인간이 아닌 ‘짐승의 조건’을 보았다.

두 작가의 ‘인간의 조건’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데올로기 갈등 대신 종교분쟁, 군국주의 대신 인종차별이 인간의 생명을 짓밟고 있는 모습을 인류는 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모두 사라진 저 머나먼 미래에 인간의 조건은 무엇일까.

컴퓨터와 로봇이 인간의 노동과 사고를 대신하고, 인공장기에 유전자 복제까지, 생명체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생명의 유한성.

영화‘바이센테니얼 맨(Bicentennial Man·200년 인간)’은 바로 그 생명의 유한성에 순종하는, 인간이 ‘자연의 섭리’라고 부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인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동명 SF소설을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크리스 콜롬버스 감독과 우리시대의 탁월한 피에로 로빈 윌리엄스가 영화로 옮긴 이 영화의 주인공 ‘200년의 사나이’는 로봇이다. 조립과정의 실수로 감정과 지능을 가지고 2005년에 태어난 가정용 로봇 앤드류(로빈 윌리엄스)는 그러나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명석한 두뇌로 사리판단을 한다. “봉사는 제 기쁨이죠”라는 기계적 장치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감정으로 아이들을 좋아하는 휴머니즘도 가졌다. 인공이지만 두뇌도 명석하고, 손재주도 좋아 조각을 해 돈도 번다. 주인 마틴(샘 닐슨)의 배려로 개인통장도 갖고 한 가족처럼 지낸다. 신체도 인간쪽으로 접근한다.

과학과 자신이 발명한 것들로 강철피부는 말랑말랑한 인조피부, 무표정은 표정있는 인간의 얼굴로 바꾼다. 켬퓨터 회로는 인공심장으로, 심지어 성기능까지 갖춘다. 소화능력도 있어 음식도 먹는다. 인간과 결혼까지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앤드류를 ‘it’로 부른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여전히 기계일 뿐이다. 영화는 그가 늙지 않고, 영생을 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래 인간은 생명의 제한된 시간을 늘리고 그것에 벗어나려 발버둥치면서도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그에게 인간이란 이름을 주지 않는다.

200년을 그렇게 발버둥쳤지만 ‘시간’이란 덫에 걸린 앤드류. 그가 인간이 되고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시간의 유한’을 선택한다. 스스로 인조두뇌에 노쇄기능을 첨가해 죽음을 받아들이자 세상은 그를 가장 오래 산 ‘him’이라고 부른다.

영원하고 완벽한 기계보다는 유한하고 모순 덩어리인 생명체. 그것이 영화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영화는 그 불완전한 것에 대한 찬가이다. 인간에 대한 경배이다. ‘자연의 섭리’에 거역하려는 인간들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다. 앤드류는 처음 사람들이 왜 늙고 죽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곧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셈이 된다. 그 시간의 흐름속에 인간은 늙고 죽는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그 불완전성과 유한성이 인간의 삶을 조금씩 새롭고 아름답고 다양하고 특별한 존재로 살아가게 한다.

앤드류가 마지막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끝내며 아내와 마지막 숨을 거둘때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인연과 사랑과 눈물의 가치를 안다. 그것이 영원하지 않기에. 그것이 인간이다.

이대현·문화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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